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4일은 한중수교 15주년이었다. 공식 행사가 줄을 잇고, 다양한 이야기들이 쏟아진다. 기자는 1999년 9월 중국으로 건너와 공부를 시작했고 지금도 중국을 근거지로 사업을 하고 있다. <오마이뉴스>를 비롯해 다양한 매체에 글을 썼고, 많은 방송 프로그램의 현지 진행을 코디네이션하기도 했다. 8년 동안 많은 일을 겪었지만, 올림픽이 열리는 내년을 기점으로 한중관계를 비롯해 많은 것이 변화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지금까지의 변화를 바탕으로 한중수교 15주년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변화를 예감해 본다. 우선 기업과 민간을, 다음에는 정치와 외교를 살펴본다. <기자 주>
"투자금이 700만불 수준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레미콘 분야 굴지의 기업이라 중국 쪽에서도 긍정적으로 볼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달랐다. 중심부도 아닌 외곽의 한 구(區)를 소개받았는데, 그 쪽에서는 먼지를 이유로 중심부에서 40~50분 거리의 한적한 농촌을 소개해줬다. 레미콘은 공장과 소비지의 이동시간이 10분을 넘으면 치명적이다. 투자 대비 수익이 뻔해서 진출을 포기했다."(2002년 12월 중국 진출 중견기업 간부)
"톈진에서 어려워서 산둥반도로 공장을 옮겼다. 이 곳에서도 매일매일을 견디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내년부터 노동법이 발효될 경우 어떻게 견딜 지 상상할 수 없다. 올림픽의 팡파르가 우리에게는 철수 신호로밖에 들리지 않는다."(2007년 6월 중소기업 관리자)
기자는 1992년 수교 당시 분위기를 잘 알지 못하지만, 얼떨결에 수교가 되었고 중국의 이점을 활용하기 위해 많은 기업이 들어왔다고 들었다. 기자가 중국에 들어온 것은 수교 후 7년이 지난 1999년 9월이다. IMF 관리 체제를 맞은 지 2년 후로,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고 그래도 몸을 추스를 정도가 된 시점이다.
불모지 개척했던 1세대, IMF 바람에 와르르
명확하게 나뉘는 건 아니지만 중국에 들어온 사람들은 대체로 몇 개의 변곡점을 통해 구분된다.
1세대는 수교를 전후해 들어온 사람들이다. 초반기에는 제조업 중심으로 중국의 값싼 인건비 등을 활용하려는 사업가들이 중심이었다. 거기에 무역업자들도 끼어 있었다. 불모지에 가까웠음에도 중국의 미래를 보고 공부하러 온 이들 가운데 정착한 인구도 있는데, 이들 모두 1세대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베이징·톈진·상하이·광저우와 함께, 말이 통한다는 이유로 선양·옌지 등 동북3성에도 많이 들어갔다.
초기 진출자들은 정서가 다른 중국적 특성과 인프라 부족으로 많은 곤란을 겪었지만 단순 가공업 중심으로 성공한 사례들도 나타났다.
그러던 이들에게 거대한 위기가 닥쳐왔다. IMF 관리 체제다. 달러로 결제받을 수 있는 나라로 간 소수의 기업에게는 오히려 기회가 됐지만 중국을 임가공 공장으로 간주, 한국으로 물건을 내보내던 대부분의 기업은 철저하게 무너졌다.
"공단에 있던 대부분의 기업이 도산했다. 외상투자 기업이던 우리 회사는 한국에서 회사차로 3대 정도를 들여왔는데, 그것을 팔아서 연명했다. 그 때만 해도 중국의 자동차 값은 굉장히 비싸서 차 한 대로 2~3달은 버틸 수 있었다.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2000년 톈진의 한 중소기업 사장)
"초반에 중국인 노동자들은 회사 물건과 자기 물건을 구별하지 않았다. 작업이 끝나고 공장을 점검하면 망치나 드라이버 같은 공구부터 완제품까지 오만가지 물건이 사라졌다. 거기에다 중국 사람들의 경우 공적인 자리에서 모욕을 주면 안 된다. 각개전투식으로 교육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그들을 가르쳐서 공장이 좀 굴러갈 무렵 IMF가 터졌다. 한국에서 물건을 사갈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자금력도 풍부하지 못해서 그냥 넘어졌고, 그 후 여러 공장을 전전하다가 지금은 간단한 무역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2007년 베이징의 한 교민)
IMF는 중국에서 사업하던 한국인 기업가들에게 치명적이었다. 영세한 규모의 중소기업주나 자영업자들은 대부분 모든 것을 잃어야 했다. 이후의 생활은 '근근하게 살아간다'는 단어로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1세대의 몰락이라고 볼 수 있다.
IMF에 가장 의연했던 동아시아 국가는 중국이었다. 약간 주춤하긴 했지만 중국은 안정을 유지했고, IMF의 바람을 타지 않았다.
"대한민국을 탈출하라! 중국으로 가자"
IMF 후폭풍이 있던 2000년까지는 조금 잠잠했지만, 그 후 중국으로 가는 한국인은 급증했다. IMF 이후부터 2002년까지 중국으로 건너온 이들을 통상 2세대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이들의 이주는 대한민국을 탈출해 중국을 이용해서 기회를 찾아보려는 엑소더스적 성격이 강했다.
이들 중엔 중국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경우도 많았다. 올해 37살의 김아무개씨도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다. 1998년에 중국으로 유학을 왔고, 2003년에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중국 공부보다는 노는 공부에 치중했다.
집에서 사업자금을 지원받은 김씨는 베이징의 코리아타운인 왕징 인근에 5억여원을 투자해 '레스토카페'를 차렸다. 처음에 땅 문제로 실랑이하다가 어렵사리 문을 열었지만, 한국인은 물론이고 중국인도 외면했다. 밖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실내구조가 문제라고 파악해 반 년 만에 인테리어를 다시 했지만 파산을 막지 못했다.
2002년은 한국에서 월드컵이 열린 해다. 이 시점을 전후해 중국에 들어온 사람들은 중국에 대해 공부하고 들어온 세대다. 미리 들어와서 사업 준비기간도 두고, 부족하지만 중국어도 익혀 신중하게 투자한 이들이 많다. 3세대라고 부를 만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주로 한국인 집중 거주 지역으로 들어왔다. 그래서 베이징의 왕징, 톈진의 안산시다오나 메이짱, 선양의 시타, 상하이의 홍메이루 등 코리아타운은 급속히 팽창했다. 사실 이들이 준비해서 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것은 중국이라는 지역이 낯설어서이기도 했지만 어지간한 돈으로 사업을 시작해서는 초라한 행색을 벗어나기 어려운 중국적인 특색 때문이기도 하다.
39살의 이아무개씨는 왕징의 한국인 집중지역에서 삼겹살 전문점을 한다. 중국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사업을 시작하는 게 어려워 한 컨설팅업체가 팀을 꾸려 운영하는 단지에 들어갔다. 가게 문을 연 후 공안과의 마찰로 며칠 동안 영업을 중지해야 했던 시기도 있었지만, 겹치지 않도록 메뉴를 조정한 덕분에 단지에 사람들이 오기 시작했고 나름대로 잘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특히 온라인 커뮤니티에 문제를 지적하는 네티즌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등 고객 관리에도 신경을 쓰자 추천글이 올라오고 자연스럽게 단골 고객층도 생기기 시작했다.
장사가 잘 되어서 확장한 이들도 있지만, 이씨는 그 자리를 지키면서 중국을 더 자세히 알아가고 있다. 이와 달리 비슷하게 시작해 성업하자 점포를 넓힌 옆 가게 사장은 사업을 확장한 후 잠을 못 이룰 만큼 곤란을 겪고 있다.
강해진 중국, 한국은 어떻게 버텨야 하나
올림픽이 있는 2008년을 기점으로 베이징은 물론 중국 전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의 영역이 축소될 것은 불문가지다. 이제 충분히 힘을 비축한 중국은 한국 등 주변 국가의 힘을 빌리기보다는 자체적으로 힘을 쌓아가려는 모습이 역력하다.
그동안 보장됐던 다양한 세제 혜택이 지속될 것으로 믿는 한국 기업도 이제는 거의 없다. 값싼 임금과 노동의 유연성도 이제 예전 같지 않다. 노동자의 임금은 여전히 낮지만, 4대 보험 등에서 외국 기업에는 엄격해지고 자국 기업에는 유연해지는 정책 때문에 더 이상 중국 기업과의 가격 경쟁에서 버텨낼 힘이 없기 때문이다.
"4년 전, 얼마 남지 않은 공장의 수명을 연장해보려는 생각으로 중국으로 공장을 옮겼다. 납품할 한국 기업들이 있어서 초반기에는 꾸려갈 자신이 있었지만, 이제 한국 대기업에도 가격경쟁에서 떨어지는 우리나라 기업 제품을 사줄 여유가 없다. 베트남이나 인도 등을 생각해보지만, 자본도 없고 언어 장벽을 생각하면 (그 지역으로 다시 공장을 이전하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이제 접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톈진 중소기업 사장)
이는 이 한 사람만의 일이 아니다. 포털사이트 다음의 카페인 중국여행동호회(http://cafe.daum.net/chinacommunity)의 한 게시판에 한 공장 책임자가 경험담을 올려서 적지 않은 공감을 얻고 있다.
톈진에서 공장 관리자로 일하고 있다는, 아이디가 '메네시아'인 이 네티즌은 공장을 운영하면서 겪은 공안이나 텃세를 부리는 지역 깡패들과의 문제 등을 글로 올렸다. 이 글에는 납치는 물론이고 협박까지 당하면서 사업을 해야 하는 중국 내 한국인 사업가들의 고통이 담겨 있다.
모래알 같은 교민 사회
기자는 한중수교 10주년인 2002년 7월 '중국 속 한국이 무너지고 있다'(부제 '재중 한인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위험천만한 백태', <월간중앙>)라는 기사를 썼다가 주변에서 따가운 질책을 받았다. 이미 적정 거리를 확보한 조선족 동포와의 관계와 달리, 한국인이 한국인을 속이는 현상이 팽배하고 있다는 내용을 중심으로 한 기사였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현재 중국에서 장기체류하고 있는 인구는 한국인회 추산으로 70만명이 넘는다. 그들 가운데 주재원 등 일정한 수익을 보장받는 이는 그다지 많지 않다.
10년 이상 정주한 1세대도 마찬가지다. 그간 이들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는 나중에 들어오는 진출자들이 제공하는 일자리였다. 하지만 그나마도 이제는 끊어지고 있다. 정확한 통계는 나오고 있지 않지만 2006년 말을 전후해 중국에 유입되는 인구가 포화상태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우다코우에서 중국어학원 겸 유학원을 운영하는 김아무개씨는 "최근 대학생은 물론이고 조기유학생의 증가세가 주춤한 것 같다, 중국 유학 인구가 워낙 많고 동북공정 등 때문에 중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확산되는 것도 한 원인인 것 같다"고 말했다.
조선족 동포와 한국인의 관계에서도 여전히 불가근불가원의 원칙이 유지되고 있다. 기자도 지난해 9월 중국에서 조선족 동포와 합자로 사업을 꾸려봤다. 각자의 장점을 살려 시너지 효과를 보자는 방향이었고 큰 규모의 투자를 할 필요가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합자가 이뤄졌다.
하지만 기자에게는 한국 쪽에도 사업장이 있었기 때문에 중국 쪽 사업에 전념할 수 없었고, 중국 쪽 파트너 역시 생각했던 만큼의 역할을 해주지 못했다. 결국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상태에서 올해 7월 갈라섰다. 둘 사이의 거리가 이성으로 이해하던 것보다 실제로 만났을 때 더 멀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기회였지만, 감정이 심하게 상하지 않고 헤어진 것에 감사해야할 판이다.
"바꿀 수 있다면, 중국 국적으로 바꾸고 싶다"
교민들의 안전 문제도 심각해졌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재중 한국인 커뮤니티인 북유모(http://cafe.daum.net/studentinbejing)에는 황정일 공사의 사망과 관련한 글이 줄을 잇고 있다. 대사급의 공사가 죽어도 제대로 된 항의 한 번 못하고, 중국 외교가에서는 한 명도 영결식에 참석하지 않는 등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외교당국이 한국인을 지켜줄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렵지 않느냐는 것이 일반적인 목소리다.
중국에서 몇 번의 사업실패 후 지금은 제법 큰 IT기업을 이끌고 있는 한 사장은 얼마 전 기자와의 술자리에서 하소연하듯 외쳤다.
"황 공사 사건을 보면서 더 선명해졌다. 대사급 공사가 죽어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나라다. 중국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중국에 흡수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이번에 확실히 알았다. 국적을 바꿀 수 있다면 바꾸고 싶다. 자국민을 위해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는 나라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회사에도 이제는 중국인 파트너를 들일 수밖에 없다. 안 그럴 경우 누구도 막아주지 못한다. 힘 있는 중국인 파트너를 들여야만 그나마 사업을 할 수 있지 않겠느냐."
베이징에는 재중한국인회(회장 김희철)가 결성되어 있지만, 회원으로 등록한 교민의 수는 장기 거주자의 5%를 넘기지 못할 것으로 추산된다. 재외국민투표권이 부활할 경우 한국인회는 정치적인 힘을 얻어서 더 큰 목청을 낼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기대 못지않게 우려도 크다.
2008년을 기점으로 100만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되는 재중한국인들 앞에 펼쳐진 미래는 결코 밝지 않다.
가장 큰 문제는 제대로 된 교육기관이 없다는 것이다. 현재 베이징·톈진·옌타이·상하이 등지에 한국국제학교가 설립되어 있다. 베이징의 경우 초중고교를 합쳐, 수용할 수 있는 학생 수는 1200명 정도다.
하지만 이미 정원을 넘겨, 입학하려면 추첨에서 통과해야 한다. 한국학교의 적정 인원은 2000명을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이 학교에 들어가지 못할 경우 중국학교나 외국계 국제학교에 가야 한다. 이 곳에서는 한국어 교육은 물론 한국 역사교육 등은 물 건너간다. 모래알처럼 흩어진 한국인들은 이제 색깔조차 달라져 모래시계를 빠져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