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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도 사람이다> 책표지
<기생도 사람이다> 책표지 ⓒ 문학동네
기생 하면 떠오르는 게 뭐가 있을까. 남성들에게는 '말하는 꽃'으로, 여성들에게는 내 남편을 홀릴 수도 있는 '여우'로 인식되기도 했다. 글줄이나 읽은 남성들과 어울려 즉석에서 시를 지어 주고받을 정도로 수준 높은 여성으로 이해되기도 하지만, 뭇 남성들에게 몸을 파는 매춘 여성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기생이나 창녀의 어원에서 엿볼 수 있는 공통점은 모두 기예를 익히고 있다는 점이다. 기(妓)와 창(娼)은 모두 음악, 예술 등의 기예와 연관되어 있다. 기예를 몸에 익힌 여성들이란 뜻이다. 기생들의 대부분이 궁이나 관청에 소속된 관기들이었기 때문에 국가와 관청의 공식적 행사에 연예를 담당하던 여성들이었다. 즉 기생의 주된 일은 궁이나 관청의 예악이었다. 궁이나 관청에 소속된 관노비의 신분에 있다보니 예악이라는 본업과는 상관없이 수청을 들어야하는 상황도 많았다.

정병설은 <나는 기생이다>란 책을 통해 기생들의 눈과 입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말하는 꽃'도 아니고 '여우'도 아닌 슬플 때 울고 기쁠 때 웃는 사람임을 기생 자신들의 목소리로 들려준다. 또한 기생들의 진심어린 목소리를 <소수록>을 비롯한 옛 문헌에 남아 전하는 기생들의 작품 분석을 통해 들려주고 있다.

이내 행사 생각하니 호부호모 겨우 하니
산과 물 가르치고 저적저적 걸음할 때 초무 검무 고이하다
명선으로 이름하여 칠팔 세에 기생되니 이르기도 이르구나
명월 같은 이내 얼굴 선연하여 명선인가
명만천하 큰 이름이 선종신할 명월인가
사또에게 수청들랴 부인행차 시종하랴
이십이 늦잖거든 십이 세에 성인하니
어디 당한 예절인지 짐승과 일반이라
남녀의 결혼에는 집안 지체 중요한데
순사또 가마 타고 서울로 돌아가니
운명의 정함인가 월하노인 지시런가
갑자기 부귀하면 상서롭지 않다더니 무슨 복이 이러하리
이는 모두 기생으로 세상 나온 내 자신의 잘못이라. (23쪽)


해주 기생 명선이 쓴 글이다. 아버지, 어머니를 겨우 부를 정도라니 첩의 소생일 가능성이 있다. 칠팔 세에 기생 되어 초무와 검무를 추고, 사또 수청도 들고 부인 시종노릇도 한다. 열둘의 나이에 처음 남자와 성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그 경험이 짐승의 짓이라 여길 만큼 치욕으로 여기고 있다. 수청을 들던 사또가 결혼을 약속했지만 가마 타고 서울로 떠나버렸다. 박복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나 기생으로 세상에 나온 탓이라 체념한다.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 베어내어 어른님 오신 밤에 구비 구비 펴리라'던 황진이의 글과는 사뭇 다른 내용이다. 기생의 내면적 감정을 직설적이고 솔직하게 묘사했다. 추상적이고 모호한 남녀간의 사랑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부딪치는 기생들의 일상을 생생하게 나타낸 것이다. '말하는 꽃'이나 '여우'로 박제된 모습이 아니라 열둘의 나이에 당한 치욕스런 경험과 잠시 동안 정을 준 사또가 떠나가 버린 뒤의 회한을 꾸밈없이 드러내고 있다.

기생이기 이전에 여성으로서 그들의 꿈은 무엇일까. 밥상 들고 지아비 섬기는 떳떳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기생이기 때문에 그 꿈은 현실 속에서 실현되기 쉽지 않다. 비록 사랑하고 사랑받을 남성이 있다하더라도 안주인이 아닌, 첩이 될 수밖에 없다.

첩으로 살아가는 게 쉬울 리 없다. 남편을 제외한 모든 가족들은 첩을 백안시한다. 남편의 모든 잘못이 첩 때문에 비롯된 것으로 트집을 잡는다. 남편이 밥 트집, 옷 트집을 하면 첩 때문에 사람 변했다 타박이고, 남편이 병들어도 첩 때문이라 욕을 한다. 첩은 한 가정 내의 모든 악의 근원처럼 트집을 잡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생들은 첩이 되는 게 꿈이었다. 부임한 사또의 몸으로 유배지의 양반의 몸으로 기생을 만나 장래를 약속한 이들이 고을을 떠날 무렵 일방적으로 약속을 파기하고 떠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첩이 되지 못하는 기생의 장래는 암담하다. 혼자 늙어가는 기생에게 남는 건 하나밖에 없다. 얼굴과 몸을 사업 수단으로 삼았던 기생이 나이가 든다는 것은 생계 해결이 어려울 정도가 된다는 것이다. 첩이 못된 기생이 잃는 것은 재산과 몸과 명성이요, 남아 있는 건 말 재주뿐이다. 남은 재주와 경험을 바탕으로 색주가나 주막을 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세간까지 팔아 생계유지에 급급하며 죽을 날을 기다리는 신세가 된다.

많지는 않지만 기생들은 자신들의 삶과 눈물과 애환을 글로 남겨 놓았다. 정병설은 기생들이 남긴 글을 통해 기생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독자들에게 전해준다. 기생들은 자신들의 글을 통해 외치고 있다. 기생도 사람이라고.

나는 기생이다 - '소수록'읽기

정병설 지음, 문학동네(2007)


#나는 기생이다#정병설#기생#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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