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천안문  천안문 광장에서 찍은 천안문.
천안문 천안문 광장에서 찍은 천안문. ⓒ 김용훈
천안문 광장의 인민영웅기념비 천안문 광장 중앙에 우뚝 솟은 높이 38m의 거대한 기념비. 혁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유.무명의 전사들을 기리기 위하여 1958년 5월 1일에 세워졌다. 기념비 하단에는 아편전쟁 이후 중국의 근대 혁명사가 새겨진 8폭의 부조가 있고, 정면에는 마오쩌둥이 쓴 '인민영웅영수불후:인민 영웅은 영원히 불멸이다'라는 금문자가, 뒷 면에는 저우언라이가 쓴 비문이 새겨져 있다. 기념비의 계단에는 1989년 천안문 사건 때 생긴 총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천안문 광장의 인민영웅기념비천안문 광장 중앙에 우뚝 솟은 높이 38m의 거대한 기념비. 혁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유.무명의 전사들을 기리기 위하여 1958년 5월 1일에 세워졌다. 기념비 하단에는 아편전쟁 이후 중국의 근대 혁명사가 새겨진 8폭의 부조가 있고, 정면에는 마오쩌둥이 쓴 '인민영웅영수불후:인민 영웅은 영원히 불멸이다'라는 금문자가, 뒷 면에는 저우언라이가 쓴 비문이 새겨져 있다. 기념비의 계단에는 1989년 천안문 사건 때 생긴 총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 김용훈
드디어 출발이다. 스물여섯 해를 살면서 해보지 못한 것들을 목록으로 정리하면서 이것만큼은 올해를 넘기지 말고 꼭 한 번 해보자고 했던, '혼자서 여행하기'가 드디어 실현되는 순간이다. 중국, 그곳에서 나는 거침없이 보고 듣고 느끼고 기록할 것이다.

 

지난 8월 19일, 베이징으로 떠나기 전 인천공항 대기실에서 기록한 취재수첩에는 위와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랬다. 나는 중국에 도착하면 계획했던 - 중국으로 떠나기 전 나는 철저한 계획을 통해 무엇을 보고 들을지 심지어 어떤 감정을 느낄지조차(!) 정해두었다 -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라 확신했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수원 밑에 오산이라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멀지만은 않으련만, 오산이 그 오산이 아닌 것을 인식한 곳은 하필이면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중국 땅이었다. 

 

계획대로라면, 나는 첫날 적어도 3시에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인민영웅기념탑을 촬영하면서 천안문 광장에서 벌어진 문화대혁명이랄지 천안문 사건과 같은 여러 역사적 사건을 고찰하며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으로 대변되는 오늘날의 중국을 느껴야 마땅했다.

 

그러나 나는 그 시간에 공항에서 진지하게(!) 화장실을 찾아 헤맸고, "화장실이 어디예요?"라는 중국어를 배워오지 않았음을 식은땀이 베어 나오는 주먹을 움켜쥐고 후회했다.

 

천안문 광장에 발을 디딘 시간은 계획보다 3시간이 늦어진 6시였고, 덕분에 나는 천안문 광장에는 올라보지도 못했으며 '보고 듣고 느껴야' 할 것들은 단순히 허탈감이라는 하나의 감정으로 정리되고 말았다.

 

왕푸징의 네온사인 베이징의 명동, 왕푸징 거리의 밤거리
왕푸징의 네온사인베이징의 명동, 왕푸징 거리의 밤거리 ⓒ 김용훈

하지만 첫 날이 아닌가!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단순히 비행기 연착으로 인한 차질이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위안했다. 게다가 천안문에 걸린 마오쩌둥의 사진만으로도 내가 계획했던 느껴야 할 것(!)들은 많았다.

 

여행안내 책자에는 천안문 광장을 둘러본 후 중국 국가박물관과 마오쩌둥 기념관 그리고 자금성을 둘러보라고 권하고 있었지만, 시계의 시침은 이미 천안문에 오를 수 있는 시간인 6시를 훌쩍 넘겨 7시를 향하고 있었다.

 

계획 수정은 이미 필수가 된 까닭에 나는 자금성의 동쪽에 있는 베이징의 명동, 왕푸징 거리로 발걸음을 돌렸다. 원대에 왕들이 모여 살던 곳이라 하여, '왕부(王府)'라 불리던 곳이었고 명대부터 이미 상업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는 이 거리는 차의 통행을 막고 있었고 보행자 전용도로 양편의 백화점과 쇼핑센터들은 저마다 개성 있는 네온사인을 뿜어내고 있었다.

 

왕푸징의 우물 왕푸징 거리에 있던 옛 우물터
왕푸징의 우물왕푸징 거리에 있던 옛 우물터 ⓒ 김용훈

거리를 걷다 사람들이 모여 플래시를 터뜨리고 있기에 호기심에 나 역시 다가갔다. 그들이 사진을 찍고 있는 것은 과거 우물터였다. '왕부'라 불리던 이 거리가 '왕푸징(王府井)'이 된 것은 청대부터 있던 우물 때문이었다. 거리에는 과거 우물이 있던 자리를 맨홀 뚜껑과 같은 형태로 보존하고 있었다.

 
시계가 8시를 가리킬 무렵, 내 배꼽시계는 기내식으로 점심을 먹은 이후 아무것도 먹지 못 했음을 강렬하게 알려왔다. 그러나 좀처럼 어느 가게가 식당인지 내 눈엔 좀처럼 구별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세계화의 물결은 중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왕푸징에도 맥도날드(마이당라오), KFC(컨더지)와 같은 패스트푸드점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고, 그 밖에도 많은 커피 전문점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 배 속의 거지는 이미 마이당라오(맥도날드의 중국식 발음)를 향해 가고 있었지만, 이곳이 중국이라는 사실은 발걸음을 그곳에서 멀게 만들었다. 게다가 왕푸징에는 말로만 듣던 꼬치거리가 있지 않은가! 나는 기이한 꼬치를 판다는 거리를 찾아갔다.
 
중국인들이 온갖 생물을 식재료로 쓴다는 말은 익히 들은 바 있었지만, 설마 전갈과 불가사리를 꼬치에 꽂아 구워 팔 줄은 상상도 못했다. 꼬치거리의 상인들이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 못했다면 난 아마 그날 저녁을 걸러야 했을 것이다. 양고기 꼬치구이를 저녁으로 대신한 후 나는 숙소로 돌아가는 지하철을 탔다.
           
천안문에 걸린 마오쩌둥의 사진 천안문에 걸린 마오쩌둥의 사진
천안문에 걸린 마오쩌둥의 사진천안문에 걸린 마오쩌둥의 사진 ⓒ 김용훈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화폐를 일컬을 때의 단어는 무척 다양했다.
 
그 중 인상 깊게 들렸던 것은 다름 아닌 '마오'였다. 액수에 관계없이 모든 지폐에 마오쩌둥의 초상이 그려진 까닭일까?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화폐를 일컬을 때의 단어는 ‘위엔’ 이외에도 ‘콰이’ 등 무척 다양했다. 그 중 인상 깊게 들렸던 것은 다름 아닌 ‘마오’였다. 지폐에 마오쩌둥의 초상이 그려진 까닭일까?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소액 화폐를 “마오”라고 부르기를 즐기는 것 같았고, 나는 그런 그들을 보며 체 게바라가 티셔츠의 캐릭터로 혹은 흑맥주의 카피로 되살아났을 때 느꼈던 때와 동일한 감정을 느꼈다.

특히, 중국을 여행하며 만난 상인들과의 잦은 '협상(?)'을 할 때마다 마오쩌둥이 건설한 사회주의 국가는 이미 실종됐다는 느낌을 받았다(실제로 베이징에 도착한 첫 날에 산 생수의 가격은 베이징을 떠날 때 샀던 생수의 가격의 두 배였다).
 
그리고 한국에서 유학하고 있는 중국인 친구 쉬지아가 했던 "우리나라는 자유나라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점점 알 것 같았다.

   

          
 

덧붙이는 글 | 지난 달 19일(일)부터 10일 동안 혼자 중국을 여행하며 느낀 점을 기록한 여행기입니다.


#중국여행#베이징#천안문#천안문 광장#왕푸징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