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정오 서울 여의도의 한식당. 강재섭 대표가 주선한 오찬 모임에 한나라당 초선의원 9명이 하나둘 모여 들었다. 이명박 후보 측의 박형준·정두언·주호영·진수희, 박근혜 의원 측의 곽성문·유승민·유정복·이혜훈·최경환 의원이 그들이다.
경선 기간 동안 양 후보의 수족 역할을 했고 때로는 상대 후보를 향해 막말 수준의 네거티브 공세를 펼쳐온 이들이지만 "자주 얼굴을 봐야 마음도 풀린다"는 당 대표의 호소를 차마 뿌리칠 수 없었다. 진수희 의원의 경우 이재오 최고위원과의 주말 산행 도중 다리를 삐는 부상을 입고도 오찬 자리를 찾았다.
강 대표는 "예전 경선에서 이회창 후보를 제일 괴롭혔던 사람이 (경선 끝나자 이 후보와) 더 친해지더라. 이제 정권교체를 위해 잘 해보자"며 양측을 회유하기 시작했다. '승자의 여유'가 생긴 이 후보 측 의원들은 박 후보 측과의 감정 대립을 피하려는 듯 말을 조심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박 후보 측 의원들은 경선 패배의 아쉬움이 많이 남았는지 가시돋힌 농담을 아끼지 않았다.
주호영 (식당에 약간 늦게 도착하며) "왜 이리 빨리 오셨냐?"
최경환 (퉁명스러운 어조로) "진 사람이 먼저 와 있어야죠."
박재완 대표비서실장 "오늘 모임에 '왜 나는 안 불렀냐'는 분들도 있다."
이혜훈 "살생부 5인방 기준으로 부른 거 아니었나?"
유승민 (대학동기인 정두언 의원이 싱글거리며 들어오자) "표정관리 좀 하고 다니라."
정두언 (유 의원의 머리를 만지는 시늉을 하며) "머리 좀 잘라야겠다."
유승민 (정 의원의 손길을 뿌리치며) "내가 이발할 시간이 어디 있노?"
강재섭 "묵은 감정을 톡톡 털어버리자."
이혜훈 "진 사람은 털어버릴 것도 없다."
강재섭 "민주주의가 좋긴 좋다. 예전 같으면 진 쪽은 한강 모래사장에 앉고 이긴 쪽에서 망나니가 큰 칼을 들고 '후후' 했을 텐데..."
최경환 "누가 그 망나니 역할을 하나? 정두언 의원이 하겠냐? 오늘부터 함 해봐라."
진수희 의원이 다리를 절룩이며 이혜훈 의원 쪽으로 다가가자 유 의원이 "(대변인 하면서) 발길질 많이 하더니…, 등산 잘 하는 이재오 최고위원을 너무 따라다니지 말라"고 견제구를 날렸다. 발끈한 진 의원은 "유 의원은 유독 나에게만 뼈있는 말을 많이 하더라"고 받아쳤다.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전여옥 의원을 비판의 도마에 올려놓은 '이심전심' 공방이었다. 강재섭 대표가 "별로 할말이 없다. 모두가 이심전심 아니겠냐"고 말하자 유 의원이 "이심전심은 '이명박 마음이 전여옥 마음'이라는 거 아니냐"고 전 의원의 '변절'을 거론한 것이다.
당황한 강 대표가 "이순자 여사가 심심하면 전두환 대통령도 심심하다는 뜻도 있다"며 분위기를 바꾸려고 했지만 유 의원은 "이명박이 심심하면 전여옥도 심심하다는 말도 되겠다"며 전 의원 얘기를 다시 꺼냈다.
곽성문 의원은 "패자는 말이 없고 이긴 쪽에서 관용을 베풀어야 하는데 전리품 챙기듯이 하면 되겠나? 요즘 대구는 차라리 조순형·손학규를 찍겠다는 사람이 있다"며 '대구 정서'를 전하기도 했다.
선약을 이유로 오찬에 불참한 김재원 의원(박근혜 측)은 나중에 오찬 분위기를 전해 듣고 "화해 분위기가 아직 조성되지 않았는데 무리하게 모임을 잡아 차라리 만나지 않은 것만 못한 결과가 나왔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박근혜 만찬 모임] 경선 패배에도 지지자 '인산인해'
오후 5시 서울 종로의 한 중식당에서는 박근혜 선대위의 해단식이 열렸다. 선대위 사무실 문을 닫은 지 오래지만, 전국 각지에서 박 의원의 당선을 위해 뛴 조직 책임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1만원씩 회비를 받고 '자장면 모임'을 가진 것이다.
1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2층 대연회장은 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미처 자리를 잡지 못한 지지자들을 위해 1층 소연회장을 추가로 예약해야 했다.
곽성문·김성조·김재원·김학송·김학원·문희·박세환·박종근·송영선·심재엽·안명옥·안홍준·유기준·유승민·유정복·이경재·이계진·이규택·이인기·이진구·이해봉·이혜훈·정희수·주성영·진영·최경환·한선교·허태열·황진하 등 '박근혜 대통령'을 위해 온몸을 내던졌던 30여명의 의원들도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이날의 주인공 박근혜 의원이 연회장에 입장하자 분위기는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이곳저곳에서 '박근혜 파이팅', '박근혜 이겼다'라는 연호가 터져나왔다. 박근혜 캠프에 몸 담았던 핵심참모는 "선거에 지고도 이렇게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 정치지도자를 본 적이 있나? 당장이라도 창당 발기인 대회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였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박 의원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죄송스럽다", "앞으로도 저는 바른 정치를 하겠다"며 경선에 대한 구체적인 평가와 향후의 정치 행보를 가늠할 수 있는 표현을 자제했다.
선대위 핵심 간부들이 울분이 가득 담긴 연설을 대신 토해냈다.
"선거인단 투표에서는 이기고 여론조사에서 져 패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놓고 분하고 원통해서 밤잠을 못자면서 일주일을 보냈다. 선대위원장으로서 박 전 대표에게 죄스럽고 모든 지지자들에게 죄스럽다. 역사에 죄를 짓는 심정이다. 한 가지 자랑스러운 것은, 내 선택이 지금도 옳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안병훈 공동선대위원장)
"오늘부터 우리는 강철 같은 의지와 희망의 상징으로 박근혜를 우리의 가슴에 품고 살자. 우리가 흘린 땀에 대해 정말로 자랑스러웠기에 우리의 이웃과 아이들에게 이야기하자. 꿈은 이뤄질 것이다." (홍사덕 공동선대위원장)
경선 패배 후 강원도에서 칩거하다 귀경한 서청원 전 의원은 이명박 후보 측의 이재오 최고위원을 겨냥해 독설을 퍼부었다.
"그냥 쉬려고 했는데 정말 기가 찼다. 뭐, 박근혜 측 사람들이 반성을 해야 된다고? 무슨 반성을 하란 말이냐? 선거인단에서 이긴 걸 반성하란 말이냐? 이명박씨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동원했으면서도 선거에서 졌다. 왜 당원들이 그에게 등을 돌렸는지 그것을 반성해야 한다.
안하무인격이고 기고만장한 사람들은 절대 승리자가 될 수 없다. 국민의 마음을 달래고 하나가 되려는 노력을 해도 시원찮은데 누구보고 건방지게 반성을 얘기하나? 아직도 정신 못 차렸다. 그래서 집권할 수 있겠냐?"
서 전 의원은 "나는 (이명박의) 승리를 인정하지만 그 사람의 도덕성까지 전부 안고 갈 이유가 없다. 도덕성 문제는 이 후보 본인과 그들이 앞으로 해결할 문제"라고 잘라 말했다. 그의 연설이 이어지는 동안 일부 청중들이 박수와 함께 '서청원'을 연호했지만, 캠프의 한 의원은 "이런 게 언론에 또 보도되면 당에 득 될 게 없는데…"라고 근심어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박 의원은 인사말을 마치자 일부 지지자들과 악수를 나눈 뒤 행사장을 떠났다. 이 후보와의 회동이나 대선정국에서의 역할 등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며 답변을 피했다. 박 의원의 비서실장을 지낸 유정복 의원은 "박 의원이 30~31일 당 워크숍에는 참석하지 않을 것같다"고 전했다.
[이명박 만찬모임] 당내 분란 우려해 '표정관리' 모드
"이대로(이명박을 대통령으로)!"
27일 저녁 7시 서울 신촌의 한정식집. 이명박 후보를 지지했던 한나라당 원내외 당협위원장 150여명이 이곳에 모여 기쁨의 축배를 들었다.
당내 기반이 취약했던 이 후보는 이들의 조직력을 바탕으로 당을 차근차근 '접수'해 박근혜 의원에게 최종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박희태ㆍ김덕룡 공동선대위원장을 필두로 이상득 국회부의장과 이재오 최고위원, 주호영·정두언·박형준·진수희 의원 등 캠프의 핵심 멤버들이 해단식을 겸한 만찬 회동에 참석했는데, 불과 두 시간 전에 박근혜 캠프의 해단식이 열린 것을 의식한 듯 이 후보 측 모임은 비교적 조용하게 치러졌다.
박 캠프의 서청원 전 의원이 해단식에서 이명박 캠프를 맹비난한 상황에서 여기에 맞대응할 경우 당내 분란만 커지고 이 후보 측이 얻을 게 없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요즘 들어 부쩍 '화합'을 강조하는 이 후보가 직접 "모두 고생했지만 너무 승리를 자랑할 수 없게 됐다. 모두가 하나가 되려면 기쁨도 감추고 하고 싶은 말도 자제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는 취재진과 참석자들을 향해 "이제부터는 이 팀과 저 팀, 이쪽 캠프와 저쪽 캠프하는 것들이 이 시간이후로 없어져야 한다. 우리끼리 캠프 모임 하는 것도 이번으로 끝내고 한나라당으로 하나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후보는 자신을 표적으로 삼는 범여권 대선주자들에 대해서도 “아마 저들은 이명박이가 대꾸 좀 해주길 바라겠지만 절대 안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승리에 너무 도취된 나머지 이 후보로 '호가호위'하려는 움직임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도 함께 나왔다.
공동선대위원장이었던 김덕룡 의원은 "이 후보는 이제 우리의 소유가 아니므로 우리가 '소유'를 자랑해선 안 된다. 우리에겐 특권이 아니라 오직 책임만 주어져있고 이제 모든 공을 당권과 국민들에게 돌려야 한다"고 말했다.
'친이' 성향의 한 당협위원장은 박근혜 캠프 의원들이 이명박 측과의 오찬에서 행한 발언들이 TV뉴스에 소개되자 "저 정도까지 말했다면 참으로 걱정이다. 내일 조간신문에 '이쪽은 웃고 저쪽은 눈물 쏟았다'는 기사 안 나가려면 소리내서 웃지도 말아야 할 것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