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반에 억류된 한국인 인질들이 석방된다. 두 분의 희생자가 있기는 하지만, 나머지 한국인들이 모두 무사히 석방되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이번 일을 계기로 한국 기독교는 위험지역 선교에 대한 재검토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종래처럼 '이방인'들을 개종시킨다는 일념 하나로 빗발치는 총알을 뚫고 무조건 들어간다면, 기독교뿐만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까지 그 뒷감당을 위해 엄청난 정신적·시간적 손실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초래될 것이다.
파견되는 선교사나 봉사자들의 입장에서는 순교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겠지만, 미국 등 서방세계가 제3세계에 대한 군사적·정치적 압박을 강화하고 제3세계는 이에 맞서 자신들의 정치적 독립을 지키려고 싸우고 있는 이 마당에, 한국인들이 잘못 끼어들면 자칫 미국의 세계전략에 활용될 위험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처럼 위험지역 선교가 미국의 세계전략에 이용되는 측면이 있다면, 이런 선교 과정에서 목숨을 잃는 사람들 역시 반드시 순교자라고 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저 정치적 희생자 정도로 치부될 수도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기독교인들이 바라는 '의미 있는 죽음'이 아닐지도 모른다.
"선교를 하다가 목숨을 잃었으면 그 자체가 소중한 것이지, 거기서 무슨 의미를 따지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죽음의 문턱에서 예수가 어떤 행동을 취했는가를 검토해보면, 기독교인들 역시 자신의 생명과 죽음을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예수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 믿고 있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는 2000년 넘게 인류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하지만, 예수는 아무 때나 '기꺼이' 죽으려 하지 않았다. 예수는 세상을 위해 죽으러 왔지만, 그는 자신의 생명과 죽음을 결코 헛되이 생각하지 않았다. 예수가 자신의 죽음이 '의미 있는 죽음'이 되도록 하기 위해 항상 주의를 기울였다는 점은 신약성경 곳곳에서 쉽게 발견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예수의 적들 특히 보수적인 바리새인들은 틈만 나면 예수를 죽일 꼬투리를 찾았다. 그들은 예수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면서 그의 흠집을 찾곤 했다.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던 당시 이스라엘에서 바리새인들이 자기편 사람들을 예수의 강연회장에 보내 "우리가 가이사(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마태복음 22장 17절)라는 적대적 질문을 던진 것은 매우 유명한 일화다.
이 상황에서 잘못 대답했다가는 반역죄에 걸릴 수도 있었다. 만약 그랬다면, 예수는 순교자가 아닌 순국자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마태복음 22장 21절)는 절묘한 대답으로 위기를 피해 갔다.
이때 예수가 바리새인들의 공격을 피한 것은, 그런 공격에 정면대응 했다가는 '무의미한 죽음'을 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 가이사에 대한 반역을 선동하는 정치적 행위가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정치적 행위의 대가로 당한 죽음이라면 그것은 정치적 죽음이 될 수밖에 없다. 온 세상을 구원하는 '종교적 죽음'을 찾아가는 예수에게 있어서 그런 죽음은 마땅히 피해야 할 죽음이었다.
이 일화보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마태복음 12장에도 예수가 죽음을 피해간 직접적인 사례가 나온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죽음을 피한 게 아니라 의미 있는 죽음을 찾기 위해 그렇지 못한 죽음을 피해간 것이다.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병자를 고쳤을 때에 예수에게 닥친 위험이 마태복음 12장 9절부터 21절까지에 기록되어 있다.
예수가 회당에 들어가니 그곳에 '손 마른 사람'이 하나 있었다. 예수가 그 병자를 고칠 것이라고 예상한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습니까?"라며 은근히 예수를 떠본다. 안식일에는 쉬라고 했으니까 병 고치는 일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었다. 예수도 이에 지지 않고 다소 공격적으로 나선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안식일일지라도 자기 양이 구덩이에 빠지면 당연히 구해내야 하는 것처럼, 양보다 더 귀한 사람이 위험에 빠졌다면 안식일 여부에 상관없이 당연히 구해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답변이었다.
뒤이어 예수는 곧바로 후속 행동에 착수한다. 병자를 고치는 기적을 행한 것이다. 안식일에는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율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옳거니"하고 예수를 죽일 방도를 의논한다. 잘만 하면 이것을 명분으로 예수를 죽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럼, 이에 대해 예수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바리새인들이 보는 앞에서 일부러 기적까지 행했으니, 계속해서 초강수를 던지지는 않았을까? '이 정도면 종교적 죽음이 되겠다' 싶어서 그대로 목숨을 내놓지는 않았을까? 예수의 반응이 마태복음 12장 14~16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사람이 많이 좇는지라. 예수께서 저희 병을 다 고치시고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계하셨으니"
이에 따르면, 바리새인들이 자기 목숨을 노리자 예수는 정면으로 대응하지 않고 일단 위급 상황을 피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그는 그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들에게도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는 경계의 말을 잊지 않았다.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바리새인들 앞에서 기적을 행하는 강수를 던져 상황을 한층 고조시키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가서 자리를 피함으로써 죽음을 면한 것이다.
위와 같은 상황도 종교적 죽음으로 연결될 수 있었겠지만, 병자 한 사람이 아닌 온 인류의 몸값을 대신하는 죽음을 찾는 예수에게 있어서 그것은 마땅히 피해야 할 상황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예수는 자기의 생명과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 경우에 따라서는 죽음의 위험을 살짝 피하는 슬기도 발휘했다. 그는 죽음의 문턱에서 무조건 전진하지 않았다. 그는 의미 있는 죽음이 무엇인가를 항상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위와 같은 예수의 행적을 볼 때에, 비(非)전도지역이라고 해서 죽음의 위험을 불사하고 무조건 뛰어드는 것은 기독교인으로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가 보여준 지혜처럼 기독교인들은 생명과 죽음 모두를 의미 있게 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죽음을 불사하고 위험지역 선교에 뛰어드는 기독교인들이 미국의 세계패권전략에 활용되어 결국 종교적 죽음이 아닌 정치적 희생을 당하는 수준에 그치고 만다면, 이는 선교사나 봉사자 본인뿐만 아니라 뒤에서 열심히 기도하고 헌금을 보내주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닐 것이다. 예수처럼 의미 있는 죽음을 찾아가는 것이 진정한 기독교인의 자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