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여 전부터 미루어두었던 델라웨어 서왕진 전 환경정의 사무처장 집을 찾았다. 서 처장은 델라웨어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학위 논문을 중비 중이다.
지난 번 우리 집을 찾았을 때 함께 만났던 뉴스쿨의 신희영씨, 방학에 맞추어 찾아 온 희영씨와 함께 살고 있는 정연씨, 곧 시민행동에서 일하게 될 유정과 함께 가게 되었다. 삼겹살 파티와 축구 한 판 접대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밀려 있는 원고를 뒤로 하고 나섰다.
델라웨어 대학의 유학생 몇 사람과 어울려 밤새 이야기를 나눈 다음 날 기다렸던 축구 한 판은 무산되었다. 갑자기 경기 장소가 너무 먼 곳으로 변경되는 바람에 미국에서 산 축구화의 시험 가동은 끝내 무산되고 말았다.
갑자기 비어버린 시간 때문에 서 처장은 분주해졌다. 인터넷에서 지도 한 장을 내려 받더니 미술관 한 곳을 구경시켜 줄 곳이 있다며 사람들을 몰고 나섰다.
뭐 미술관이야 뉴욕의 모마나 메트로폴리탄만한 곳이 있겠는가 하는 생각과 미국 촌구석(?)의 미술관에 뭐 그렇게 볼만한 것이 있으랴 싶기는 했다. 하지만 미술관 주변의 경치가 좋고 미술관 옆으로 흐르는 작은 강에서 보트도 탄다길래 좋은 경치 구경하는 셈 치고 가보기로 했다.
촌구석의 미술관, 뭐 볼 게 있겠어?
우리가 찾은 곳은 델라웨어 서 처장 집에서 차로 한 시간 정도 거리에 위치한 펜실베니아 채즈포드의 브랜디와인 리버 미술관(Brandywine river Museum).
어차피 그림에는 문외한이고 본다고 해도 늘 그야말로 그냥 보고 마는 것이긴 하지만 혹시 교양수준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지도 모르니까…. 미술관 들어설 때 늘 하게 되는 생각이다. 여러 번 봐도 여전히 그림은 잘 모르겠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정작 그림보다 다른 모습들이 늘 기억에 더 남곤 한다.
그리 크지 않은 강에서 보트도 타고 튜브 위에 몸을 싣고 먹을 거 먹어가며 강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이야기를 나누길 즐기는 사람들이 있는 강 옆에 서 있는 미술관은 외형이 여느 미술관과 달라 보였다. 입구에 들어서 보니 두 개의 건물을 붙여 하나로 만들었는데, 앞의 건물은 옛 건물이고 뒤에 있는 것이 새로 지어진 것으로 보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오래되어 보이는 건물의 앞부분은 말하자면 방앗간이었던 곳이다. 좀 큰 건물이었으니까 제분소라고 하면 좀 더 정확할라나. 하여간 재밌는 사람들이야, 옛 것을 보존하는 거나 이용하는 데 정말 많은 정성을 쏟는 것을 이 곳 저 곳에서 볼 수 있었는데 이 곳도 예외는 아니다.
3층 건물인 미술관에 걸린 작품을 그린 사람들은 세 사람. 이 곳이 고향이면서 3대가 화가인 와이이스(Wyeths)가 사람들의 작품이다. 이런 3대가 화가인 것도 독특하지만 그 세 사람의 고향에 이런 미술관을 짓다니…. 특히 아버지인 앤드류 와이이스의 그림들은 한 눈에도 대부분의 그림들이 자신이 사는 동네의 사람들과 풍경이 무대인 것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에 나온 풍경, 바로 여기네
평생 여기서 그림을 그렸나 보구나. 평생 한 동네서 그림을 그리고, 그 고향 사람들은 그들을 위한 미술관을 짓고…. 이 동네 사람들로 보면 이 미술관에 걸린 그림을 그린 화가의 유명세와 관계없이 스스로 자랑스럽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런데 집에 돌아 와 '와이어스'란 화가를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니 유명한 화가다. '위키피디아'에서 찾으니 인물화와 풍경화로 20세기에 가장 유명한 화가 중의 한 명이란다. 1948년에 <크리스티나의 세계>라는 작품으로 주목 받았고, 1970년부터 85년까지 한 여성을 모델로만 그린 연작시리즈 <헬거 시리즈>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상도 많이 받았다. 1963년에 화가로는 최초로 케네디 대통령이 주는 대통령 자유상을 받았다. 1977년에는 미국인으로서는 두번째로 프랑스 아카데미 데 보자르의 회원, 1980년에는 생존한 미국 미술가로는 처음으로 영국 왕립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고 한다.
미술 쪽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이런 경력이 어느 정도의 무게가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이런 정보를 미리 알고 가서 보았더라면 좀 다른 '감상'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하여간 그러고 보면 이 곳 사람들은 자기 고향의 사람이 자기 고향에서만 그림을 그리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가 되고 그의 그림을 보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자신들의 동네로 와야만 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아마도 자신들이 보존하고 키워가는 고향을 한없이 소중하게 만드는 일이라는 자부심을 느낄 만하다. 실제로 이 미술관은 1971년에 건설되었는데, 이 미술관을 건설한 곳은 1967년 만들어진 브랜디와인 보존국이다.
1960년대 중반 이 곳 일대가 대규모 개발이 이루어지게 되자, 주민들이 이 일대의 땅을 사들이고 이를 관리할 기구인 브랜디와인 보존국을 만들었고 보존국의 환경관리센터가 미술관을 세운 것이다. 왜 이 미술관 건물의 일부가 제분소였는지 이해되는 일이다.
미술관 일부가 제분소였던 까닭
미술관이나 박물관도 중앙집중화되어 대도시에 몰려 있거나 지방자치단체들이 경쟁적으로 지역의 특징을 살린다며 만드는 허세성 기념관들 대신에 그것이 개인이든 주민들의 의지든 자발적으로 만들어지는 이런 미술관들이 생명력이 긴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미술관은 아니지만 갑자기 세상의 축음기란 축음기는 다 모여있는 강릉의 참소리 박물관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몇년전에 들은 이야기인데 강릉에 사는 한 고집스런 개인의 수집으로 이루어진 참소리 박물관이 어느 대기업의 제안으로 수도권에 올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올해 초에 강릉 경포호 인근으로 이전했다는 애기를 들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브랜디와인리버 미술관처럼 그 지역의 명물로 자리잡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지역의 주민들이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는 상징과 문화적 기제들이 주민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지고 유지될 때 걸려 있는 그림들에게서만 감동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 자체가 주는 의미를 되새김질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 데에서 문화 공간은 생명력이 생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싶은 생각이다.
그리고 미술관 내부에서 내려다보는 브랜드와인리버의 모습도 나름 운치있는 광경이었다. 미술관 내 복도의 의자에서 가만히 강을 내려다 보고 있을 수 있는 여유를 만끽하는 것은 브랜디와인리버 미술관이 관람객에게 주는 보너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