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이 병들면 보살도 병이 든다고 했다. 중생의 병은 곧 보살의 병으로 전이된다. 보살은 괴로운 바다에서 건져달라고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소리에 가슴을 앓고 이에 응답을 한다. 여기서 보살은 특정 종교인을 일컫기보다는 진정한 종교인이라고 말하고 싶다.
박청수 원불교 교무. 가녀린 여자의 몸으로 50년 넘는 교직(성직) 생활에서 괴로움 속에서 도와 달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게 되면 그때부터 가슴앓이가 시작된다. 그들의 고통이 바로 자신의 고통으로 자리 잡는다. 그의 자비의 손길은 온 세계를 보듬는다. 그가 50년 동안 도와준 나라는 55개국에 이른다고 한다. 돈으로는 100억원을 훨씬 넘는다고 한다.
원불교 교무는 봉급이 없다. 용금이라고 해서 한 달에 20만원 남짓 생활비를 받는다. 그런 이가 어떻게 그 많은 돈을 모으고 고통 속에 헤매는 그 많은 사람들을 도와 줄 수 있었을까. 빈자의 어미니 박청수 교무의 가슴속 이야기가 있다. 도서출판 여백에서 펴낸 <하늘사람> 속에 담겨 있다.
그는 종교를 직업으로 하는 성직자이지만 앞에서 이야기한 예수교를 믿는 서울의 한 초등학교 교사처럼 자기 종교를 믿으라고 고함치지는 않았다. 종교의 울을 넘어 천주교에서 경영하는 성 라자로 마을의 후원자가 되어 30년 넘는 긴 세월을 나환자의 친구가 되고 그들을 돕는 신부와 수녀의 손을 잡았다.
천주교에 도움만 준 것이 아니라 신부와 수녀의 도움을 끌어내어 가난과 무지 질병에 헤매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추위에 떠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북한에 컨테이너 9개, 인도에 9개, 캄보디아에 7개 등 30개가 넘는 컨테이너에 헌옷을 채우는 데는 원불교 신자보다는 천주교 신자의 도움이 더 컸다고 한다.
그가 이렇게 이교도의 도움을 받게 된 것은 자기 종교의 교세를 넓히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 교무가 원불교 믿으라고 외치고 다닌다면 천주교 신부가, 그리고 수녀가 그의 튼튼한 후원자가 될 까닭이 없지 않는가. 또 그들의 일터(성 나자로 마을 등)로 받아들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박청수 교무, 그는 굶주린 사람을 보면 밥을 주었고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을 보면 병원을 지어 무료로 치료해주었다. 히말라야 설산에 병원을 짓고 기숙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치게 했다. 예수교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100억 원이 넘는 돈으로 하늘을 뚫는 교회를 짓고 수천수만의 성도를 모아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목사보다는 아프리카인들 속에서 가난을 벗 삼아 질병에 시달리는 환자를 치료한 슈바이처가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겠는가.
우리 국민이 예수교에 대해서 고마운 마음을 갖는 것은 대형 교회를 지어놓고 수많은 성도를 모아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있지 않다. 학교를 짓고 병원을 지어 우리 아이들을 교육하고 병든 사람을 치료해 준 것에 대한 것이다.
한국에서 일어난 군소 종교에 지나지 않는 원불교, 교세를 넓히기 위해 고민하고 걱정하는 교무들도 많다. 큰돈을 희사한 신자도 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들이 누군지 모른다. 박청수 교무같이 자기 심신을 불쏘시개로 자비의 불꽃을 피우고 있는 사람에게 박수를 보내게 된다.
박청수 교무의 <하늘사람>은 진정한 종교인의 갈 길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이며 부처의 자비가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우리 중생이 괴로움의 바다를 벗어나 낙원의 세계에 이르게 될 것인지에 대한 대답을 들려준다.
'하늘사람' 항시 욕심이 담박하고 생각이 고상하여 맑은 기운이 위로 오르는 사람이라고 한다. '하늘사람'은 '맑고 향기로운 사람'으로 세상을 '맑고 밝고 훈훈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우리는 원불교 신자도 아니고 천주교 신자도 아니고 개신교 신자도 아니고 불교 신자도 아닌 하늘 사람이 되어 인류의 3대 공적인 '빈곤, 무지, 질병'에 맞서 싸우는 형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하늘사람>, 박청수, 도서출판 여백. 값 1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