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 생각만 해도 맑은 침이 가득 고이며 정신이 가을하늘처럼 투명하게 밝아지는 것 같다. 한국 사람에게 김치만큼 친근한 것이 또 있을까? 어머니 말고는 감히 김치의 아성에 도전할 단어가 없겠지만 어머니와 김치는 별도로 구획하여 생각하기 어렵다. 어머니들이 정성스레 담그신 김치는 음식 이상의 가치가 있다. 완벽한 웰빙 식품으로 세계가 극찬하는 김치는 그리 복잡한 음식이 아니다. 무와 배추를 기본으로 하여 마늘, 고춧가루 같은 식물성 재료와 광물성 재료인 소금과 동물성 재료인 젓갈을 적당한 비율로 버무린다. 김치의 맛을 좌우하는 것은 흔히 '손맛'으로 표현되는 정성이다. 같은 김치에서 싱그럽고 풋풋한 맛과 오묘하게 숙성되어 깊고 풍부한 맛이 두루 나타나는 것을 보면 신비스럽기조차 하다. 채소를 소금이나 된장에 절여 만든 일본의 츠케모노(漬物)나 양배추를 소금에 절인 독일의 자우어크라우트(Sauer Kraut) 따위가 어찌 상대가 될 수 있을 것인가. 가열이나 기타 조리 방식이 필요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토록 뛰어난 맛과 영양을 자랑하는 김치야말로 음식의 제왕이다. 김치의 종류, 도대체 몇 개야?
김치의 종류는 대단히 많다. 가장 널리 먹는 배추김치와 깍두기부터 시작하여 열무김치, 총각김치, 파김치, 갓김치, 오이소박이, 고들빼기김치, 섞박지, 보쌈김치, 미나리김치, 동치미, 백김치, 물김치, 돌나물김치, 부추김치, 달래김치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버전이 있다.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채소뿐 아니라 인삼김치, 감김치, 사과김치, 파래김치 등 약재와 과일, 해초류에까지 응용이 가능하니 김치만큼 응용 범위가 무한한 식품은 존재하지 않을 것 같다. 김치가 빠진 식탁을 생각해보라. 김치가 없는 식탁은 오아시스 없는 사막이나 앙꼬 없는 찐빵 등의 통속함으로 비유되기 어렵다. 특히 하루라도 김치를 먹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나에게 김치는 하드웨어를 가동해주는 운영체제 이상의 존재다. 일단 김치를 먹어야 정신이 부팅되고 개운하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내게 김치 없는 세상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실제로 젊은 시절에 3박4일의 산행을 떠났다가 그만 김치를 준비하지 못했던 경험은 말 그대로 악몽이었다. 아홉 끼 이상을 맨밥과 라면으로 연명해야 했던 나날은 내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기억의 하나로 저장되어 있다. 나중에는 김치가 아른거려 온 몸의 맥이 빠질 지경이었다. 그때는 정말이지 고춧가루의 개수를 헤아릴 수 있는 훈련소의 깍두기라도 한 알 먹어보았으면 죽어도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악마가 김치를 가지고 나타나 영혼을 팔지 않겠느냐고 제안하면 주저 없이 계약서에 사인할 것이 분명했다. 약 기운 떨어진 마약중독자처럼 흐느적거리며 산을 내려온 다음 가장 먼저 찾은 것은 당연히 얼큰한 김치찌개와 소주였다. 이민을 떠난 사람들이 김치를 마음대로 먹지 못하는 것을 가장 큰 고통으로 꼽는 것을 보라. 우리에게 김치의 비중은 절대적이다. 우리들은 어머니가 담근 김치를 먹고 자라면서 한국인으로 만들어졌다. 한글이 우리의 정신을 구현하는 도구라면 김치는 우리의 뼈대와 영혼을 구성하는 가장 주요한 성분임에 틀림없다. 우리의 유전자를 분석해보면 반드시 김치에 대한 부분이 있을 것으로 믿는다. 우리가 정복민족이 되지 못한 것은 김치와 적지 않은 관련이 있을 것도 같다. 나 같아도 김치를 포기하느니 차라리 한 곳에 머물러 사는 것을 택할 테니까, 김치 찢을 땐,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김치를 논하는데 어찌 먹는 모습을 빼놓을 수 있겠는가. 가장 호쾌한 것은 역시 총각김치다. 총각무의 대가리 부분을 잡고 단단한 육질을 와작와작 씹노라면 보는 사람의 속이 다 후련해진다. 통배추김치를 결에 따라 좍좍 찢을 때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마저 느껴진다. 오이소박이도 결코 빠질 수 없다. 십자로 깊숙이 칼집을 낸 부추를 그득 머금은 오이를 한 입 베어 물고 씹으면 시원한 오이 맛과 톡 쏘는 부추 맛이 적절히 배합되는 데는 그야말로 극락이 따로 없을 지경이다. 물김치는 또 어떤가? 특히 한겨울에 떠낸 동치미를 마시는 맛은 어디에도 비길 수 없다. 동치미에 국수를 말아먹는 맛도 천하의 일품이며 칼국수에 곁들여진 싱그러운 겉절이 또한 절대 빠지지 않는다. 어떤 김치가 가장 맛있다고 평하려는 것은 어떤 빗이 가장 좋은가를 두고 벌이는 대머리들의 논쟁처럼 어리석은 짓이 아닐 수 없다. 앞에 말한 것처럼 어떤 김치가 가장 맛있다고 평할 수는 없겠지만 계절적으로 구분될 수는 있다. 김치는 크게 나누어 김장김치와 그렇지 않은 김치로 나뉜다. 김치가 겨울동안 먹을 채소를 갈무리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학설이며 김치의 어원인 침채(沈菜)에서부터 명확히 드러나기 때문에나 나 또한 이견이 없다. 온 가족이 동원되어 담그던 김장김치 그 시절의 겨울은 거의 모든 것을 김장에 의지했기 때문에 모든 가족이 총동원되기 마련이다. 지금은 김치냉장고가 있어서 매우 편리지만 김장독을 묻을 자리를 파는 것부터가 그리 만만치 않은 노동이다. 식구가 많은 집은 수백 포기를 담근다. 한편에서 배추를 절이면 다른 쪽에서는 무를 채 썰고 양념을 버무리기에 여념이 없는 모습은 농경민족의 특징이 잘 나타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적당히 절여진 배추에 보기에도 먹음직한 붉은 속을 넣고는 잘 여며서 김장독에 넣을 때까지의 과정은 매우 힘들지만 보람은 충분하다. 김장이 거의 끝나면 남은 속에 싱싱한 굴과 살찐 잣을 아낌없이 넣은 다음 참깨를 뿌려 마무리한다. 온가족이 모여 앉아 잘 절여진 알찬 배추에 속을 싸먹어야 비로소 김장이 끝나게 된다. 기억에 저장된 김치 가운데 가장 우선순위가 부여된 것 역시 김장김치다. 풋풋했던 김장에 맛이 들 무렵이면 이미 혹독한 겨울의 중심이었다. 어머니는 갖은 김치를 순번을 달리하여 밥상에 올렸으며 가끔씩 자반이나 꽁치를 놓아 균형을 맞추었다. 추위가 맹위를 떨칠수록 김치를 꺼내는 고통이 가중되었지만 어머니는 내색하지 않았다. 어렵게 꺼내 김치를 맛있게 먹는 자식들을 보는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김장이 제대로 익은 다음부터는 김치찌개의 향연이 벌어졌다. 푹 익은 배추김치에 기름진 돼지고기를 듬성듬성 썰어 넣고 끓여낸 김치찌개는 두말이 필요 없는 최고의 성찬이었다. 짜릿한 오르가즘마저 느껴지는 김치찌개의 시큼하고 칼칼한 국물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겨울이 소모되는 속도는 김장독이 비어가는 것과 일치했다. 어머니가 비어버린 김장독을 헹구어 낸 다음 얼마 지나지 않아 작고 노란 왕관 같은 산수유가 떼로 모여 피고 물오른 버들가지에 고운 수정란이 다닥다닥 붙어 자랐다. 그토록 굳건했던 김치찌개의 자리를 냉이와 달래를 넣은 된장찌개가 대치하는 것은 겨울이 가고 봄이 되었다는 분명한 증거로 기능했다. 새로운 계절은 봄동을 버무린 겉절이를 대동했다. 그렇게 순환된 한살이가 이제는 추억의 형태로 저장되어 있다. 다시 김치냉장고를 열었다. 장모님께서 보내주신 지난해의 김장김치가 아직도 풋풋하고 싱그럽다. 그것을 먹으면 오늘도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다. 역시 나는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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