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물며 6년간 봐왔던 모든 시험을 합친 국가고시 공부의 고됨이야 짐작이나 하겠는가. 만일 전가의 보도인 '족보'(몇 년간 반복 출제되는 문항을 모아놓은 것)가 없었다면 사법고시 못지않은 난이도를 자랑할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힘든 시험이 의학계열 국가고시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대학시절 마지막 방학이 그들에게 여유로울 리가 없다.
1998년부터 6년제로 개편된 수의학과는 1990년대 후반 동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사회의 전문직 선호도 상승에 편승해 인기학과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의학과, 치의학과, 한의학과에서 인간만 공부하는 반면 수의학과에서는 다양한 동물을 두루 공부해야 한다. 자연히 공부양이 적을 수가 없다.
건국대학교 수의학과 본과 4학년에 재학 중인 현정수(26)씨의 여름방학은 학기 중보다 훨씬 바쁘다. 학기 중에도 23학점의 힘든 학사일정을 보냈던 현씨였지만 방학 중 살인적인 스케줄에 비하면 학기 중의 생활은 천국이었다고 말한다.
"방학이 시작하자마자 2주 동안 학교에서 자체 세미나를 들었다"는 현씨는 "10과목이나 되는 국가고시 과목을 어떻게 공부해야 할 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현씨에게 방학 중의 여가활동에 대해 묻자 "국가고시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마땅히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고 말한다.
졸업만 하면 안정적인 삶이 보장될까
현씨의 고민은 국가고시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장차 말 전문 수의사를 꿈꾸는 현씨는 현재 프랑스어 공부에 여념이 없다. 매주 5회(각 2시간씩) 어학원을 찾아 프랑스어를 공부한다는 현씨는 "말 진료가 활성화된 프랑스로 유학을 갈 생각으로 불어를 공부 중"이라며 "사람들은 수의학과는 면허만 따면 밝은 미래가 펼쳐질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2000년대 초 '반려동물 열풍'을 타고 동물병원이 호황을 누렸던 적이 있었지만 반려동물 거품이 꺼지고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동물병원 탓에 '묻지 마 식 개업'은 경쟁력이 없어진지 오래다. 이에 현씨를 비롯한 수의학과 학생들은 각자 졸업 후 자신만의 무기를 만드는 데 여념이 없다.
미국 수의사 시험을 준비 중인 건국대학교 수의학과 강지웅(28)씨는 요즘 두 마리 토끼를 잡느라 정신이 없다. 한국보다 수의사에 대한 대우와 사회적 인식이 월등히 좋은 미국 수의사를 목표로 2년 전부터 GRE(미국 대학원 입학자격 시험)시험을 준비해 온 강씨였다.
"한국인이 미국 수의사 국가고시 문을 뚫기란 매우 어렵다"는 강씨는 "만에 하나 미국 국가고시에 떨어질 때를 대비해 한국 수의사 국가고시도 동시에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용어와 시험과목이 판이한 두 가지 시험을 동시에 준비하려다 보니 여름방학 동안 여행은 생각할 수도 없다"는 강씨의 말에서는 측은함마저 느껴졌다.
IMF로 인한 대량실직의 여파로 불기 시작한 의학계열 광풍. '의학계열에 진학하면 편하게 살 수 있다'는 왜곡된 집단 무의식은 수많은 수험생을 적성과 무관하게 의학계열로 진학하게 했고 의학계열에 재학 중인 학생들을 취업전선에서 해방된 행복한 집단쯤으로 인식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마지막 여름방학에서 '해방된 자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여행은 고사하고 단 일주일만이라도 맘 편하게 쉬어봤으면 좋겠다는 강씨에게 만일 학과를 다시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때도 수의학과를 선택하겠느냐고 물었다.
"잘 모르겠다. 이 일이 좋고 보람되기는 하지만 공부가 너무 힘들다. 그렇다고 밖에서 생각하는 것만큼 보장된 미래가 있는 것도 아니고…"라며 강씨는 말을 잊지 못했다. 살인적인 공부양과 국가고시에 대한 부담감도 힘들지만 무엇보다 불안정한 미래가 가장 답답하다는 게 강씨의 말이었다.
'대학교 6학년' 그들의 마지막 여름방학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지독히 더운 여름 날씨만큼이나 지독히도 답답한 마음을 안고서.
덧붙이는 글 | 조광민 기자는 <오마이뉴스> 6기 인턴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