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 여권 후보 21명. 꽤 당혹스러운 숫자다. 이 시점에서 유독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다.
지난 6월 12일 국회 기자회견장. 안경을 쓴 김근태 전 의장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리고는 갑작스럽게 대선 불출마와 탈당의사를 표명했다. 대선 잠룡 중 하나로 분류되던 그의 갑작스런 불출마선언은 지지자들뿐만 아니라 동료 정치인들에게 까지도 일종의 충격이었다.
불출마의 변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위기의식이다. 이대로 가다간 범여권의 다음 대선 승리가 불투명하다는 위기의식을 느낀 것이다. 분열된 여권으로는 한나라당을 결코 이길 수 없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통합에 불을 붙이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두 번째는 실정에 대한 책임이다. 이미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바닥을 치는 시점에서 정부에서 장관을 지내고, 당에서 의장을 지낸 사람으로서 책임을 지겠다는 의미다. 그는 ‘십자가를 지겠다’는 표현까지 써 가며 국민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는 고건, 정운찬 등의 흥행성 있는 범여권 후보들이 줄줄이 대선출마 포기를 하는 데 대해 범여권의 전반적인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국민들의 신망을 잃은 상태에서 이렇게 지지부진하게 가다가는 한나라당에게 쉽게 정권을 넘겨줄 것이라는 절박감도 있었을 것이다. 혹은 본인의 낮은 지지율에 대한 확신이 없었을 수도 있다.
이유야 어쨌든 그의 결단은 신선했다. 범여권 대선주자들에게는 물론이고, 동료 정치인들이나 언론전반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모 일간지에서는 그를 책임을 질 줄 아는 '향기 나는 정치인'이라고 치켜세웠다.
그렇게 그는 자신을 버려가면서 까지 잔잔한 범여권 경선 구도에 돌을 던졌다. 흥행판을 키우려고 했다. 결국 그는 대통합 연석회의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해졌다.
당시 김근태 의장이 대선불출마를 선언하면서 거론한 대선 예비 후보는 한명숙, 정동영, 천정배, 김혁규, 이해찬, 손학규, 문국현 이렇게 7명이었다. 이들 모두 현재 출마의사를 밝힌 상태다. 그러나 민주당을 포함해 범여권 예비 주자 전부를 합친 숫자는 21이다. 믿기 힘든 숫자다. 학급 반장선거도 이렇지는 않다.
이런 상태에서 국민들은 범여권 경선 자체를 난장판으로 볼 가능성이 크다. 컷오프(cut-off)라는 것 자체도 소모전으로 비칠 수 있다. 반대급부로 이명박 대세론은 힘을 얻어가고 있는 상태다.
현재 한나라당은 후보를 확정하고, 이미 강도 높은 1차 검증까지 마친 상태다. 공약도 보완하기 시작했고, 조직도 대선체제로 구성하고 있다. 그야말로 실전준비태세에 돌입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범여권 주자들은 서로 자기가 적임자라며 준비한 자갈을 잔잔한 호수에 마구 던지고 있는 형국이다. 본인들도 어지럽고, 국민들도 물론 마찬가지다. 이는 지지율로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예비주자 중 아무도 마의 10%대를 넘지 못하고 있다.
한나라당에서 이탈한 사람, 참여정부의 정체성과 거의 일치하는 사람, 열린 우리당의 실패의 정 중앙에 있던 사람, 혹은 참여정부 기간 내내 보이지도 않다가 갑자기 나타난 사람, 심지어 지지율이 거의 없는데도 대선후보가 되겠다는 사람. 범여권은 그야말로 춘추 전국 시대다. 어느 누구 하나 정통성이나 책임 측면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그러나 누구도 자신의 문제에 대해 자신 있게 사과를 하거나, 뒤로 물러나는 책임감을 보이고 있지 않다. 정책과 공약은 난무하고 판을 조율하는 중심축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선택은 하나다. 최대한 빨리 압축적으로 연대하는 것이다. 참신하고, 능력 있고, 도덕성 있는 사람 위주로 모이는 것이다. 전략적 사고가 필요한 것이다. 주변정리가 빨라야 통합논의가 급물살을 탈 수 있다.
한나라당과 비교할 때 범여권 혹은 제3지대의 후보는 국민들에게 공정하게 평가 받을 시간조차 충분하지 않다. 21명의 주자들은 김근태 전 의장의 불출마 선언을 한번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빠른 통합이 공정한 경선 구도를 형성할 것이고, 그것이 본인들이나 나라를 위해 좋은 일이다. 이제 3개월여 밖에 남지 않았다. 시간이 결코 많은 게 아니다.
현애살수장부아(縣崖撒手丈夫兒). 벼랑에 매달렸을 때는 손을 놓을 줄 알아야 장부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지난 2006년 5·31 지방선거 패배 후 당시 열린우리당 의장이었던 정동영 예비후보는 김구 선생의 이 말을 인용했다. 그렇게 따지자면 현재 범여권에서는 진정한 장부는 없는 것 같다. 혹은 자신들이 벼랑에 매달려있는 것을 모르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