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추리소설의 황금기'를 장식했던 수많은 추리작가들이 있다. 이 작가들 중에서 가장 독특한 작풍(作風)을 가졌던 작가는 누구일까?
취향의 차이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존 딕슨 카아'를 꼽는다. 카아의 특별한 점은 그가 집착해왔던 두 가지 소재인 '밀실'과 '괴기'로 집약할 수 있다.
워낙 다작형의 작가였던 카아는 평생 60편이 넘는 장편추리소설을 발표했다. 그리고 그중에서 상당부분이 밀실 또는 괴기와 연관되어 있다.
이렇게 많은 추리작품을 발표한 작가인 만큼, 카아가 만들어낸 탐정도 여러 명이다. 기드온 펠 박사를 포함해서 헨리 메리벨 경, 헨리 뱅코랑 등이 가장 대표적인 탐정들이다. 그중에서도 국내의 추리팬들에게 가장 익숙한 인물은 아무래도 기드온 펠 박사일 것이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카아의 작품들 중에서 기드온 펠 박사가 등장하는 작품들이 유독 많이 국내에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된 카아의 작품은 모두 10편이다. 절판된 작품과 해적판을 포함한 숫자다. 그중에서 5편에 기드온 펠 박사가 등장한다. 정확하게 절반이다.
밀실과 괴기의 취향을 가진 작가 존 딕슨 카아
하지만 카아의 전체작품 중에서 기드온 펠 박사가 등장하는 작품수를 꼽아본다면 이 비율은 확 내려간다. 카아는 60편이 넘는 추리소설을 발표했다. 그 중에서 기드온 펠 박사가 등장하는 작품은 23편이다. 헨리 메리벨 경이 등장하는 작품이 22편, 헨리 뱅코랑은 5편, 나머지 작품들에서는 다른 인물들이 탐정으로 등장한다.
기드온 펠 박사는 <마녀가 사는 집>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다. 이 작품을 시작으로 해서 <모자수집광 사건> <세개의 관> <죽은 자가 깨어난다> <연속살인사건> 등의 작품에 연달아 등장한다. 거대한 체격을 가진 인물이지만 실제로 펠 박사의 키가 얼마인지, 몸무게가 얼마인지는 모른다.
다만 작품 속에서 작가가 묘사한 문장을 통해서 대략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이에 의하면 펠 박사의 덩치는 꽤나 압도적이다. 계단을 가득 메울 만큼 큰 덩치, 식탁을 가로막을 만큼 커다란 몸을 소유한 인물이다. 펠 박사가 입고 있는 실내복은 마치 텐트처럼 보이고, 펠 박사가 지평선에 서면 흡사 낙하산처럼 보일 정도가 된다.
얼굴도 마찬가지로 살이 쪘고 머리는 벗겨졌다. 콧수염은 마치 산적처럼 보일 때도 있다. 게다가 언제나 지팡이를 가지고 다닌다. 이 모든 것이 합쳐진 펠 박사의 첫 인상은 '산타클로스' 혹은 전설속의 명랑한 왕인 '콜 노왕'을 생각나게 만든다. 탐정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날카롭고 강인하면서 날렵할 것 같은 외모와는 정반대되는 인물이 바로 펠 박사다.
이런 인상처럼 목소리도 엄청나다. 술 그중에서도 맥주를 좋아하는 펠 박사는 틈만 나면 맥주를 마시며 큰소리로 떠들어댄다. 그때의 펠 박사는 마주보고 앉아만 있더라도 기분이 좋아지는 인물이다. 몇 시간 동안 함께 술을 마시더라도 지루하지 않은 인물, <모자수집광 사건>의 표현에 의하면 '거룩하도록 화려한' 인물이 바로 기드온 펠 박사다.
커다란 덩치에 맥주를 좋아하는 기드온 펠 박사
펠 박사의 왕국은 영국의 시골에 있는 집이다. 삼면을 책으로 가득 메운 서재, 펠 박사는 그곳에서 파이프 담배를 피우거나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정원을 산책한다. 아니면 잔디밭의 한가운데에서 오후의 햇빛을 온몸에 받으며 낮잠을 잔다. 이도저도 아니면 동네의 선술집에서 맥주를 한바탕 마시고 있을지도 모른다.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 그가 무엇을 전공해서 어떤 학위를 받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모자수집광 사건>에서 그는 '영국에서 고대로부터 내려온 음주습관'이라는 제목의 책을 쓸 계획으로 7년째 자료를 수집하던 중이었다.
물론 펠 박사가 무엇을 전공했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는 영국내에서 탐정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그중에서도 도저히 있을 법 하지 않은 사건, 소위 '불가능범죄'에 도전해서 사건을 해결하는 대가가 바로 기드온 펠 박사다.
'불가능범죄'라는 것은 여러 가지 형태가 있을 수 있다. 존 딕슨 카아의 작품에서는 이것을 밀실과 괴기로 한정해보자. 추리소설에서 기본적으로 범인은 탐정을 속이기 위해서 노력한다. 범인이 탐정을 속이려는 트릭이 극단적으로 나아갈수록, 그것은 불가능범죄에 가까워진다.
현장을 침입할 수 없는 밀실로 만들거나, 전해져오는 전설과 저주에 의한 죽음인 것처럼 꾸며두거나, 완벽한 알리바이를 위장하거나 하는 등의 트릭이 바로 이런 것들이다. 살인처럼 보이는 자살도 있을 수 있고, 자살로 착각할 만한 살인도 있다. 이런 트릭은 간파하기도 어렵거니와 만들기도 어렵다. 카아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범인과 탐정 모두 이 방면에 있어서 일급의 두뇌와 대담함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기드온 펠 박사는 왜 밀실을 좋아했을까
기드온 펠 박사는 그 중심에 서서 수많은 트릭을 파헤치는 인물이다. <죽은 자가 깨어난다>에서 펠 박사는 스스로 고백한다. 자신에게는 괴이한 사건이나 불합리한 사건을 좋아한다는 약점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세개의 관>에서는 온갖 추리작품과 탐정들을 인용하면서 밀실에 대한 강의를 늘어놓는다. <마녀가 사는 집>에서는 무서운 전설과 저주로 둘러싸인 사건을 해결한다. <연속살인사건>에서는 밀실에서 목을 매달고 죽어있는, 자살처럼 보이는 현장의 트릭을 간파해낸다.
이외에도 존 딕슨 카아는 작품 속에서 여러 가지로 괴기와 트릭, 전설을 뒤섞는다. 헨리 메리벨 경이 등장하는 <흑사장 살인사건>, 헨리 뱅코랑의 <밤에 걷다> <해골성>, 수수께끼의 인물 고던 크로스가 등장하는 <화형법정> 모두 그런 작품들이다. 그렇게 본다면 순수하게 트릭으로만 승부했던 <황제의 코담배케이스>가 오히려 의외인 작품이 될지 모른다.
존 딕슨 카아가 만든 여러 명의 탐정들 중에서, 개인적으로는 기드온 펠 박사에게 가장 호감이 간다. 그가 가지고 있는 유쾌하고 우렁찬 말투, 맥주를 좋아하는 취향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모자수집광 사건> <연속살인사건>에서 보여주었던 범인에 대한 관대한 태도도 그렇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집착했던 불합리한 사건들의 매력이 가장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죽은 자가 깨어난다>에서 펠 박사는 범죄수사에 관해서 일장연설을 늘어놓는다. 어느 살인사건이나 중요한 점은 '누가, 어떻게, 왜'라는 측면이다. 이중에서 펠 박사는 가장 해명하기 어려운 것이 '왜'라는 부분이라고 한다. 범인은 왜 밀실을 만들었을까? 범인은 왜 마취제를 선택했을까? 범인은 왜 흉기를 버리고 갔을까? 범인은 왜 반지를 남겨두었을까? 펠 박사는 이런 부분에 대한 답을 알 수 있다면 진상을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왜'라는 질문을 펠 박사에게 던져보면 어떨까. 기드온 펠 박사는 왜 하필이면 기이하고 불가능한 사건들에 유독 관심을 가졌을까. <세개의 관>에서 펠 박사는 '있을 수 없는 일에 대한 취향'을 말한다. 펠 박사가 취급했던 사건들이야말로 있을 수 없는 기이한 사건들이었다. 기이한 사건을 논리적으로 풀어나가는 과정, 펠 박사는 거기에 매료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추리소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커다란 매력이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 [불멸의 탐정들]이라는 소제목으로, 고전추리소설의 영웅인 탐정에 관한 글을 시리즈로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