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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습관처럼 새벽 다섯시에 기상했다. 토요일인 오늘은 출근을 안 해도 되는 날이다. 하여 늦게까지 잠을 만끽하고 오후엔 가족들과 어디로든 외식 내지는 물놀이를 간다면 딱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같은 여유자적의 향유는 정규직에게나 해당되는 '호사'이지 나와 같은 비정규직에겐 하나도 해당이 되지 않는 '그림의 떡'일 뿐이다.

엊저녁에 지은 압력밥솥 안의 차가워진 밥을 보리차에 말아 오이지랑 대충 뜨고 세수를 했다. 이어 면도와 양치질을 한 뒤 옷을 갈아입고 출근했다. 그렇게 집을 나서는 시간은 만날 통상 오전 여섯 시 전후이다. 시내버스 정류장으로 나가는 길목엔 인력센터가 세 군데나 있다. 오늘도 인력센터 앞을 지나려니 하늘이 꾸물꾸물해서인지 어제보다는 현저하게 적은 일용직 사람들이 그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잠시 후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도착한 813번 버스를 타고 대전고교 앞에서 하차했다. 교문을 장식하고 있는 '대고인의 긍지 살려 명문전통 빛내자'는 전광판의 안내문을 보면서 아울러 정문 우측에 플래카드로 붙어 있는 '대전고 00회 출신 아무개 000(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고위직)에 취임!'이란 문구를 다시금 접하며 걸었다.

그러면서 지난날을 잠시 회상하며 사무실을 향해 걸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충남 제일의 도시인 천안시이다. 지금이야 서울서 출발한 전철이 천안까지 내려오므로 가히 수도권역이 되었으며 인구 또한 어느새 50만이 넘었기에 구청의 설립까지 회자되고 있는 도시가 바로 천안이다. 하지만 내가 어렸을 적의 천안시는 사실 거개 무명(?)의 중소도시에 불과했다. 다만 예나 지금이나 무변한 명성을 자랑하는 천안의 명물인 호두과자라면 또 몰라도.

부서지지 않는 한국판 카스트의 벽

박복한 탓에 겨우 생후 첫돌을 즈음하여 생모를 잃었다. 술을 물 마시듯 하셨던 편부와 몹시도 애면글면 살았던 탓에 항상 가난과 씨름하는 형극의 세월이었다. 그러나 아버지께선 술을 안 드시는 때면 자식에 대한 교육열이 지대하셨다. 그래서 내가 겨우 여섯살 때부터 천자문과 한글책을 사다주시며 깨우치게 하셨다. 이후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입학 전에 그같이 기초를 단단히 다진 덕분으로 순식간에 반에서 1등을 달리는 성적을 거두었다.

이어 4학년부터 6학년 때까지는 회장의 중책도 맡을 수 있었는데 불행의 먹구름은 6학년 1학기부터 더욱 노골화됐다. 그 즈음 중학교를 무시험으로 진학하는 이른바 '뺑뺑이 제도'가 도입되었다. 그 뺑뺑이 제도의 1세대였던 나는 천안중학교에 배정이 되었다. 입학 일정에 따라 등록금만 납부하면 나도 어엿한 중학생이 될 터였다.

하지만 당시부터 아버지께선 더욱 눅진한 자학과 폭음의 늪에 함몰되셨다. 가장의 책무를 포기하신 아버지만 바라보고 있다간 굶어죽기 십상이었다. 당장 나라도 돈을 벌지 않으면 안 되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봉착한 것이다. 공부보다 더 화급한 건 바로 목구멍에 풀칠을 하는 것이었다.

나의 국민학교 졸업식날도 학교에 가지 못하고 천안역 앞에서 구두를 닦았다. 비가 오면 우산을 떼다 팔았으며 심지어는 가짜 고학생 노릇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다. 더 나이를 먹어서는 시외버스 정류장의 행상과 공사장에 나가 막노동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노력을 했음에도 빈곤의 거미줄은 여전히 우리 부자의 숨통을 죄는 암초로 굳건했다. 무심한 세월은 이러구러 흘러 지난 1980년대 초반에 방위병으로 입대했다. 그 당시 나에게도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우린 내가 전역을 하는 대로 결혼하자고 약조한 터였다. 전역을 하고 사회로 복귀했지만 여전히 무지막지하게 가난한 우리집의 현실과 더욱 피폐해진 아버지의 처참한 몰골에서 나는 결심했다. 돈을 더 벌자!

하지만 겨우 국졸 학력의 나라는 무지렁이에게 정규직의 편안한 직장은 그림의 떡이었다. 결국 학력보단 능력을 중시하는 영어회화 교제와 테이프를 판매하는 회사에 세일즈맨으로 입사했다. 맨 땅에 헤딩한다는 각오로 친구에게서 영어를 배웠고 책을 사서 읽고 외우며 지식적 공백을 메워나갔다. '고진감래'의 귀결로서 주임과 소장으로 승승장구도 했으나 곧 이은 회사의 부도는 다시금 나를 비정규직으로 내려앉게 하는 단초가 됐다.

하지만 샛별처럼 빛나는 사랑하는 두 아이들의 눈동자를 보자면 슬퍼하거나 비참해 질 여력조차도 없었다. 나는 다시 다른 세일즈 전문회사로 들어가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던 중 누가 말하길 자동차를 판매하면 돈을 더 벌수 있다고 했다. 하여 모 자동차 판매 지점을 찾아갔다. 그러나 거기서도 역시나였던 건 최소한 학력이 고졸 이상은 돼야 입사서류의 접수조차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비록 정상적인 학력은 고작 국졸이었으되 그간에 읽어댄 숱한 서적과 독학의 내공은 나를 대졸 이상의 지식을 겸비하게 했다고 감히 자부한다. 2년 전 모 문인협회로부터 등단의 권유를 받은 적이 있다. 하지만 하나도 내세울 게 없다는 부끄러움에 스스로 등단을 고사했다. 하여간 나 자신이 여전히 못 배운 놈이란 편견과 자격지심으로 말미암아 고향의 초등학교 동창회엔 일부러 안 나갔다.

그같은 연유는 나보다 모두들 많이 배웠고 잘 사는 친구들을 보기가 시쳇말로 '쪽 팔리기' 때문이었다. 몇 년 전 이곳 대전에서 고향의 초등학교 동창생들 모임이 있어 끌려나가다시피 간 적이 있다. 그러나 술 기운이 만개할 무렵 몇 친구가 그만 또 나의 예민한 복장을 긁고 말았다. '엄연히' 초등학교 동창생들 모임이었음에도 출신 고교가 어떻고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는 따위의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한 때문이었다.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님을 간파했다. 아울러 학력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주홀글씨란 걸 새삼 느꼈다.

"앞으론 니들끼리만 놀아라."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수년간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지금은 관계가 개선되고 복원되어 내가 동창생들 모임의 연락책을 맡고 있지만.

그래도 희망을 본다

그간 세일즈를 하여 돈을 많이 벌기도 했지만 이젠 모두 다 까먹고 무일푼이다. 다만 오롯한 건 사랑하는 가족들이 여전히 내 곁을 지켜주고 있다는 것이다.

거개의 필부처럼 물질사관이 아닌, 오로지 나라는 사람 하나만을 보고 기어코 진득한 고생의 늪을 자초하고 감내한 진정 고마운 천사인 아내가 여전히 고맙다. 가정경제난으로 휴학하고 돈을 벌면서도 여전히 이 못난 아비의 '벗'이 돼주고 있는 아들 또한 살갑고 미안하기 그지없다. 초등에서 고교까지 파죽지세의 전교 1등이란 저돌성을 무기로 그예 서울대생이 된 딸 역시도 이 풍진 세상에 가장 든든한 내 자긍심의 보루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도 모자라 매년 매학기마다 장학금까지 놓치지 않고 있는 딸을 보자면 나도 모르게 불끈 힘이 솟는다.

배우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람 대접을 못 받고 비정규직으로만 살아온 지 어언 수십년이다. 1년을 일해도 10년을 근무해도 여전한 건 퇴직금은커녕 건강보험료조차 지원이 되지 않고 있는 것이 내가 처한 엄연한 현실이다. 그간 일했던 직장을 지난달에 그만 두고 나와 지금은 선배님과 한 사무실을 쓰면서 여전히 세일즈를 하고 있다.

사람에겐 누구나 꿈이 있다. 지금 나의 꿈은 이렇다. 우선 아들과 딸을 대학 졸업하게 만든 다음 하루하루가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만 하는 이 척박하고 험한 비정규직의 세일즈 생활을 청산하는 것이다. 다음으론 최소한의 생활보장만 된다면 그 어떤 일이라도 감내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글만을 쓰고 싶다. 욕심을 더 내서 장편소설까지 집필한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덧붙이는 글 | 내가 겪은 학력 콤플렉스 응모 글입니다


태그:#인물, #학력, #카이스트, #주홍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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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서: [초경서반]&[사자성어는 인생 플랫폼]&[사자성어를 알면 성공이 보인다]&[경비원 홍키호테] 저자 / ▣ 대전자원봉사센터 기자단 단장 ▣ 月刊 [청풍] 편집위원 ▣ 대전시청 명예기자 ▣ [중도일보] 칼럼니스트 ▣ 한국해외문화협회 감사 / ▣ 한남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CEO) 수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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