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수'도 애초에는 시위하는 학생들을 향해 "저 썩을 놈들, 비싼 돈 들여 대학가서 저게 뭔 짓이냐"는 반응을 보이다가, 시내 돌아가는 사정을 보면서, 그리고 자신도 '피해자'가 되면서 "이게 아니다"는 판단을 하죠.
'진수'의 어머니(김을동)는 새벽에 무작정 식당으로 들이닥쳐 뒷문으로 도망가는 학생과 군인을 마주칩니다. 인심 좋은 아주머니답게, 도망간 학생을 배려하는 마음에 어디로 도망갔는지 애써 숨기고 군인을 막으려 하지만, 군인은 몽둥이를 휘둘러 '어머니'를 구타하죠.
그뿐일까요? 마음을 주고 있던 동네 다방 아가씨가 시위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실탄이 장전된 총에 맞아 죽고 맙니다. 이게 그 당시의 현실이었습니다.
'발포 명령자'와 '진압군'의 명령체계 사이에서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건 분명히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태수'는 거리로 나서려는 '진수'를 향해 "너 혼자 대체 뭘 하겠다는 거냐. 어차피 승산 없는 싸움이다. 너 빈주먹으로 나가서 뭘 어떡하려고 하느냐"면서 그를 말리려 합니다. 그에 대해 항변하는 '진수'의 한 마디가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형 시방 지금 뭔가 잘못 알고 있소. 이게 싸움이요? 이건 싸움이 아니지라잉. 길 가는 여자를 쏴 죽이는게 우째 싸움이다요?
어찍하긴요. 그러면 안된다고 말해야지라. 그 총이 무신 총이냐? 우덜이 세금내서 산 총이다. 우덜은 누구냐? 국민이다 이 말이요.
국민한테 고로코롬 하면 안된다고 보여줘야지라잉. 가만히 놔불면 그 썩을 놈들 나중에 또 그럴 것 아니겄소. 요로코롬 해도 되는구나 할 것 아니겄소. 나 말이 틀렸소잉?
이게 거리로 나선 분들의 일반적인 정서였습니다. 사랑하던 가족과 친구, 연인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그것도 영문도 모르고 말이죠. <모래시계>에는 심지어, '진압군'이 재미삼아 임산부를 죽이는 장면까지 나옵니다. '진수'의 말대로 '고로코롬 하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줘야' 할 일이었습니다.
<모래시계>의 인상적인 장면들
'간첩의 사주를 받고 있고 총을 가진 폭도'들을 진압하기 위한 '계엄군'으로 나서 혼돈에 빠져 명령불복종까지 시도하는 '우석'의 이야기도 진지합니다. 그러던 '우석'도 친한 동기가 총에 맞아 사망하자 이성을 잃고 총을 쏩니다.
그러다가 역시 총에 맞은 '진수'를 들쳐 메고 도망가는 평생 친구 '태수'를 보게 됩니다. '태수'를 쏘려는 선임하사를 미친 듯이 제지하는 '우석'의 장면, 정말 인상적입니다.
본질은 그겁니다. 그 당시의 분노는, 앞서 이야기했듯이 사랑하는 이들이 영문도 모르고 죽었다는 슬픈 현실로부터 시작된 거죠.
총을 들고 최후의 결전에 임하는 시민들이 모인 '광주시청'에는 중학생도 나타납니다. "나도 총 쏠 수 있어라." 그 중학생도 사랑하는 부모님과 가족을 잃었을 것입니다.
'진수'가 죽은 뒤, 그의 고등학생 동생도 총을 들고 시청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두 아들을 시청으로 보낸 어머니는 시청에서 들려오는 총소리에 피눈물을 흘리면서, '태수'를 향해 이야기합니다.
"타지 사람잉께 살아 있어야지. 살아서 남들한테 우리 얘기를 해줘야지. 우리 말을 안믿을지도 모릉께 타지 사람이 우리 얘기를 해줘야지. 그것이 나의 부탁이고, 우리 진수의 부탁이여.
거절하진 않겄지? 그려. 죽는 게 마음 편하겄지. 그래서 내가 부탁하는 것 아니여.
그랬죠. 이 '타지 사람들'의 이야기는 15년이 지나서야 다시 빛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모래시계>에서는 '타지 출신'으로서 광주에 있던 사람도 있습니다. 경상도 말투로 구수하게 '타지'로 나가 소식을 전해야 나간다는 것을 설명하던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따, 몰라서 묻는교? 내 고향은예, 대한민국 아닙니껴? 현재 주민등록증은 여기 광주시로 돼 있구예, 내 처자식도 가게도 다 광주에 있십니더."
그 27년 후
'그분'은 현재 29만원의 재산으로 놀라울 정도로 잘 먹고 잘 살고 계시죠. 군사독재정권에 뿌리를 둔 모 정당의 대선주자도 세배를 가기도 했습니다. 여전히 힘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이고, 역사를 우롱하고 우리를 우롱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강풀의 <26년>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잊혀져가는 이 비극의 역사를 인기있는 만화작가가 섬세하고 흥미로운 설정으로 거론하고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지식인이라면, 그리고 대중문화 콘텐츠 생산자라면, 외면해선 안됩니다. 싸우고 알려야만 합니다. 잊혀져가는 역사의 비극과 부조리를 다시 알려 그 의미를 되새기는 일에 앞장서야만 합니다.
<26년>에서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는, '계엄군'으로서 광주로 향했다가 마음에 무거운 짐을 안은, 말기 암환자로서 죽기 전에 양심의 자유를 얻고자 노력하는 '암살사건'의 지휘자 '김 회장'입니다.
'계엄군'이었던 사람들도, 마음의 짐과 빚을 안고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모래시계>에서도 그랬죠. '우석'은 '태수'의 광주 이야기를 들으며 애써 자신의 이야기를 감추다가, 훗날 자신이 직접 '태수'에게 사형을 구형한 이후에 그 이야기를 합니다. "나, 그때 너 광주에서 봤었어."
이 마음의 빚, 양심과 상식을 위해 갚아야 할 것입니다. '우석'은 정치적 압력에 굴하지 않고 양심적인 검사로서 거듭났으며, <26년>의 '김 회장'은, '광주의 자식들'을 모아 직접 행동에 나섭니다.
직접 행동에 나서지 않아도 좋습니다. 본인의 입으로 직접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 당시에 느꼈던 괴로움, 양심의 가책, 그 어느 것이어도 좋습니다.
영화 <화려한 휴가>, 드라마 <모래시계>, 강풀의 만화 <26년>, 엔터테인먼트 장르가 때때로 역사를 반추하고 우리로 하여금 몰랐던 부분을 깨우치거나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곤 합니다. 이 모든 힘들이 모여, 역사의 힘, 상식의 힘, 양심의 힘이 이길 수 있는 세상이 되길 기원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미디어다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