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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중반, 여성, 대학 휴학생(고졸), 비정규직, 세전 월급 89만4360원


나를 수식하는 몇 가지 단어들. 책에서 진단한 바에 의하면 나는 거의 절망적인 상황이다. 가족을 살펴보자. 그야말로 비극적이다. 비정규직인 엄마, 고졸에 '노가다'를 하는 남동생은 아침 7시부터 꼬박 12시간을 주 6일로 일하고, 월급 130만원을 받아 일자리 소개비로 15만원을 내준다.

 

우리는 막연한 희망을 갖고 산다. 그래도 '열심히',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되뇌면서. 석연치는 않지만, 열심히 살아도 나아지지 않는 형편의 이유가 온전히 우리에게만 있다고 생각하면서 사는, 우리 가족은 '착한 국민'이다. 그리고 대다수 가정 또한 이렇게 온순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래서 이 책 <88만원 세대>를 앞에 놓고 읽기를 망설였다. 내 상황을 날 것 그대로 보는 것, 지금의 절망을 아무런 장식 없이 확인하게 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나는 나 믿어주는 사람이 필요해!

 

뜬금없지만 <커피프린스 1호점>을 보면서 울먹였던 장면은, 한결이가 은찬이 여자인 걸 알게 되어 배신감을 느끼며 뱉었던 12회 중 한 대사였다.


"나는, 나 믿어주는 사람이 필요해. 개망나니라고 해도, 천하의 쓸데없는 놈이라고 모두가 날 욕해도, 최한결은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최한결은 한다면 하는 놈이다, 최한결은 아직 하고 싶은 일을 못 만났을 뿐이다, 정말 한다면 하는 놈이다, 그렇게 나 믿어주는 사람!"


나는 이 말이 예사로 들리지 않았다. 최한결 이름 대신에 내 이름을 넣고 생각하며, 그리고 내 친구들의 이름과 얼굴을 떠올리며, 세상의 모든 어른들에게 외치고 싶었다. 우리에게 기회를 달라고.

 

지금 우리 사회의 20대는 어른으로 대접받지 못한다. 생각이 없다, 고민이 없다, 책 안 읽는다, 부모 등골 빼 먹는다 등등. 매번 혼나다보니 만성적으로 두려움을 갖는다. 용기 내어 무슨 말을 꺼내면 잘 모르는 것들이 덤빈다며 권위를 이용해 쉽게 짓밟는다. 386세대나 경제개발시대를 살아온 윗세대를 보면서 지금의 20대는 뭔가 대단한 것들을 이룬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에 주눅 들어 있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윗세대의 리더가 등장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책은 그런 경향이 지금의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이라고 진단한다.(211쪽)

 

저자 중 한 사람인 우석훈씨는 이와 관해 최근 인터넷서점 알라딘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결국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면 관심도 없는 거고, 문제를 풀 수도 없어요. (중략) 386세대는 지금도 '우리가 이런 부당한 대우를 당했다' 하면 광화문으로 모이죠. 근데 20대가 '부당한 대우를 당했다'하면 '그래도 참고 공부 열심히 하세요' 하죠. 그렇게 하면 실체가 못 되는 거예요. 프랑스의 68세대는 평생 한 번도 당한 적이 없어요. 10대 때 한번 화끈하게 싸우고 '우리 건들면 알지?'하게 된거죠. 그 사람들은 은퇴해서도 풍요롭게 살게 되는 거예요. 혼자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면 좋을 것 같은데 안 그렇다는 거죠. 한두 명은 살 수 있지만, 내가 그 한두 명이 되긴 힘들어요."

 

책을 덮고 난 지금, 마음이 든든해진다. 감동이나 위로를 위한 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깊은 위안을 얻었다. '어른들이 알아준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늘 혼만 나다가 '너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 이렇단다. 우리 같이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고민해보자'하고 저자들이 함께 어깨를 겯고 나서주니, 읽는 이는 새로운 희망을 꿈꾸게 된다. 저자인 우석훈씨와  박권일씨가 마치 우리 시대의 (프랑스 68혁명 당시의) 샤르트르와 푸코처럼 느껴진다면 오버일까?

 

우리가 따져 물어 극복해야 할 88만원

 

책 속에서 만난 절망의 시대를 살아가는 희망 없는 이십대들의 문제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내가 견뎌내고 있는 지금의 문제였고, 내 친구들의 문제였으며, 앞으로 살아갈 대부분 청년들의 문제였다.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학습할 기회조차 보장받지 못한 채 사회로 내던져진다. 고시와 공무원이라는 안정된 직업을 준비하는 백수를 선택하거나, 비정규직이 될 수밖에 없는 사회에 대해 <88만원 세대>는 젊은 세대들에게 '왜'라는 질문을 던지기를, 윗세대에게는 이들의 왜라는 질문에 '적극적으로 대답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저자들은 말한다. 20대가 최소한 숨쉴 수 있는 공간이라도 열어주는 것, 그것이 대한민국이 2007년에 풀어야 할 첫 번째 숙제라고(144쪽). 한 가지를 더 덧붙인다. 마왕 앞에 선 아들의 시신 앞에서 울지 않기 위해서 지금 필요한 것은 침착함과 인간에 대한 예의 두 가지라고(304쪽).

 

공멸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의 88만원세대를 '함께' 고민하고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혁명을 대안으로 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이 시대와 산적한 문제 앞에서, 문제에 대한 극복에 대해 더 명확하고 실체 있는 대안을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그 첫번째 노력은 책을 읽는 일이다.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고, 지금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88만원 세대 - 절망의 시대에 쓰는 희망의 경제학

우석훈.박권일 지음, 레디앙(2007)


#88만원세대#20대#우석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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