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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마니타스
많은 사람들이 올라섰다가 내려선 길에 아직도 서 있는 사람들이 있다. 나 역시 일찍이 그 길에서 내려섰으나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아직도 그 길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이고, 그 만남에서 나는 거의 매번 감당할 수 없는 소중한 느낌을 받는다. 그렇게 길 위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에게 물 한 잔 떠다 주는 일이라도 성의껏 하며 살자는 것, 그래서 최소한'길을 막는 사람'이 되지는 말자는 것, 그것이 길가에라도 남아있기 위한 나의 다짐이다.

저렇게 겸손하게 자신은 길가에라도 남아있고 싶다고 고백하는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저자, 하종강은 '한울노동문제 연구소'를 운영하며 지금도 길 위에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2년 8개월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세월동안 만난 사람들 49명의 이야기를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라는 책으로 엮어 선보였다.

책으로 만나기 전, 하종강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그곳에 올려진 글들을 이것저것 골라 읽으며, 나도 언젠가는 '내가 만난 사람들'을 정리해 보리라던 야무진 꿈이 너무 부끄러워 슬그머니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하종강이 만난 진짜 노동자'라는 부제가 조그맣게 붙은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노동운동이 자리 잡지 못한 척박한 땅에 뛰어들어 자신을 불사르며 아직도 그 험난한 길 위에서 끊임없이 길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을 인터뷰한 글모음이다.

구미유학생간첩단사건 당시 양심을 지키기 위해 준법서약에 서명하지 않은 최후의 1인 강용주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이며 모든 노동자의 어머니가 된 이소선 여사, 동일방직 똥물 사건의 주인공에서 진짜 농부가 된 안순애, 장애인으로 전환교육의 세계적인 석학이 된 김효선, 1년 6개월동안 장기수들의 누이동생이 되어 민들레 모임을 이끌었던 전남대 법대의 살아있는 전설이라 불리는 박영란, 자신을 고문당하게 만들었던 송영수 등 여전히 길이 없는 길에서 길을 만들며 몸과 마음을 불사르는 이들의 이야기는 읽는 이들에게 단순한 감동을 넘어 가슴 뭉클함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끼게 만든다.

그는 단호하게 결론을 내린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사회의 주인공들이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는 사람들이라고. 그의 결론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책을 읽은 이들이라면 누구나 깨닫게 될 것이다.

책에서 소개하는 이들은 한결같이 소위 힘없고, 빽 없고, 화려한 조명을 받을 일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가진 것이라고는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우직한 신념 하나뿐이다. 황무지처럼 황량한 길조차 없는 곳에서 안팎으로 불어오는 거센 바람을 오로지 정신력 하나로 버티며 후배들이 걸어 올 수 있는 길을 만들어가는 이들은 우리와 똑같은 감정을 지닌 보통 사람들이다. 다만 그들이 조금 선량하고 때가 덜 묻은 우직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일 뺀다면.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물리적 길눈이 어두운 소위 '길치'이다. 가장 큰 이유를 들라면 적극적으로 길을 알려한다거나 스스로 길을 개척할 의지가 없이 그저 남을 따라다녔기 때문일 것이다.

더욱 부끄러운 사실은 물리적 길이 아닌, 내 삶의 인생길 위에서도 나는 향방을 모르는 미아인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난 그저 누군가 만들어 놓은 길이 있다면 그 길을 따라 가면 목적지에 도착하려니, 누군가 길을 만들겠거니 그렇게 안이한 생각만 하고 살았으니 정말 할 말이 없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주인공들이 만든 길이 아직 협소하지만 우직하게 길을 만든 이들의 피땀으로 방향과 목적지, 길이 생겨났고, 조금씩이나마 함께 손잡고 갈 의지 또한 생겨나는 것이다.

엄마, 내 말 잘 들으세요. 노동자들은 캄캄한 암흑세계에서 일하고 있는데, 나는 보다가 더 볼 수가 없어요. 내가 죽어서 그 캄캄한 암흑세계에 작은 창구멍을 하나 낼 테니가, 내가 죽으면 노동자와 학생들이 모두 힘을 합해 그 창구멍을 조금씩 넓히는 데 힘을 보태 주세요. 그러면 빛이 보일 거예요. 어떻게든 하나가 돼서 싸워야 돼요. 둘이 돼도 안 돼요.

전태일 열사는 임종의 순간 말을 할 때마다 목에 피가 고여서 칼로 목을 따내며 이소선 여사에게 모두 하나가 되어 창구멍을 넓히라고 그 일을 이소선 여사가 실천해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하고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소선 여사는 아들의 유언을 충실하게 지켜 이 땅 노동자들의 어머니로 살며 250회가 넘게 경찰서에 잡혀갔지만 아들과의 약속을 철저하게 지켰다.

캄캄한 암흑세계에 자신의 몸을 불살라 창구멍을 낸 전태일 열사는 길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스스로 길잡이가 되어 생명을 버린 것이다. 전태일 열사의 죽음이 헛되지 않으려면, 허세욱 열사의 죽음이 헛되지 않으려면 '누군가 내 대신 길을 만드는 이가 있겠지'라는 안이한 생각부터 버려야만 한다.

이제 나 또한 적극적으로 길을 만드는 사람이 되지 못한다면, 적어도 길을 가로막는 거침돌은 되지 말아야겠다는 의지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샘솟아 오르고 있다.

"당신은 길을 만드는 사람인가, 길을 막는 사람인가?" 당신 자신에게 조용히 자문해 보라.

덧붙이는 글 | 길에서 만난 사람들/하종강/후마니타스/1만 2천원


길에서 만난 사람들 - 하종강이 만난 진짜 노동자

하종강 지음, 후마니타스(2007)


태그:#하종강, #노동자, #노동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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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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