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안숙선 명창. 올해 데뷔 50주년을 맞았다. 세곡동 집에서.
안숙선 명창. 올해 데뷔 50주년을 맞았다. 세곡동 집에서. ⓒ 오마이뉴스 김대홍
1957년은 '타향살이'로 큰 사랑을 받은 고복수가 시공관에서 은퇴 기념공연을 하던 때였다. 제1회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시작되고 한강제3철교가 개통된 것도 1957년이었다.

당시엔 누구도 의식하지 못했지만, 이후 한국음악계에 큰 영향을 미친 큰 별도 이때 첫 발걸음을 내딛었다. 바로 무형문화재 안숙선(59) 명창이 이해에 명인 주광덕 선생으로부터 소리의 기초를 닦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50년. 당시 '애기 명창'이란 소리를 듣던 안 명창은 어느덧 소리 인생 반세기를 맞이했다. 한 방송국은 안숙선 기념 공연을 마련했고, 여러 매체는 그의 지난 세월을 돌아보는 인터뷰를 실시했다.

한창 '어른' 대접 받을 이력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현역이다. 지난달에만 김해 한가야예술단 창단 10주년 기념 음악회, KBS 소리 50년 기념 무대 공연, 한국저축은행 '제6회 제비꽃민속잔치' 무대에 올랐고, 오는 20일엔 러시아 공연, 30일엔 '제40회 난계국악축제' 무대에 설 계획이다.

여기에 매주 토요일 정동극장에서 어린이들 대상으로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수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얼마 전 여수세계박람회 홍보대사로 위촉됐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 전주세계소리축제 위원장 일도 계속 맡고 있다. 그의 빽빽한 일정표에서 그는 아직 여전한 '현역'이다.

최근 안 명창을 만나 국악 반세기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소리꾼이 넘쳤던 외가와 유학 가풍이 강했던 친가

제자를 가르칠 때 이런 웃음을 보기란 쉽지 않다.
제자를 가르칠 때 이런 웃음을 보기란 쉽지 않다. ⓒ 오마이뉴스 김대홍
서울 강남 세곡동 은곡마을에 있는 안 명창의 집을 9일과 13일 두 차례 방문했다. 아파트가 없는 마을, 집보다 풀과 나무가 많은 동네는 아늑한 느낌이었다. 안정을 취하면서 소리에 전념하고자 했던 안 명창이 오랫동안 고르고 고른 끝에 택한 동네다.

나무로 짠 마루와 벽, 햇살을 담뿍 받은 풀과 꽃이 보이는 창을 보니 마음이 푸근해진다. 차를 준비해놓고, 목부터 축이길 권하는 안 명창에게 어떻게 소리의 세계에 발을 딛게 됐는지 물었다. 화려한 외가쪽 소리 인맥들이 쏟아진다.

1949년 전북 남원군 산동면 대상리 안재관, 강복순씨 3남2녀 중 장녀로 태어난 안 명창은 예능에 탁원한 외가 덕분에 일찍부터 소리에 눈을 떴다.

대금 산조 인간문화재인 강백천(1898-1982)이 어머니의 사촌, 이모가 신광용(1912~1961)류 가야금 산조 경남도 예능보유자인 강순영, 외삼촌은 동편제 판소리 명인이었던 명창 강도근(판소리 인간문화재, 1918-1996)이었다. 어쩌면 그는 소리를 할 운명이었던 셈이다.

문제는 친가 쪽이 여성의 사회활동을 꺼려하고, 예능을 낮게 생각하는 유교 가풍 집안이었다는 점이다.

"아유. 힘들었지요. 아버지께선 항상 '다소곳이 앉아라'고 강조하셨는데, 무대에선 어찌 그리 되나요. 소리를 하다 보면 몸도 움직여야 하고, 율동도 해야 하는데. 게다가 어릴 땐 <춘향전>에서 방자 역할도 맡고 했으니, 아버지 등 친가 쪽의 주문에 대해선 당혹스러웠죠."

재미있는 것은 그런 아버지도 동네 어른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선 안 명창을 무척 자랑스러워했다는 점이다.

초등학교 5학년까지 학교를 다닐 때는 공부를 곧잘 해 간부도 맡았던 안 명창은 초등학교만 졸업했으면 국악중·국악고를 다닐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안 명창의 나이 13세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더 이상 학업을 계속 한다는 것은 어려웠다. 게다가 그는 장녀였다.

"학교를 왜 더 안 다니고 싶었겠어요. 물론 소리만 평생 해도 (시간이) 모자라요. 그래도 이론이 곁들여지면 아무래도 더 효과적이죠. 만약 내가 대학까지 졸업했으면 많이 따지고 싸우고 그랬겠죠(웃음). 국악이 과학적이지 않고 체계적이지 않다 그러면 막 성이 나요. 나는 체험을 통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거든요. 아쉽죠."

"만약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까지 진학할 수 있었겠냐"고 물었다. 안 명창은 "당연하죠"라면서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엔 소리 50년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공부를 더 하지 못한데 대한 아쉬움이 배어 있었다.

무대에선 미소지어도 제자 가르칠 때는 엄격

남원 지방에서 이름을 떨치던 '애기 명창'은 곧 서울로 진출한다. 당대 최고의 명창으로 인정받던 김소희(1917~1995), 박귀희(1921~1993) 두 사람을 동시에 스승으로 모시게 된 것. 실력만큼이나 제자 욕심도 많았던 두 사람은 소리계의 라이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안숙선을 대하는 태도는 똑같았다. 안숙선 명창이 결혼을 하게 되자 남편과 시어머니를 찾아가 "앞으로 우리음악계을 이끌어 갈 테니 포기하지 않도록 잘 도와달라"고 말할 때도 함께였다. 동편제(강도근)와 서편제(김소희)라는 두 흐름을 받아들였던 안숙선은 김소희로부터 판소리, 박귀희로부터 판소리 병창을 익히며 누구도 갖기 힘든 경험을 쌓았다.

그의 빼어난 재능은 두 스승을 멀어지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어느 날 박귀희 명인이 가야금 병창 전수자로 안숙선을 전격 지목한 것. 내심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던 김소희 명창은 섭섭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하지만 93년 개봉 영화 <서편제>에 함께 참여했고(송화-오정해의 소리 역할), 95년 임종 때엔 안숙선이 김소희의 임종을 지켜보게 하며 자신의 마음을 드러냈다.

영화 <서편제>에서 송화가 30대 나이로 득음의 경지에 이르는 부분인 '심봉사 눈뜨는 대목'(심청가 중)은 안숙선, 영화 끝난 뒤 자막에서 나오는 소리는 김소희의 목소리다.
영화 <서편제>에서 송화가 30대 나이로 득음의 경지에 이르는 부분인 '심봉사 눈뜨는 대목'(심청가 중)은 안숙선, 영화 끝난 뒤 자막에서 나오는 소리는 김소희의 목소리다. ⓒ 오마이뉴스 김대홍
두 스승에게 무엇을 배웠는지 물었다. 안 명창은 소리에 대한 치열함과 인격이라고 말했다. 무대에서도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무대 밖에서도 항상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말라는 것.

특히 김소희 명창의 경우 반드시 한복을 단정히 차려입고 수업을 받도록 했고, 옷매무새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꾸중을 했다. 밥 먹는 예절도 무척 신경을 썼다. 우쭐한 모습을 보일 때도 불호령을 내렸다.

그런 두 스승의 엄격함이 지금의 안숙선을 낳았다. 안 명창은 "두 어른이 돌아가시고 난 뒤, 그늘이 얼마나 큰 지 알았다"고 털어놓았다.

두 스승의 지도 방식은 고스란히 안 명창에게 전해진 듯 했다. 인터뷰 자리에 함께 한 한승석(40·중앙대 출강)씨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런 모습을 보였다. 안 명창은 "아마 내가 두 스승보다 더 독하게 제자들을 가르칠 것"이라며 웃었다.

"천한 국악? 우리 음악을 체계화해야 할텐데"

1970년 국립창극단에 입단한 안 명창은 이후 수궁가의 토생원 역, 심청가의 심청 역을 맡으며 창극단 주역으로 활약한다.

1986년엔 판소리 다섯 마당을 완창했고, 95년엔 국악인으로선 처음으로 삼성 나이세스와 3년 전속계약을 맺었다. 1986년 남원춘향제 명창경연대회 대통령상, 87년 한국방송KBS 국악대상, 1993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을 수상했다. 97년엔 40대 젊은 나이로 인간문화재(중요무형문화제 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 기능 보유자)에 등극했다.

1994년 유럽순회 공연 때는 더 타임스로부터 "가슴이 터질 듯한 강렬한 소리, 언어로 인해 서로 상이한 문화를 이해할 수 없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창의 탁월성은 이같은 난관을 극복해냈다"란 찬사를 받으며 전통음악의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이후 프랑스 등 유럽지역에서 판소리 마니아까지 만들어내면서 98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예술문화 훈장을 받기도 했다. 화려한 시절이었다.

2003년 현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할 땐 김영임·김성녀 등과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 후 일각에서 듣게 된 소리는 그를 큰 충격에 빠트렸다.

"천한 국악' '기생이나 하는 것'이란 소리를 들었어요. 충격이었죠. 아직까지 우리음악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빨리 우리 음악을 체계화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아직까지 손도 못대고 있네요."

국립창극단 단장, 전주세계소리축제 위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라는 직함에다가 각종 국내·외 공연을 다녀야 했던 안 명창이 우리 음악을 체계화할 여력이 없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을 것이다.

ⓒ 오마이뉴스 김대홍
길 때는 10시간 가까이 이뤄지는 판소리 완창. 한 마당을 마치고 나면 살이 쏙 빠지는 체력전이다. 지금껏 무대에 올라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뽐내는 그라면 분명 남다른 체력관리 비법이 있을 터.

"매일 산엘 가요. 하기 싫을 때도 있는데, 이를 악물고 하죠. 혼자 운동하는 게 웬만한 의지 갖고는 안되는 건데, 그래도 해야죠. 음식도 신경을 많이 써요. 한창 활동하던 80년대엔 1주일에 한 번씩 보신탕을 먹었어요.

심지어 코브라를 먹은 적도 있다니까요. 81년쯤 김성녀·김동애와 함께 동남아 공연을 간 적이 있는데, 코브라가 목에 좋다는 이야길 들었어요. 내장을 술에 담은 걸 앞에 놓고 세 명이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었어요. 그 때 누군가 '이거 먹으면 소리에 좋다'고 하면서 '쑥' 들이키자, 곧바로 나머지도 먹었어요. 소리에 좋다고 하니 아무 생각 안 난 거죠(웃음)."

"소리에 좋다고 코브라까지 먹었어요"

이제 마무리할 시간이다. 안 명창과 인터뷰는 집, 차 속, 롯데호텔을 오가며 이뤄졌다. 그의 바쁜 일정 탓이었다. 기억에 남는 일을 물었다.

"88년 유럽순회공연할 때인데, 스웨덴이었어요. 밤에 눈이 많이 온 날이었는데,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객석 앞자리에 앉아서 열심히 듣고 있는 거예요. 공연이 끝난 뒤에도 그 사람은 가지 않고 남아있었어요. 제가 물었죠. 알아듣겠냐고. '알아듣겠다'고 하더라구요. 젊은 여자의 슬픔이 느껴지고 이별도 느껴진다고 했어요.

판소리는 '고저청탁(高低淸濁)'이라고 해서 인물과 상황에 따라 목소리가 다 달라요. 그 장애인이 판소리는 몰라도 아마 자연스럽게 그 점을 깨달은 거겠죠. 그래서 느꼈죠. 몰입하면 자연스럽게 느끼는구나라구요."

마지막 질문. 유난히 동안인 탓에 40대까지 춘향 역을 맡은 안 명창이 다시 춘향 역을 맡게 된다면 어떨까.

"인간적으로 했겠죠. 지금 하면 다르게 했을 거예요. 어릴 때는 아름답고 화려하게만 보이려고 애쓴 것 같은데…. 그 때는 그게 좋은 줄 알았으니…."
#안숙선#50년#판소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공연소식, 문화계 동향, 서평, 영화 이야기 등 문화 위주 글 씀.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