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동안 논란이 되어왔던 [라], [로], [류], [리], [림] 씨 등에 대한 두음법칙 적용이 지난 달 대법원에 의해 제한적으로 해제되어 '나' '노' 유' '이' '임' 씨 성을 쓰던 사람들에게 희망이 생겼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씨가 대부분 그렇듯이 한자를 원조로 해왔음으로써 우리 한글로 표기할 경우 부득이 발생한 문제들이었다. 지난 1994년 이후 호적 漢-한 병기제도(호적 예규)가 적용되면서 국어기본법 제 14조에 의거, '공공기관의 공문서는 어문 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하여야 한다'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성씨도 '두음 법칙을 따라야 한다'라는 규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ㄹ'로 시작되는 성씨의 사람들이 'ㅇ'으로 바꿔 써야 하는 서글픔을 맛보아야 했다.
그것이 우리 말과 우리 글을 쓰는 이 땅에 사는 사람으로 마땅히 따라야 할 국법 준수의 국민의 도리였던 것이다. 나의 경우, 수풀 림(林)의 성을 지니고 있는데, '林'은 분명 '림'으로 소리 내어지는 글자이다. 지금 신용카드 등에 영문 표기는 'Lihm'으로 하고 있다. 이는 한글에서의 두음 법칙 적용이 아니라면 당연히 '림'으로 소리내고 표기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쓰여지고 있는 두음 법칙 적용의 성씨 표기로 하여 사실상 실생활에서의 나의 한문 성씨는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내게 있어 '林'씨 성은 없어진 거였고 '임'씨만 남았던 것이다. 이것을 뒤집어 말하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성씨는 없어지고 국가가 주는 국가의 성씨 밖에 가진 것이 없게 된다.
기자가 무슨 고대의 개국공신이라도 되어서 국가로부터 성씨를 새로이 하사받은 것이 아니라면 나는 본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조상을 잃어버린 사람이 되는 것이다. 갑자기 뜨내기가 되어버린 것 같아 허전하고 불행에 빠진 것 같기도 한 것이다. 이점으로 하여 항상 정서적 불편을 겪어왔던 것도 사실이다. 이것을 아들 손자, 다음, 또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생각해보자.
아마도 나와 같은 경우의 'ㄹ'자 성씨의 사람들이 대부분이지 않을까 싶다. 지금 우리나라의 인구가 4900만 명이라고 한다. 그 중에서 'ㄹ'자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1,100 만명이라니 무려 우리나라 인구의 5분의 1 이 넘는 수치이다. 이들이 다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 개연성을 지닌 5분의 1 이상의 사람들이 성씨 표기로 인하여 정서적 불편을 느끼고 산다면 이는 국가가 그 만큼의 국민에게 불행을 주고도 책임지지 않았다는 증좌이다. 마땅히 한글학회나 어문관련 기관들도 이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에 머물러있지 않다. 이번 대법원의 7.29 판결에 의해 구제되는 성씨 정정의 범주가 매우 법 정신에 어긋나고 있다는 점이다. 그 판결 내용은 '그동안 주민등록 등초본, 운전면허, 학교생활 기록부 등 각종 문서나 일상생활에서 [ㄹ]자로 써왔던 사람에 한하여 정정'해 주겠다는 것이다.
그동안 각종 문서 등에서 'ㄹ'자를 고집하고 버텨온 부류보다도 국가의 법칙 적용에 부응하여 'ㅇ'자를 써온, 다시 말하면 법을 준수해온 부류는 제한을 당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런 자기모순적 판결이, 그것도 대법원에서 내려졌다는 것은 단지 5분의 1 정도의 국민들에 대한 모욕과 무시를 넘어서는 판결이 아닐 수 없다.
|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