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근대사와 관련하여 자주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중국 인민은 중국 관헌을 두려워했고, 중국 관헌은 서양 오랑캐를 두려워했으며, 서양 오랑캐는 중국 인민을 두려워했다."
중국 인민도 두려워하지 않는 서양 오랑캐에 대해 중국(청나라) 정부가 저자세를 취한 것을 두고 비판하는 취지를 담은 이야기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가위·바위·보 관계가 위 삼자 사이에서 작용한 것이다.
위 삼각관계에서 중국 인민이 중국 관헌을 두려워한 이유나 중국 관헌이 서양 오랑캐를 두려워한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서양 오랑캐가 중국 인민을 두려워한 것은 19세기 초반 이래의 항영(抗英) 투쟁이나 태평천국운동(1851~64년) 등에서 나타난 중국 인민의 역량을 서양열강이 직접 목도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제1차 아편전쟁(1840년)이 있고나서 20여 년이 지난 1860년대부터는 영국·러시아 등 서양열강이 중국에 대한 군사적 침략노선을 포기하고 경제적·문화적으로 중국을 침탈하는 방식으로 선회했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중국을 어느 정도 경험한 이후에 서양열강은 중국을 식민지로 만들기보다는 반식민지(형식적으로 주권국이면서 실질적으로는 종속국)로 만드는 쪽으로 전환했다. 중국에서의 20년 경험이 그들에게 '지혜'를 준 것이다.
지난 7월 27일 금요일 오후 3시~5시에 중국 칭화대학(청화대학) 원베이로우(역사학과 건물) 309호에서 열린 '손중산·모택동·등소평과 20세기 중국'이란 특강에서 이 대학 역사학과 부주임인 왕치 교수는 서양열강의 노선 변경을 위의 삼각관계와 관련지어 설명했다. 참고로, 중러관계를 전공한 왕치 교수는 현재 이 대학에서 중러연구센터 상무부주임도 겸하고 있다.
왕치 교수는 서양열강이 애초의 의도와 달리 중국을 반식민지로 만드는 데에 만족한 것은 위의 삼각관계에 대한 '터득'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는 "중국 인민을 직접 상대하는 데에 부담을 느낀 서양열강은 자신들이 중국 인민을 직접 통치하기보다는, 만만한 중국 관헌을 통해 중국 인민을 간접적으로 지배하는 것이 더 효율적임을 깨닫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계속해서 그는 "이것은 서양열강이 위 삼각관계를 역이용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인민은 두렵지만 중국 관헌은 두렵지 않으므로, 중국 관헌을 통해 중국 인민을 지배하면 된다는 계산을 했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 중국 인민은 중국 관헌을 두려워하므로 중국 관헌을 앞세우면 중국 인민이 두려워서 저항하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을 했다는 것이 왕 교수의 말이다.
"그런데 일본은 이런 삼각관계를 무시했다"는 것이 왕 교수의 말이다. "일본은 중국 인민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바로 그런 배경에서 그들이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일으키게 된 것"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다른 말로 하면, 일본은 앞의 가위·바위·보 관계에 무지했다는 것이다.
중국 인민의 위력 인식한 서양, 그렇지 못했던 일본
왕 교수의 말처럼, 중국 인민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일본과 서양은 분명한 대조를 보였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서양열강은 1860년대 이후로 중국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 데 반해, 뒤늦게 중국 무대에 후발주자로 나타난 일본은 군사적 침략을 통해 중국을 식민지로 만들려는 '원대한 야심'을 품었다. 서양열강은 중국 인민의 위력을 인식했지만, 일본은 그렇지 못한 것이다.
2005년 12월 11일자 <제2차 세계대전에 가려진 중국의 항일전쟁>이란 기사에서 소개한 바 있듯이 일본이 1927년에 중국정복계획을 담은 다나카 상주문을 국가정책으로 채택할 수 있었던 데에는, 왕치 교수의 말처럼 그들이 중국정부의 무능함만 보았지 중국 인민의 위력은 깨닫지 못한 것도 한 가지 원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위의 삼각관계에 어두웠던 일본은 서양열강이 중국무대에서 물러나기 시작한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오히려 중국침탈에 더욱 더 열을 올리면서 중국 민중의 미움을 한 몸에 안게 되었다(2005년 12월 7일 기사 <후발주자 일본이 중국을 더 많이 침탈했다> 참조).
물론 일본이 후발주자로서 중국을 더 많이 침탈한 데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그중 한 가지는 왕치 교수가 언급한 것처럼 중국 인민의 저력에 대한 무감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일본은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민중의 저항에 밀려 1945년의 패망을 맞이하고 말았다. 물론 일본의 패망에는 한국 민중의 저항도 중요한 몫을 하였다. 중국무대에 먼저 진출한 서양열강 중에는 중국침략 때문에 패망한 나라가 하나도 없는데, 유독 후발주자인 일본만이 중국 등에 대한 침략으로 인해 패망의 쓴 잔을 마시게 된 것이다.
그동안 미국의 영향을 받아온 한국의 교과서에서는 일본의 패망이 미국의 원폭 투하 덕분이라는 식으로 가르쳤지만, 역사적 진실을 놓고 본다면 일본은 분명 한국과 중국 민중의 저항 때문에 패망한 것이다.
그것은 일본의 주된 표적이 한국·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대륙이었다는 점, 일본과 주로 싸운 상대가 한·중 두 민족이었다는 점, 일본군 100만 대군이 중원에서 발이 묶인 것이 패전의 결정적 계기였다는 점, 진주만 기습은 중국 전장(戰場)에서의 부진을 만회하기 위한 국면 전환용에 불과했다는 점, 원폭 투하 이전에 이미 일본군은 전쟁을 그만두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약화되어 있었다는 점 등으로 실증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과 중국, 전통을 강하게 고집하는 기질 가져
이처럼 중국 등 동아시아인들의 저항력에 둔감한 일본은 상대방에 대한 인식의 불철저함 등에 기인하여 결국 패망의 독주를 마시고 말았다. 또 일본은 점령지역에 일본식 문화를 강제로 주입하려다가 도리어 강한 반발을 초래하는 등 '서툰' 점령자의 한계만 드러내고 말았다.
중국인들도 새로 들어온 이민족 정권(요나라·금나라·원나라·청나라 등)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지만, 그런 정권들은 기본적으로 중국의 전통을 인정하는 전제 하에서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또 한민족 역시 상당 기간 강대국에게 사대를 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방이 한민족의 자율성을 인정한다는 전제 하에서 가능했다.
자신의 전통을 강하게 고집하는 이러한 기질은, 서양이나 일본은 물론이고 고대·중세에 북방 유목민들이 한·중 두 지역을 침략하는 데에 중대한 장애물로 작용했다. 비유를 하자면, 외래 정복자들이 동아시아에서 신중해지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일종의 과속 방지턱 같은 것이 이 지역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랜 기간 동아시아의 변방에 있었던 터라 대륙문화에 익숙하지 않았던 일본은 이런 '과속 방지턱'이 있는 줄도 모르고 시속 160킬로미터의 '쾌속 운전'을 장시간(1874년 대만침공 이래) 동안 즐겼던 것이다.
과속 방지턱을 무시하고 달린 탓에 차가 상할 대로 상한 상태에서 길옆의 어린아이가 던진 돌멩이 두 개를 맞고 운전자는 급브레이크를 밟았고, 이 운전자는 차가 상한 진짜 원인도 모른 채 그저 차를 보호하기 위해 '어린아이'에게 한없이 굽신거리고 있다. 어린아이가 돌멩이를 더 던질까봐 무서워하는 것이다. '과속 방지턱'의 위력에 대해서는 여전히 무감각한 채로 말이다.
동아시아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서양열강도 동아시아에 대해 지극히 신중한 태도를 보인 데 반해, 일본은 같은 동아시아권에 살면서도 한·중 두 지역의 문화에 대해 몰지각한 태도를 보이다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더 딱한 것은 일본이 같은 동아시아권 사람들의 정서에 대해 여전히 매우 둔감하다는 점이다. 함께 살고자 하면 얼마든지 포용할 것이고, 남은 다 죽이고 혼자만 살려고 하면 극력 대항할 것인데, 일본은 아직도 한·중 두 민족의 기질에 무감각한 듯하다.
일본은 지난날 한국·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민중이 보여준 끈질긴 저항력을 되돌아보고, 앞으로는 대륙침략을 통해 자국의 미래를 개척하기보다는 대륙과의 공존 속에서 자신의 미래를 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세상은 일본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녹녹하지 않다는, 너무도 새삼스러운 사실을 하루빨리 깨닫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