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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아랍 요새 안 야외행사장에서 찍은 성곽 모습
옛 아랍 요새 안 야외행사장에서 찍은 성곽 모습 ⓒ 김성호
왕궁박물관 앞에 내걸린 안내문 "공공장소에서 입키스는 하지 마세요"

머큐리 하우스를 지난 해안가 쪽으로 쭉 걸어가자 오래된 성벽 앞에 넓은 공원이 나왔다. '포로다니 가든(Forodhani Gardens)'이라는 해안가 공원이다. 공원 안에는 야외공원 무대시설이 설치되어 있고, 5명으로 이뤄진 록 밴드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노래가 끝나자 사회자가 마이크로 공원에 몰려 있는 청중들을 상대로 스와힐리어로 인사를 하고 있었다.

무대 전면에 보니 '제9회 다우 국가 페스티벌(The 9th Festival of Dhow Countries), 2006년 7월 14∼23일'이라는 커다란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오랫동안 인도양을 중심으로 다우선을 통해 교역과 문물 교류를 해온 동아프리카 국가와 인도, 파키스탄, 이란, 걸프만 국가와 인도양 섬나라들이 참여하는 영화와 음악 등 종합 문화 행사이다.

지역이나 대륙의 지명을 사용하지 않고 그들 사이의 문물과 문명의 소통의 수단이었던 다우선을 주체로 '다우 국가'라고 부른 것은 참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과, 중앙아시아, 이란 등 옛 페르시아 제국 등을 '실크로드 국가'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공원의 뒤쪽으로는 잔지바르의 유적지들이 인도양을 바라보면서 나란히 줄지어 서 있었다. 오래된 아랍 요새와 '경이의 집'이라는 궁전, 왕궁 박물관 등이다. 오래된 아랍요새는 소형 무대 공연장으로 활용되고 있었고, 잔디 공원은 야외행사장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내가 갔을 때도 요새 안의 잔디 공원 입구 게시판에는 "저녁 7시부터 다우 국가 페스티벌 행사의 하나로 공연이 열린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옛날 요새를 야외공연장으로 활용하니 마치 고대 그리스 야외 원형극장 같은 고풍스런 멋을 풍겼다.

요새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베이트 엘 아자이브(Beit el-Ajaib)로 불리는 '경이의 집(House of Wonders)'은 1883년 세워진 술탄의 궁전인데 최초로 전기가 들어오고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것을 보고 사람들이 놀라워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문 앞에는 인도양을 향해 대포 2문이 놓여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왕립박물관 앞에 있는 "공공장소에서 입키스는 하지 마세요"라는 팻말
왕립박물관 앞에 있는 "공공장소에서 입키스는 하지 마세요"라는 팻말 ⓒ 김성호
그 옆의 베이트 엘 사헬(Beit al-Sahel)이라 불리는 '왕궁 박물관(Palace Museum)'은 지난 1964년 술탄이 붕괴하기 전까지 왕궁으로 쓰였던 곳이다. 옛날 술탄과 잔지바르의 역사를 보여주는 여러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2층에는 술탄의 딸인 살메(Salme) 공주와 독일인 사업가와의 연애에 대한 책들이 판매되고 있었다. 3층 베란다에서 바라보는 푸른 인도양이 아름답다.

왕궁 박물관 입구에 붙어 있는 '길거리 사랑에 대하여(About Street Love)'라는 제목의 팻말이 재미있다. "공공장소에서 입을 맞대는 키스(Mouth-Kissing)를 삼가 달라"는 호소이지만, 사실상 '키스 금지' 안내이다. 이슬람교리 이전에 어디서나 공공장소에서의 지나친 애정표현은 눈살을 찌푸리게 마련이다.

위로 조금 더 올라가면 3층짜리 흰색 건물에 하늘색 베란다가 멋진 옛 진찰소(올드 디스펜서리ㆍOld Dispensary)가 나온다. 지금은 기념품 가게와 카페 등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잔지바르에 있는 유적지들은 옛날 식민지배자였던 아랍의 통치자인 술탄의 역사이고, 아프리카인의 역사는 아니었기 때문에 나에게 크게 흥미를 끌지는 못했다. 그 다음 찾아간 곳은 재래시장이다. 다라자니 시장에는 여느 아프리카 시장답게 생선과 과일, 키짐바니 농장에서 보았던 각종 향신료, 옷 등을 팔고 있었다.

끌려가지 않으려는 노예의 마지막 흔적이 역력한 지하 수용소

남자 노예 지하 수용소의 모습(조그만 구멍 2개가 바람통).
남자 노예 지하 수용소의 모습(조그만 구멍 2개가 바람통). ⓒ 김성호
마지막으로 내가 걸어서 간 곳은 노예시장이다. 재래시장에서 조금 내려오다 음쿠나지 파출소가 보이고 이를 끼고서 골목으로 들어가니 성 모니카 호스텔이 보였다. 모니카 호스텔 앞에 조그만 철제 팻말로 '옛 노예시장 터'라고 쓰여 있었다.

예전 커다란 노예시장 터에는 노예 지하 수용실만 보존되어 있고, 노예 거래 시장 터에는 영국 성공회 성당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입구 바로 옆으로 들어가는 작은 지하 통로가 바로 노예 지하수용소이다. 지금은 성공회 성당으로 쓰이는 노예 매매시장에 끌려나가기 전 노예들이 마지막으로 수용되었던 곳이다.

잔지바르의 슬픈 역사일 뿐 아니라 인류 역사상 최악의 치욕스런 현장이다. 지하실 입구에는 노예무역을 반대했고, 성공회 성당을 지은 영국인 신부 에드워드 스티어(Edward Steere) 주교의 사진과 활동이 적힌 팻말이 있다. 스티어 주교는 이곳 성당 제단 아래 묻혀 있기도 하다.

세 번을 꺾어 돌아 깊은 지하로 내려가야 두 개의 수용소 방이 나왔다. 오른쪽은 조금 큰 지하방이고, 왼쪽은 그보다 작은 방이다. 모두 캄캄한 시멘트 바닥에 가운데 구덩이 겸 통로가 있었다. 시멘트 바닥과 천장 사이는 1m도 안 되어서 서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앉아 있기도 불편할 정도이다.

여성 노예 지하 수용소의 모습(쇠사슬은 목을 묶던 도구이고, 가운데 구덩이가 화장실).
여성 노예 지하 수용소의 모습(쇠사슬은 목을 묶던 도구이고, 가운데 구덩이가 화장실). ⓒ 김성호
안내자는 "오른쪽 방은 여자 노예들이 수용되었던 방인데 한꺼번에 60∼70명이 들어왔으며, 왼쪽 방은 남자 노예들이 한꺼번에 40∼50명 수용되었던 방"이라고 설명했다. 노예들은 따로 화장실이 없고 가운데 구덩이 겸 통로에 그대로 대소변을 봐야 했으며, 가끔 똥차가 와서 치웠다고 한다. 지하 돼지우리와 같다고 보면 된다.

지하수용실에는 당시 노예들의 목을 묵었던 쇠사슬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노예들의 목을 쇠사슬로 감고 자물쇠로 채우다 보니 한 명이 드러눕거나 일어나면 모두 같이 따라 해야 했다.

여자 수용소에는 바람이 통하도록 하기 위해 3개의 조그만 햇빛 구멍이 나 있었고, 남자 수용소에는 2개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노예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바람구멍을 작게 만든 데다 좁은 지하 공간에 많은 숫자를 한꺼번에 수용하다 보니 질식사하거나 굶어 죽는 경우가 허다했다. 똥오줌으로 뒤범벅이 된 돼지우리 같은 수용소에 갇혀 있다 보니 병에 걸려 죽은 노예도 적지 않았다.

안내자는 "지하수용소에서 살아남아 팔려나가는 노예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했다. 실제로도 처음 붙잡힌 노예 중 살아남은 자는 5분의 1밖에 안되었다고 한다.

어두운 지하수용소에 가느다란 한줄기의 빛이 들어오자 시멘트 바닥과 벽에 긁힌 자국과 푹 파인 흔적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끌려나가지 않으려는 노예들의 몸부림이 남긴 흔적으로 다가왔다. 지하수용소 곳곳에서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노예들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노예 경매시장 터 위에 세워진 성당

노예 시장 터 위에 세워진 영국 성공회 성당의 모습.
노예 시장 터 위에 세워진 영국 성공회 성당의 모습. ⓒ 김성호
지하수용소에서 나와 노예가 실제로 팔리는 옛 노예시장 터로 갔다. 지금은 영국 성공회 성당이 노예시장 터 그 자리에 우뚝 솟아 있다. 예전에 노예 경매시장이었던 곳이다. 아프리카 각지에서 붙잡힌 노예들은 바가모요와 킬와 항구 등을 통해 잔지바르로 끌려 왔다. 일단 지하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노예시장이 열리면 이곳 성공회 성당 자리에서 경매에 부쳐 팔려나갔다.

노예에 관한 역사책들은 '노예경매'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노예들은 경매에 부치기 전 피부에 코코넛 오일을 발라 광택을 내게 하거나 얼굴은 붉은색과 흰색으로 줄무늬를 그려 넣어 호기심을 자극하고, 여자의 경우에는 목걸이와 팔찌를 착용시키기도 했다. 노예 무역상들이 비싼 값에 노예들을 팔기 위한 전략이었다.

노예는 '인권적 인간'이 아니라 단순한 '이윤을 내는 상품'에 불과했다. 탐험가 리빙스턴은 <잠베지 강과 그 지류>라는 탐험기에서 "이 끔찍한 상거래는 인명에 대한 멸시와 피에 대한 갈증이 이성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고 썼다.

잔지바르에서의 노예무역이 금지된 것은 1873년. 영국 정부의 압력에 의한 것이었다. 이 비극적인 역사를 되새기자는 취지에서 1877년 노예시장 터에 성공회 성당이 세워졌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자 왼쪽의 방명록 위에 노예 매매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었다.

오른쪽으로는 신도들이 앉는 의자가 좌우로 정렬되어 있고, 20∼30m 정면에 신부의 설교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신도들이 기도하는 자리가 옛날 노예를 사기 위해 몰려들었던 노예 무역상들이 있던 곳이고, 신부의 설교단은 강제로 끌려온 노예가 경매에 부친 장소이다.

노예 경매 장소의 자리를 신부 자신의 설교단으로, 노예를 사려는 노예 무역상들이 서 있던 자리를 신도들의 자리로 만든 것은 이 성당을 건설한 주교의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신부가 자신을 노예의 위치로 생각하고, 신도들은 노예 무역상이 된 자신을 되돌아 보면서 속죄하자는 의미가 아닐까. 신부의 설교단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받는 예수상이 그려져 있는데, 팔려가는 노예의 고통이 오버랩되었다.

아프리카 여러 곳에서 만나는 인도주의적 탐험가 리빙스턴의 발자취

성공회 성당 내부에 걸려 있는 리빙스턴 십자가.
성공회 성당 내부에 걸려 있는 리빙스턴 십자가. ⓒ 김성호
설교단 아래의 왼쪽 벽면에는 예수가 못 박혀 있는 모습이 새겨진 1m 정도의 나무 십자가가 걸려 있다. 평범한 십자가 같은데, 나무 십자가 앞에 내력이 적혀 있었다. '리빙스턴 십자가(Livingstone Cross)'이다.

노예무역에 반대했던 탐험가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1873년 숨진 잠비아의 일라라(Ilala) 지역 치탐보 마을의, 리빙스턴의 심장이 묻힌 자리에서 자란 나무의 가지로 만든 십자가라는 설명이다. 이 십자가는 리빙스턴을 기려서 1901년 이 성당에 기증됐다고 한다.

리빙스턴이 죽자 아프리카의 충성스런 신하였던 추마와 수시는 열대 기후에 썩지 않도록 하기 위해 리빙스턴의 심장과 내장을 모두 꺼내 치탐보 마을의 큰 나무 아래에 묻고, 유해는 14일간 햇볕에 쬐어 말려 미라처럼 만든 뒤 영국으로 보냈다.

추마는 야오족 출신이지만 어린 노예로 끌려가고 있었으나 리빙스턴이 해방시켜준 인물이다. 리빙스턴의 부인 메리(Mary)도 앞선 아프리카 탐험에 동행했다가 병에 걸려 1862년 잠베지 강의 슈팡가(Shupanga) 지역에서 사망해 바오밥나무 아래 묻혔다.

수많은 유럽의 탐험가들 중에서 리빙스턴이 아프리카인들 사이에서 인정받는 것은 선교사 이전에 아프리카 현지인의 입장을 고려한 인도주의적 시각과 노예무역에 대한 반대와 철폐에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여행 중 나는 이곳 탄자니아뿐 아니라 말라위의 리빙스토니아 마을과 잠비아 쪽 빅토리아 폭포의 리빙스턴 기념 구리상, 리빙스턴시, 리빙스턴박물관 등에서 리빙스턴의 흔적을 만날 수 있었다.

성당을 나오면 뜰 한편에 노예를 추모하는 시멘트 조각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지하 수용소에 갇혀 있던 노예를 상징하듯 땅을 판 네모난 공간에 한 가족으로 보이는 할머니와 부부, 아들 등 5명이 한꺼번에 목이 쇠사슬에 묶인 채 끌려가는 비참한 장면을 묘사했다.

리빙스턴은 <잠베지강과 그 지류>라는 책에서 "남자와 여자, 어린아이들이 사슬에 묶인 채 뱀처럼 구부러진 행렬을 이루며 언덕을 지나 마을의 오솔길로 접어들었다"며 "불쌍한 남자포로들의 목은 길이가 약 2m 정도 되는 나무줄기의 두 갈래로 벌어진 가지 사이에 끼워진 채였고 가지 사이는 철끈으로 고정되어 있었다"고 말했다. 조각품의 노예 묘사와 다르지 않다.

치욕의 역사는 숨긴다고 가려지지 않는다

노예를 추모하는 시멘트 조각기념물.
노예를 추모하는 시멘트 조각기념물. ⓒ 김성호
지난 1830년에서 1873년 사이 이곳 잔지바르에서 팔려간 노예숫자만 60만 명이나 된다. 잔지바르에서 팔려간 노예들은 주로 오만과 아라비아, 페르시아 등 중동지역과 인도로 끌려갔고, 일부는 잔지바르의 향신료 농장에서 일해야 했다. 이슬람이 이슬람교도의 노예화를 금지하자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은 아프리카인들을 대거 노예로 잡아갔다.

아프리카 노예무역은 16세기부터 19세기 말까지 3백여 년 동안 자행되었는데, 무려 6천만 명의 아프리카인들이 노예로 끌려갔다. 동아프리카에서는 아랍상인들이 잡아들인 노예가 중동지역으로 끌려갔고, 서아프리카에서는 유럽상인들에 의해 유럽대륙과 서인도제도, 미 대륙 등으로 잡혀갔다.

조셉 콘래드의 소설 <어둠의 속>에는 한 아프리카인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검은 사하라사막의 모래알 하나만도 못한 야만인을 이렇게 애석해한다는 걸 아마 이상하게들 생각할 거야. 그건 말이야. 그가 어떤 일을 했기 때문이야. (증기선 조종간의) 키를 잡아준다는…."

아프리카인은 인간이 아니라 단순한 기계로 인식하고 있던 당시 유럽인의 노예관을 보여준다.

동아프리카에서는 내륙 깊숙이 빅토리아 호수와 콩고 주변의 탕가니카 호, 니아사 호(말라위 호)에서까지 노예를 잡아왔다. 니아사 호 주변의 아프리카 야오족은 아랍상인들로부터 받은 총 등 무기로 다른 부족을 잡아 아랍 상인에게 팔아넘겼다.

야오족(Yao)이 아프리카 노예의 숫자를 증가시켰다면, 케냐와 탄자니아의 마사이족은 노예 숫자의 감소를 가져왔다. 일부 아프리카 부족이 유럽과 아랍 상인들의 노예무역에 동조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유럽과 미 대륙의 자본주의 발전에 노예의 희생이 있었다면, 아프리카는 급격한 인구감소와 농업쇠퇴, 문명 발전의 장애로 오늘날까지도 빈곤의 악순환에 시달리고 있다. 노예무역은 일본의 군대위안부 문제처럼 단순히 지나간 과거의 일이 아니다.

성당을 나오는데 아프리카 현지 학생 20여 명이 단체로 버스를 타고 내린다. 노예 역사의 현장 방문이다. 노예 지하수용소와 영국 성공회 성당은 살아있는 역사교과서로써 활용되고 있었다. 치욕의 역사는 감춘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드러내놓고 반성과 교훈으로 삼는 것이 진정한 역사의 가르침이다.

전통 문양과 테두리를 화려한 색상으로 칠한 잔지바르 대문.
전통 문양과 테두리를 화려한 색상으로 칠한 잔지바르 대문. ⓒ 김성호

#아프리카#탄자니아#잔지바르#스톤타운#리빙스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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