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담양의 명옥헌을 돌아보며 배롱나무 한창 피어나는 한여름에 왔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면 여린 녹색의 새순이 돋고, 알록달록 원색의 아름다움을 피워낸다. 그 아름다움에 한껏 취하다 보면 세상은 녹색의 물결로 뒤덮이고 생명의 왕성함만이 남는다. 그렇다보니 7, 8월이면 어김없이 피어나는 배롱나무의 화려한 색감은 봄에 찾아오는 곱디 고운 청순함을 떠나 무더운 여름만큼이나 정열적이다.
배롱나무는 사찰이나 서원, 고택에 주로 많이 볼 수 있다. 세월에서 묻어나는 녹록한 느낌과 어우러져 고고하면서도 정열적인 색감과 자태가 묻어난다. 비록 매난국죽의 사군자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한 계절을 풍미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번 경북남서부여행(달성, 성주, 김천)을 통해 고건축과 어우러진 배롱나무의 향연을 만끽했다. 배롱나무의 뛰어난 색감이 이번 여행의 전부는 아니었지만, 너무 인상이 깊어 서두를 빌어 몇 자 끼적여보았다.
새벽을 달려 경북 달성으로 향했다. 한 번에 내달려 인기척 없는 도동서원 앞에서 잠시 눈을 붙이려 했지만, 연일 이어지는 야근 속에 의지와 욕심만 앞섰나 보다. 감당 안 되는 눈꺼풀에 두손 들고 자동차 소음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들었고, 쨍쨍한 햇볕이 뿜어내는 뜨거운 기운에 신경질적인 아침을 맞았다. 차 속에서의 불편한 숙면은 참 아이러니컬하다. 그러고 보니 갈 길이 참 멀다.
오랜만에 도동서원을 찾았다. 우리나라의 서원 가운데 가장 위엄이 깃든 곳이고, 거대한 은행나무를 수문장으로 거느리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도동서원은 한훤당 김굉필 선생을 배향하고 있는 서원으로 한훤당 김굉필 선생은 조선시대 유학자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사림파의 한 사람으로서 조선시대 역사 가운데 한 켠을 장식하는 '사화'의 희생양이기도 하다. 조선 연산군 때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빌미가 되어 발생한 무오사화로 귀양을 가게 되고, 6년 뒤 발생하는 갑자사화로 결국 사약을 받게 된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쫓겨난 뒤 바로 명예가 회복되어 복권되고, 도동서원은 선조 때에 이르러 사액을 받게 된다.
흥선대원군 때 대대적인 서원철폐로 전국에 47개 서원만 남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속한 당당한 서원이며, 안동의 병산·도산서원, 경주의 옥산서원, 영주의 소수서원과 함께 우리나라 5대 서원 중의 하나다. 그도 그럴 것이 서원 앞에 서면 4단에 걸쳐 쌓은 웅장한 석축과 그 위에 올라앉은 수월루의 위풍당당이 눈에 한껏 들어온다. 수월루는 도동서원의 건물 중 가장 늦게 지어졌다. 1855년에 지어졌다가 화재로 소실된 뒤 1975년에 다시 지어진 건물이다. 수월루 담장을 감싸고 있는 배롱나무의 붉은 물결이 수월루의 시원한 풍경과 함께 한껏 조화를 이룬다.
더불어 수월루 앞에 우뚝 서 있는 은행나무는 어떠한가? 도동서원의 건립을 주도했던 김굉필 선생의 외증손인 한강 정구선생이 서원 건립을 기념하여 심은 은행나무다. 일명 '김굉필나무'는 김굉필 선생의 안타까운 죽음과 죽어서도 남긴 명망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가장 오래된 양평 용문사와 영동 영국사의 은행나무보다 훨씬 역동적인 느낌이 배어난다.
도동서원의 내부로 들어가려면 관리사를 통해 들어가야 한다. 수월루를 지나 환주문을 들어서야 하지만 수월루를 통하는 문은 굳게 잠겨 있기 때문이다. 관리사는 이곳 도동서원을 관리하는 분이 살고 계시는데, 마침 아무도 계시지 않아 머뭇거리다가 나중에 인사드리기로 하고, 쪽문을 밀고 들어갔다. 중정당의 앞, 동재와 서재가 있는 넓지 않은 마당을 통해 환주문을 나섰다. 환주문과 수월루와의 공간은 거의 없다. 환주문의 입구와 수월루의 누각이 바로 바라보일 정도로 수월루에서 환주문을 오르는 길은 가파른 계단이다. 환주문은 나처럼 키 작은 사람도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통과할 수 없을 정도로 작다.
도동서원은 수월루에 이르는 거대한 4단의 석축이나 중정당이 앉아 있는 높은 기단처럼 위엄 어린 모습 속에서도 소박하고 단아한 모습들을 여기저기서 많이 볼 수 있다. 위엄과 소박함이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반된 분위기 속에서도 우리 눈으로는 전혀 인지할 수 없는 조화로움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오랜 세월을 버텨내서 이제는 닳아빠진 느낌이 드는 계단의 부재들 하며, 그 부재들에 새겨진 기이한 문양들, 중정당 앞까지 나있는 아담한 돌길, 사당으로 오르는 길에 고개만 빠끔히 내민 거북이, 중정당 앞의 사나워 보이는 거북머리, 중정당 기단에 새겨진 두 마리의 용과 짐승과 꽃이 조각된 돌들이 바로 그러하다.
기단에 새겨진 용머리와 중정당 앞의 거북이는 언뜻 매서워 보이긴 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재밌는 구석이 많은 친구들이다. 용머리는 놀라서 휘둥그레진 눈에 배시시 웃는 듯하고, 조그맣게 튀어나온 귀도 귀엽고, 사당으로 오르는 계단에 있는 거북이는 주먹만 한 들창코가 눈과 이빨의 날카로움을 어느 정도 무디게 만든다.
날이 참 덥다. 중정당 마루에 걸터앉아 너그러운 휴식을 취하면 좋으련만, 찌는 듯한 더위는 그런 아량을 베풀고 싶은 마음이 없나 보다. 신나게 울어 젖히는 매미들만 신이 났다. 차를 몰아 다람재에 올랐다. 도동서원은 2년 전에 우연치 않게 들른 곳이다. 현풍에 내려 창녕으로 여행가는 길에 우연히 팻말만 보고 찾은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그때 다람재를 넘어서 왔다. 다람재는 이곳의 산등성이가 마치 다람쥐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지명인데 다람재 정상에서 낙동강의 큰 강줄기와 어우러진 도동리와 도동서원의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근래에 정자도 세워놓아서 도동서원에 들렀다가 잠시 들러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달성에는 신라 신덕왕 때 창건한 용연사라는 유서깊은 사찰이 있다. 공단의 넓은 도로를 지나 오르막을 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길은 좁아지고, 매표소를 지나면 차 한 대 간신히 지날 수 있는 길 옆으로 음식점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그 좁은 길을 따라가는 나도 우습지만, 산사 입구에 시립한 듯 모여있는 음식점들의 모습도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함이 있는 것 같다.
용연사 일주문은 마치 버섯돌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일주문의 크기는 크지 않지만, 공포의 화려한 장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나마 두꺼운 기둥이 무거워 보이는 공포부재와 지붕을 떠받치고 있으니 그나마 옹색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석조계단으로 가는 길을 뒤로 하고 극락교를 건너 경내로 들어섰다. 사천왕문을 지나 보광루를 지나면 널찍한 마당에 주불전인 극락전과 함께 몇 개의 전각이 자리한다.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3층석탑 뒤편으로 정면3칸의 맞배지붕을 이고 있는 극락전이 자리잡고 있다. 극락전 내부에는 영조 때 조성된 후불탱화와 삼장탱화가 있었다고 하는데 10여년 전쯤 도난당했다고 한다. 후불탱화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빈궁 조씨가 효장세자의 삼년상을 마치고 시주하여 만든 불화인데, 슬픔을 갈아 만든 불화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난당했다는 사실이 여간 씁쓸한 게 아니다.
통도사의 금강계단, 설악산의 봉정암, 오대산 상원사, 태백산 정암사, 사자산 법흥사는 우리가 흔히 5대 적멸보궁으로 각인되어 있다.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당나라로부터 가져온 부처와 사리와 정골사리를 안치한 5곳을 말한다. 하지만, 이곳 용연사에도 부처님의 사리를 안치한 석조계단과 적멸보궁이 자리잡고 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은 통도사의 사리를 탈취하게 된다. 사명대사가 설득해 반환받게 되는데, 이 사리의 처분을 위해 스승인 서산대사를 찾아가자 한 개의 함은 태백산 보현사에 안치하고, 나머지 하나는 다시 통도사에 안치하고자 했다. 하지만, 다시 정유재란이 발발하고, 사명대사마저 입적하게 되자 제자인 청진이 두 스님의 유지를 받들어 사리 한 과는 통도사로 돌려보내고, 나머지 하나는 용연사에 모시게 되니 바로 이것이 바로 용연사 석조계단이다. 통도사의 금강계단과 같은 계단형 사리탑으로 보물 539호로 지정되어 있다.
부처님의 사리가 안치된 석조계단의 앞에는 적멸보궁이 자리잡고 있다. 진신사리는 부처님과 동일하다. 따라서, 부처가 열반에 들고난 후 불상이 조성될 때까지는 유일무이하며 경건한 숭배대상이었다. 적멸보궁이라는 전각은 부처님과 동일한 진신사리를 예배하는 장소로 마련된 절집의 공간이며, 진신사리가 안치되어있기 때문에 유일하게 불상이 없는 전각이 된다. 진신사리가 있는 방향으로 창이 나있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중기단 위로 석종을 올려놓은 듯한데, 기단에는 각 면에 2구씩 팔부중신을 새겼다. 도드라지게 표현된 팔부중신의 모습은 옷자락과 무기, 구름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불행하게도 석조계단의 사방에는 돌기둥을 세우고 철침을 박아놓았고, 희끄무리한 중국인 닮은 석상을 8구나 세워놓았다. 그 덕에 하늘을 나는 용감무쌍한 팔부중신상을 하나도 볼 수 없었다. 예전에는 사리탑 사방에 사천왕상이 한 구씩 있었다고 하는데 도난의 위험성 때문에 극락전에 갖다 놓았단다. 결국 부처님의 사리는 쇠창살 안에 갇힌 채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중국인 석상의 호위를 받고 있는 셈이다.
적멸보궁에서 내려오는 길 우측에는 이곳을 거쳐간 이름 모를 스님들의 부도가 정연하게 서 있다. 부도가 많이 모여있어 붙여진 부도밭이라는 공간이 있는데 이곳 용연사에는 누구나 다닐 수 있는 길가여서 '밭'이라는 표현이 조금은 무색하다. 그래서인지 경건함보다는 남달리 친근함이 느껴진다. 꺼칠한 부도의 표면을 손가락으로 느끼며 적멸보궁을 내려왔다.
울창한 숲 속에 쩌렁쩌렁 울리는 매미소리가 유난히 명쾌하다. 도시의 소음 속에 찌든 매미의 소리와는 차원이 다르다. 따가운 햇빛을 가려주는 숲 속을 거닐며 듣는 매미소리는 그들도 즐거운 듯하고 나도 즐겁고, 발걸음마저도 즐겁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