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국제질서에서 한민족은 신흥 세계 최강국에게 가급적 최후까지 대항하는 편이었다. 새로운 현실에 대한 신속 적응을 거부하는 이러한 기질 때문에 한민족은 때로는 손해를 보기도 하고 때로는 이익을 보기도 했다.
신흥 챔피언을 최후까지 인정하지 않다가 실패한 대표적 사례로는 고조선-한나라 전쟁과 고구려-당나라 전쟁을 들 수 있다. 이때 한민족 왕조들은 중국 통일왕조의 '팍스 시니카'에 맞서 막판까지 싸우다가 4각 링에서 결국 '장렬한 KO패'를 당하고 말았다.
반면, 새로운 세계제국에 끝까지 맞서다가 결국 성공한 대표적 사례로는 고구려-수나라 전쟁과 고려-몽골 전쟁을 들 수 있다. 4차례의 고구려 침략에 실패한 수나라는 결국 제풀에 겨워 쓰러져버렸고, 40여 년간 강화도에서 고려군과 대치한 몽골은 끝내 점령을 포기하고 화친을 맺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한편, 세계 최강국은 아니지만 신흥 세력의 등장에 맞서 최후까지 싸움을 벌인 또 다른 사례로서 1871년 신미양요를 들 수 있다. 당시 미국은 영국·러시아 같은 세계 양대 최강은 아니었지만 독일·프랑스·이탈리아 등과 함께 2위 그룹을 이루면서 서세동점의 물결에 참여하고 있던 강국이었다.
존슨 행정부에 이어 1869년에 새로이 등장한 미국의 그란트 행정부는 소위 '대(對)아시아 팽창주의' 노선을 추구하면서, 청나라·일본과 달리 아직까지 미국에 시장을 개방하지 않고 있던 조선을 개항시키려고 서둘렀다. 미국의 아시아함대가 1871년 5월 16일 일본 나가사키에서 출정 길에 오른 것은, 함포외교를 통해 동아시아의 마지막 미개방국인 조선을 반드시 개항시키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형식적으로는 대아시아 팽창주의 노선을 내걸었지만, 당시 미국은 동아시아에 전력을 기울일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미국의 국력 자체에도 한계가 있었고, 또 무엇보다도 당시 양대 최강인 영국과 러시아가 태평천국운동(1851~1864년) 이래로 동아시아에서 무력행사를 자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 같은 2위권 국가가 역내에서 대규모 전쟁을 벌이는 것은 영·러의 이익을 해치는 일이었다.
미국정부가 아시아함대의 최고결정권을 무관인 로저스 제독에게 주지 않고 문관인 로우 주청미국공사에게 준 것도, 가급적 확전을 피하고 협상으로 조선을 개항시키려는 의도의 표현이었다. '함포사격으로 위협을 주되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미국의 '어정쩡한' 전략은 결국 신미양요의 실패를 초래하는 한 가지 요인이 되고 말았다. 상대방이 함포사격을 받고도 협상에 응하지 않으면 미국도 그 다음에는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다.
8월 19일 일요일을 이용하여 강화도에 있는 신미양요 격전지들을 돌아보면서, 1871년 당시 조선과 미국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전개된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생각해보았다.
올림픽대로에서 강화·김포 방면으로 가다가 김포시 양촌면 쪽으로 좌회전하여 직진한 뒤에 초지대교를 건너 우회전하면, 강화해협의 해안가를 따라 초지진·덕진진·광성보 등 신미양요 격전지를 차례대로 돌아볼 수 있다. 초지진 매표소에서 2700원짜리 일괄표를 구입하면, 보다 더 저렴한 입장료로 초지진-덕진진-광성보-강화역사관(갑곶돈대)-고려궁지 5곳을 패키지로 관람할 수 있다.
콜로라도호를 비롯하여 5척의 군함과 1230명의 군인들을 거느리고 조선 공략에 나선 미 아시아함대는 출정 3일 만인 1871년 5월 19일 남양만에 도착한 뒤에 작약도(인천과 영종도의 중간)를 기함 정박지로 정하고 일단 강화해협 탐사에 나섰다.
1871년 6월 1일 강화해협 탐사에 나선 모노카시호·팔로스호와 4척의 기정(汽艇)이 초지진·덕진진을 지나 손돌목에 이르렀을 때에 조선 포대로부터 약 15분간 200여 발의 포탄 세례를 받았지만, 미군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고 퇴각했다(손돌목 포격사건). 조선 대포의 화력이 얼마나 '위력적'인가를 보여준 사건이라 할 수 있겠다.
손돌목에서 미군에게 위협을 준 게 있다면, 그것은 조선 대포가 아니라 손돌목의 급물살이었을 것이다. 정묘호란(1627년) 때에 인조 임금이 배를 타고 강화도로 피난 갈 때에 그 배의 노를 저은 사람이 바로 손돌이라는 뱃사공이었다.
물살은 점점 험해지는데 손돌이 태연하게 배를 저어가자, 인조는 '이 자가 나를 죽이려고 일부러 이런 곳으로 가는 게 아닌가?'해서 배 위에서 손돌의 목을 베도록 하였다. 그런데 손돌은 죽기 전에 "제가 띄우는 바가지를 따라가면 강화도에 도착하실 것"이라는 유언을 남겼고, 그 바가지를 따라간 결과 인조 일행은 정말로 무사히 강화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제야 손돌의 충심을 알게 된 인조는 광성보에서 마주보이는 김포 덕포진(대곶면 신안리)에 그의 시신을 묻어주도록 했다. 사람들은 광성보와 덕포진 사이의 물 위에서 손돌의 목이 베였다 하여 이곳을 손돌목이라고 부른다.
무력한 조선 대포 대신 손돌목의 급물살에 더 놀랐을 미군은 일단 후퇴했다. 조선 무기의 위력을 확인한 미군은 아흐레 뒤인 6월 10일부터 대대적인 공세에 나섰다.
첫 공략 대상은 강화해협의 초입인 초지진이었다. 조선군 포수 3천여 명이 배치된 곳이었지만, 미군은 어렵지 않게 초지진을 점령하고, 그날 밤 그곳에서 야영에 들어갔다.
초지진에서 약 2km 떨어져 있는 덕진진도 다음 날 아침부터 시작된 미군의 공격에 쉽사리 점령되고 말았다. 틸톤 대위가 이끄는 미 해병대는 해상에서는 함포사격으로 육상에서는 야포 사격으로 어렵지 않게 덕진진을 공략했다. 무혈입성이나 마찬가지였다.
덕진진을 점령한 미군은 그곳의 덕진돈대에 성조기를 게양했다. 미국이 외국 땅에 성조기를 꽂은 것은 남북전쟁 이래 최초의 일이었다.
신미양요는 흔히 조선이 미국에 승리한 전쟁이라고 평가되고 있지만, 초지진 전투와 덕진진 전투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처음 두 전투에서 미군은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조선군을 제압할 수 있었다. 세 번째 전투인 광성보 전투는 앞의 두 전투와는 달리 치열하긴 했지만, 그 역시 미군의 일방적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광성보에는 강화도 전군의 지휘자인 강화진무중군 어재연 장군의 주찰소(사령부)가 있었고 호랑이 포수가 2천 내지 3천 명 정도 주둔하고 있었다. 6월 11일 오전 11시부터 진행된 미군의 집중 포격에 이어 치열한 육박전이 전개되었다. 이 전투에서 어재연 장군을 포함한 350명의 조선군이 전사했다. 미군 전사자는 단 3명에 불과했다. 역시 미군의 승리로 끝나고 만 것이다.
광성보를 점령한 미군은 손돌목 돈대 위에서 조선군의 수자기(帥字旗)를 끌어내리고 그곳에 성조기를 게양하고는 일제히 승리의 함성을 울렸다.
6월 11일 밤 이곳에서 야영을 한 뒤에 12일 오전 광성보에서 철수한 미군은 작약도 기지로 돌아갔다. 로저스 제독은 전승축하훈령을 발표하여 승리를 자축했다.
위와 같이 미군은 신미양요의 세 전투에서 모두 승리했다. 조선군은 단 한 차례도 전투에서 이기지 못했다.
그러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미군이지만,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미국이 아니었다. 조선이 전투에서는 패배했지만 전쟁에서는 승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역사 교과서에서는 신미양요가 조선의 승리였다고 기술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 미국이 전투에서 승리하고도 전쟁에서는 패배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미국이 당초 얻고자 했던 목표를 끝내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 해병대 틸톤 대위가 말한 바와 같이 "조약 체결을 위한 미국의 조선 원정은 아무런 성과도 없이 무위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미국은 한성에 가까운 연해에서 함포사격으로 위협을 가하면 조선정부가 금방이라도 항복을 해올 줄로 믿었다. 무력위협을 통해 1844년에 청나라를 개방시키고 1854년에 일본을 개방시킨 적이 있기에, 미국은 그 정도의 위협만 가하면 조선이라는 나라를 식은 죽 먹기로 개항시킬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세 차례의 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뒤에도 조선정부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청나라나 일본 같으면 항복을 해왔을 텐데, 흥선대원군이 이끄는 조선정부는 항복은커녕 도리어 대외강경책만 강화할 뿐이었다. 전투에서 패배한 조선은 백기를 든 게 아니라 척화비만 들었을 뿐이다. 미국의 당초 전략은 그렇게 해서 빗나가고 말았다.
결국 미국은 조선 개방이라는 당초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철수했고, 그처럼 전쟁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돌아갔기 때문에 미국이 패전했다고 하는 것이다. 미군이 6월 12일 오전에 철수하였기 때문에 강화해협에 걸린 성조기도 금방 뽑혀지고 말았을 것이다.
미국이 조선과 국교를 체결한 것은 그로부터 11년 뒤인 1882년의 일이었다. 이 해에 미국·영국·독일 등은 청나라의 중재에 힘입어 함포사격이 아닌 평화적 방법으로 조선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군사적 방법이 아닌 외교적 방법을 채택하고 나서야 비로소 미국은 조선의 문을 열 수 있었던 것이다.
서두에서 언급한 고조선·고구려·고려시대 대외전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19세기말의 조선 역시 신흥 강국에 맞서 끝까지 대항하는 모습을 보였다. 고조선·고구려·고려처럼 당대 최강국을 상대로 한 대결은 아니었지만, 조선은 미국이라는 2위권 서양 강국의 지위를 쉽게 인정하지 않고 최후까지 버티다가 결국 미국을 돌려보내는 데에 성공하였다.
물론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면, 미국이 대규모 군대를 조선에 파견하여 한성을 점령하고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국·러시아라는 양대 최강이 주시하고 있는데다가 청나라·일본이라는 이해관계국이 대치하고 있는 복잡한 구도 하에서 미국이 조선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이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미국으로서는 그 뒷감당을 할 만한 국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함포사격으로 위협을 가하고 군사력으로 조선을 제압해보았지만, 조선은 미국의 기대대로 끝내 항복을 하지 않았다. 위협을 가해도 항복을 하지 않으니 미국은 그냥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남북전쟁 이래 처음으로 외국 땅에 성조기를 꽂았다면서 기분이 '업'되었지만, 그런 기분도 잠시뿐이었다. 성조기는 강화 땅에서 곧 내려지고 말았다.
위와 같이 한민족 국가들은 신흥 세계최강 혹은 강국을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대항하다가 때로는 이익도 보고 때로는 손실도 보았다. 이는 중국과 일본의 역사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특이한 측면이다. 땅도 좁고 인구도 상대적으로 적고 생산물도 얼마 되지 않는 한민족 영토에서 이 같은 저항력이 나온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민족이 신흥 세계최강에게 끝까지 굴복하지 않을 수 있었던 데에는 여러 가지 국제정치적 혹은 지정학적 요인이 있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요인은 '나의 운명을 남의 손에 맡기지 않는다'는 한민족 특유의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남이 험악한 인상을 지으면서 "문 열라!"고 하면 목숨 걸고 대항하고, 남이 온화한 인상을 지으면서 다가오면 기꺼이 받아주는 특유의 '손님' 대접법이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민족의 경우에는 신흥 세계최강이 무력으로 위협을 가하면 대개의 경우 꼬리를 내리고 새로운 세계질서에 신속히 순응했지만, 한민족만큼은 끝까지 저항하다가 때로는 승리를 얻기도 하고 또 때로는 멸망을 당하기도 했다.
새로운 국제질서를 빨리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민족의 기질은 어찌 보면 국제사회에서 낙오되는 지름길일 수도 있다. 중국이나 일본처럼 세계 최강 앞에서는 일단 머리를 숙이는 민족들이 더 많은 부와 영예를 누릴 수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굶을 때 굶더라도 또 죽을 때 죽더라도 일단 자존심만큼은 지킨다는 한민족의 특유한 기질을 반드시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기질이 아니었다면, 한민족이 이 좁고 척박한 한반도에서 수천 년간 정체성을 지키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조상들은 그렇게 살았는데 오늘날의 한민족은 어떠한가? 구한말 시대의 조상들더러 무능하다고 욕하지만, 신미양요의 사례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구한말의 한민족은 비록 군사력은 약했어도 자존심만큼은 끝까지 지키려 했다. 그리고 강화도에 꽂힌 성조기도 며칠이 안 되어 금방 끌어내렸다.
그런데 1945년 9월 이래 한반도 남쪽에 꽂힌 성조기는 6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왜 뽑히지 않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무능하다고 욕하는 19세기말의 조상들도 성조기를 단 며칠 새에 뽑아버렸는데, 오늘날의 한민족은 60년 넘게 성조기를 방치하고 있으면서도 19세기말의 조상들을 무능하다고 비판할 수 있을까?
일제 36년의 두 배에 가까운 60년이 넘도록 한반도 남부에서 여전히 휘날리고 있는 저 성조기를 보면서, 신미양요 때의 그 배짱은 다 어디로 갔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화를 일백 번 고쳐 한다 해도, '나의 운명은 나 스스로 결정한다'는 한민족의 강한 기질만큼은 백골이 진토이 되도록 지키고 또 지킬 만한 가치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