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지하철 2호선과 13호선의 환승역인 시즈먼역에 가면 좀 특이한 광경을 보게 된다. 마치 낙타처럼 지어진 그곳 역사(驛舍)를 보면 '건물 모양이 왜 저럴까'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시즈먼 지역은 중국이 낳은 세계적 작가 라오서(1898~1966년)의 1930년대 소설인 <낙타상자>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그의 소설을 기념해서 시즈먼역을 아예 낙타처럼 지은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것은 라오서가 문화대혁명 때에 홍위병의 공격을 받는 과정에서 사망했다는 점이다.
라오서와 <낙타상자>에 관해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자금성 동쪽에 있는 라오서 기념관이다. 지난 1984년에 베이징시 문물보호단위로 선정된 곳이다.
시즈먼역에서 지하철을 탄 뒤에 1호선 왕푸징역에서 내려 북쪽으로 10분쯤 걸어가면 천주교 동당이 나온다. 동당을 지나 첫 번째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돌아 약 5분 정도 걸어가면 오른쪽에 작은 서점이 하나 나온다. 그곳이 바로 라오서 기념관이다. 서점 오른쪽의 골목 안에 기념관 정문이 있고, 서점으로 들어가면 쪽문을 통해 기념관에 입장할 수 있다.
기념관에 들어가기에 전에 관심을 가진 부분은, 모택동을 숭상하는 이 사회에서 라오서가 과연 어떤 대우를 받고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문혁 때에 희생당한 중국 최고의 문인이라기에, 그리고 현재의 중국 지식인들이 대체로 문혁을 비판하고 있기에, 그가 혹 현대 중국에서 어떤 굉장한 대우를 받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호기심이 든 것이다.
그러나 막상 기념관에 당도해보면, 기념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일반 주택이라는 사실에 실망할 수도 있다. 라오서가 살던 집을 기념관으로 개조한 것이다. 그래서 라오서 구쥐(옛집)라고도 불리고 있다. 베이징에 체류하고 있을 때인 지난 7월 27일에 이곳을 들러보았다.
장소도 장소지만, 기념관 정문 옆에 걸린 안내문 역시 한없이 조심스럽기만 하다. 안내문에는 라오서가 문혁 때에 희생당한 지식인이라는 영웅담 같은 것은 없고, 그가 중국작가협회 부주석 등을 지낸 거물이라는 점만이 강조되고 있다.
모택동 숭배와 충돌을 일으킬 만한 내용은 일절 적혀 있지 않은 것이다. 혹시 모택동의 라이벌쯤 되는 인물은 아닐까 하던 호기심은 기념관을 찾은 지 불과 몇 분 안에 싹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기념관 안을 둘러보면서 전혀 색다른 감상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기념관 안에 전시된 유물들이 어떤 묵시적 방법으로 모택동과 문혁, 아니 인간의 사회체제 자체를 비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기념관에는 라오서가 생전에 사용하던 서재가 보존되어 있다. 투명한 유리벽을 통해 내부를 잠시 들여다보면, 라오서의 책상 위에 일력 하나가 놓인 것을 보게 된다.
문혁의 피바람에 시달리던 라오서가 실종된 날인 1966년 8월 24일자 일력이다. 8월 24일자 일력은 라오서가 변사체로 발견되기 전날의 일력으로서, 그의 마지막 지문이 묻은 일력이기도 하다. 어떤 무언의 저항을 시사하는 일력이다.
그런데 기념관에서는 이 일력을 드러내놓고 홍보하고 있지 않다. 라오서의 서재가 궁금해서 유리벽 너머를 뚫어지게 응시하는 관람객들이 잠시 후 어렵지 않게 그 일력을 볼 수 있도록 해 놓은 것이다. 약간 어두침침한 서재 안을 들여다보다가 8월 24일자 일력을 뚜렷이 발견하게 되면,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가슴 찌릿함 같은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기념관은 어떤 무언의 방법으로 모택동과 문혁 나아가서는 중국사회를 포함한 인간사회 전체에 대해 모종의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지하철 2호선 시즈먼 역사를 낙타 모양으로 만들게 할 정도의 세계적 작품을 쓴 중국 최고의 문인이 어떻게 1966년 8월 25일에 변사체로 발견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을까? 그리고 '죽은 라오서'가 인간사회에 전하려는 그 강렬한 메시지는 무엇일까?
청나라의 지배층인 만주 기인 출신으로서 북경에서 태어난 라오서의 본명은 슈징춘이었다. 그는 영국 작가 디킨스의 작품을 모방한 처녀작 <라오장의 철학>을 1926년 6월 <소설월보>에 연재하면서 중국 문단에 데뷔하였으며, 1933년 <이혼>과 1937년 <낙타상자> 등을 발표하면서 문인으로서의 지위를 굳혀 나갔다.
그리고 <낙타상자>가 미국에서
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된 일을 계기로 라오서는 일약 세계적 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낙타상자>는 영어 외에도 여러 개의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한국에서는 최영애(김용옥 교수의 부인)씨가 <루어투어 시앙쯔>라는 제목으로 번역한 바 있다.
<낙타상자>는 군벌 통치시기의 베이핑(지금의 베이징)에서 가난한 인력거꾼으로 생계를 연명하던 샹쯔(祥子, 상자)라는 착실하고 과묵한 남자가 군인들에게 인력거를 빼앗기고 강제 사역을 당하다가 부대에서 낙타 3마리를 훔쳐서 탈출한 사건을 계기로 겪게 되는 고달픈 인생 역정을 소재로, 부조리한 사회구조 속에서 끝없이 고통 받을 수밖에 없는 선량한 한 인간의 상처를 그린 작품이다.
<낙타상자>의 주인공 샹쯔가 사회구조와 자신의 모순으로부터 고통을 겪은 것처럼, <낙타상자>의 '창조주'인 라오서 역시 신중국 건설 이후 사회구조와 자신 사이에서 모순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 등 서방세계에서 그의 작품이 대환영을 받은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사회주의 중국에는 그다지 '적합한' 문인이 아니었다.
그런데 라오서는 현실에 맞서기보다는 현실에 적극적으로 '적응'하려는 노력을 보인다. 1946년 3월부터 미국에 체류한 그는 1949년에 중국으로 돌아와 1951년에는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게 된다. 그리고 1952년 5월에 <모 주석은 나의 문학에 새로운 생명을 주셨다>를 발표하면서부터 사회주의 문학이론에 기초하여 자신의 기존 문학에 대해 자아비판을 가하기 시작한다.
이후 그는 기존의 주요 작품에 대해 개작·첨삭을 서슴지 않았으며 일부 작품에 대해서는 사상적 오류가 있었다면서 스스로 절판을 단행하기도 했다. 1966년 사망시까지 중국 문화계의 간판으로서 각종 문화행사와 대외활동에 앞장서는 등 그는 어떻게든 돈을 벌어 잘살아 보려다가 타락하고 만 샹쯔처럼 사회주의 현실에 적응하려고 무던히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런 그도 문화대혁명의 피바람을 피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본래 사회주의 작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1966년 1월 모택동에게 보낸 서한에서 문혁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 그였지만, 같은 해 5월 무렵에는 매일 같이 중학생 중심의 홍위병들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당해야만 했다. 사회주의 중국에 그처럼 '아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라오서는 '부르주아 작가', '반동 문인', '봉건귀족의 후예'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변사체로 발견되기 이틀 전인 8월 23일 오후에는 어린 학생들로부터 끔찍한 수모를 당하고 말았다. 라오서를 포함한 30명가량의 작가들이 트럭에 실려 국자감 건물에 납치된 뒤에 온갖 욕설을 다 듣다가, 200여명의 학생들로부터 여러 시간 동안 칼과 창과 몽둥이로 구타를 당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피투성이가 된 채로 24일 새벽에 귀가했다.
부상을 제대로 치료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그는 24일 오전에 지팡이와 <모택동 시사> 1권을 지참한 채 "운동에 참가해야 한다"고 외치면서 외출했고, 바로 그 길로 그는 실종되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날 베이징사범대학 남쪽의 태평호(지금은 매립상태) 서안에서 그의 변사체가 발견되었다.
자살이냐 타살이냐 라는 논란이 있었지만, 중국 경찰은 부검 같은 절차는 거치지도 않고 그의 시체를 곧바로 바바오산 무덤에서 소각해버렸다. 호수에 스스로 투신한 것이라면 시신에 물이 묻어 있어야 하는데, 발견 당시의 변사체에서는 물이 일절 묻어 있지 않았다 한다.
중국 경찰이 그의 시신을 곧바로 태워버렸으니, 정확한 사망원인을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대학 교수까지 지낸 중국 최고의 문인에 대한 예우치고는 너무나 형편없는 것이었다.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중국 최고의 문인으로서 자신에게 썩 탐탁지 않은 사회주의체제에 대해 그리고 문혁에 대해 별다른 저항도 해보지 못한 상태에서 어떻게든 현실에 '적응'하려다가 끝내 죽음을 당하고 만 한 지식인의 말로를 보면서, 인간이 만든 사회체제의 불완전성이라는 문제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주관적인 느낌인지는 몰라도, 라오서 기념관이 무언의 방법으로 웅변하고 있는 메시지 역시 바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구성원들의 머릿속을 통제하고 나아가 의사표현까지 억압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인간의 사회체제는 그처럼 자신 없는 시스템일까. 스스로 항복해 오는 지식인에 대해서까지 그토록 참혹한 종말을 안겨야 할 만큼, 인간의 사회제체는 그렇게 잔혹하고 폭력적인 것일까.
라오서가 생존을 위해 사회주의 중국에 어떻게든 적응하려고 애쓴 측면을 배제하고 이 문제를 바라볼 때에, 사회체제에 부적합한 인물은 어떻게든 순응시키거나 제거할 수밖에 없는 인간사회 시스템의 한계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라오서는 사회주의 중국에서는 1949년 이전의 자아를 유지할 수 없었다. 사회주의가 옳은가 자본주의가 옳은가 하는 문제를 떠나서, 1949년 이후의 중국은 1949년 이전의 라오서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라오서가 누리던 표현의 자유는 더욱 더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사회주의 중국은 인민에게 경제적 평등과 토지를 보장했다는 점에서는 칭찬받을 만하지만, 사회와 대립되는 사상의 소유자를 정상적인 경쟁이 아닌 비정상적인 억압의 방법으로 억눌렀다는 점에서는 용렬한 체제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평등과 자유를 동시에 보장할 수 있는 체제는 현재까지는 출현하지 않았다.
인간의 자유 특히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비단 사회주의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상대적으로 더 많은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도 양적 차이에 불과할 뿐이다.
이제까지 인간이 만든 모든 사회체제는 그 구성원들에게 한정된 표현의 자유밖에 제공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리고 '할당된' 표현의 자유를 '초과 사용'하는 구성원에 대해서는 최고 사형 혹은 암살이라는 무서운 형벌이 주어졌다.
인간의 자기표현을 위한 수단이어야 할 사회체제 혹은 국가가 도리어 그 자신의 자기표현을 위해서 창조주(주권자)인 인간의 자기표현을 억압하고 심지어는 살상까지 서슴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또 이제까지 인간이 만든 모든 체제가 그 같은 만행을 저질러왔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생각하면서, 인간은 정말로 완벽한 사회체제를 창조할 수 없는 걸까 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라오서 기념관이 방문객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메시지는 바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회나 국가가 자기 자신의 표현을 위해 구성원인 인간의 표현을 억압하고 있는 그런 모순된 현실에 대한 무언의 저항 같은 것. 그리고 인간이 만든 체제는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결코 완전할 수 없다는 사실.
평등을 보장하는 대신에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회, 표현의 자유를 약간 보장하는 대신에 평등을 억압하는 사회. 그 어느 사회도 완전한 체제는 아닐 것이다.
그런 사회체제 속에서, 마치 굴곡진 낙타 모양의 시즈먼역처럼 인간의 정신도 한없이 왜곡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