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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월화드라마 <왕과 나>가 역사적으로 아주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습니다. '조선 임금 독살설'을 받아들이면서, 겨우 13개월 만에 20살의 나이로 죽은 조선왕조 제8대 왕 예종의 죽음을 '독살'로 처리한 것입니다.

 

<왕과 나>는 주인공인 내시 김처선(오만석)의 나이를 적어도 20~30년 이상 끌어내렸고, '가상의 인물'인 판내시부사 조치겸(전광렬)을 전면에 부각시킨 드라마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저, 등을 굽히고 다니면서 왕의 잔심부름이나 도맡는 줄 알았던 내시들의 정치적 비중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등, 엄밀히 말하면 '픽션'이죠.

 

일부 시청자들은, <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알려진 역사적 상식에 근거해, <왕과 나>가 그리는 '예종 독살설'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역사왜곡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 눈으로 직접 보지 않은 수백 년 전 이야기인 이상, <조선왕조실록>이 아무리 방대한 기록을 담아둔 역사서라 할지라도 무조건 믿는 것도 무리가 있습니다.

 

참고로, <조선왕조실록>은 집권한 당파의 이해관계에 따라 여러 차례 개수(改修)됐던 적도 있습니다. 수정했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선조수정실록'과 '현종대왕개수실록'입니다.

 

물론 실록 편찬의 뿌리가 되는, 실시간 정치적 일지인 '사초'만큼은 누구도 손대지 못했다고 합니다만 실록은 경우가 다릅니다. 당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집권당에 불리한 기록은 수정했던 전례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조선왕조실록>이라도 100% 믿을 것은 못된다는 겁니다. 이런 예를 뒷받침해주기 좋은 말이 마침 있다는 것도 기억하세요. "역사는 이긴 자의 기록이다."

 

예종이 독살됐다는 점은, 그 결론을 추론할 수 있는 역사적 기록도 전무한 만큼 '드라마의 픽션'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조선 임금 독살설'은 오래전부터 신빙성 있게 제기됐던 학설 중 하나입니다.

 

'임금 독살설', 어떻게 제기됐을까?

 

'조선 임금 독살설'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대중이 이해하기 쉽게 거론한 학자는 이덕일입니다. 그는 <누가 왕을 죽였는가> <조선 왕 독살사건> 등의 저서를 매개로 꾸준히 '조선 임금 독살설'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가 주장하는 '독살당했을 가능성이 있는' 조선의 임금은 12대 인종, 17대 효종, 18대 현종, 20대 경종, 22대 정조, 26대 고종 등입니다. '고종 임금 독살설'은 안 그래도 오래전부터 제기됐던 학설인만큼, 수긍이 갑니다. 논란의 대상은 나머지 5명의 임금인데, 잘 보시면 뭔가 공통점이 발견될 것입니다.

 

뭘까요? 예, 바로 '거대여당'의 독주를 제어하려 하거나, 태생적으로 그 반대정당에 속했다고 알려진 임금들이라는 것입니다. 12대 인종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자신을 지지하는 외삼촌 윤임을 중심으로 하는 '대윤(大尹)' 소속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반대편에는 자신을 극도로 미워했던 계모 문정왕후 윤씨와 그 동생 윤원형을 중심으로 뭉쳐진 '소윤(小尹)'이 있었습니다. '소윤'은 인종이 죽어야만 문정왕후 소생의 아들 경원대군(훗날 명종)을 용상에 앉힐 수 있었습니다.

 

17대 효종은 '북벌론'을 제기하면서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북벌 반대파와의 격렬한 논쟁의 중심에 있었고, 18대 현종은 그 유명한 '예송 논쟁'을 매개로 집권당 서인을 몰아내려다 갑작스런 죽음을 맞았습니다. 소론이 정치적 기반이었던 20대 경종과 노론의 갈등, 22대 정조와 노론 벽파의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을 정도'의 뿌리 깊은 갈등은 굳이 언급 안 해도 다들 아실 것입니다.


<왕과 나>에서의 예종은 아버지대의 공신들의 부정부패를 일신하고자 조정 공신들을 몰아낼 계책을 세우고 있었고, 그 신호탄으로 내시들의 '금혼령'을 내렸다가, 해임된 판내시부사 조치겸에 의해 독살당한 것으로 나옵니다.

 

조치겸 자체가 가상의 인물이긴 합니다. 하지만 <왕과 나>는 그의 죽음이 '갑작스러운 것'이었고, 한명회를 비롯한 계유정난의 공신들의 전횡이 극심한 상황 속에서 맞은 죽음이었다는 것을 주목한 듯합니다.

 

게다가, 형 의경세자의 사망 이후 어떻게든 궐 안에 다시 들어오려던 야심을 품고 있었던 인수대비의 존재, 월산군을 제쳐두고 왕대비의 수렴청정이 가능한 12세의 자을산군을 보위계승자로 지목했다는 점에서, 무작정 '역사왜곡'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다소 무리는 있습니다. 인수대비 다들 기억하시죠? 손자가 즉위했을 때까지도 정치를 주물럭거리려 하다가, 손자한테 맞아 죽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착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왕은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것이지만, 그건 천만의 말씀입니다. 조선왕조 518년에 걸쳐 내키는 대로 정치했던 임금은 연산군이 유일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연산군의 운명이 어떻게 됐는지는 다들 아실 것입니다.

 

왕은 절대 마음대로 정치할 수 없었습니다. 지배계층인 사대부 자체도 "조선은 왕과 사대부가 함께 다스린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좋게 본다면, 조선왕조는 국왕과 사대부의 연립 정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면서 균형을 이루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특정정파가 지나치게 오래 집권했다거나 그 힘이 너무 막강해졌을 때는 왕조차도 그 힘을 제어하기 어려울 때가 있었고, 개혁 시도조차 어려울 때도 있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왕과 나>는 그런 정치적 패턴을 다루고자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왕과 사대부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권력을 행사하던 '내시'를 그리면서 말이죠.

 

태종과 숙종, 어떻게 왕권을 강화시켰나


그런 의미에서, 3대 태종이나 19대 숙종은 특이한 임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왕조 사상 가장 강력한 왕권을 누렸던 임금들이라는 건데, 이 두 임금은 재미있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정치공학'의 천재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불미스러울 여지가 있는 일이라면 작은 일이라도 꼬투리 잡아 숙청의 명분, 혹은 집권당의 교체 명분으로 활용했습니다. 심지어 숙종은 지지정당이 서로 다른 '부인'까지도 교체의 명분으로 삼아 주기적으로 집권당을 갈아 치웠던 것입니다.

 

하지만 말년에 이르러서는 희빈 장씨를 생각나게 한다는 이유로 당시 세자였던 경종을 미워하면서, 그 이후 100년 가까이 이어지는 노론의 독주를 허용하고 맙니다. 노론의 독주는 영조, 정조 대까지 이어지다가 순조 대에 이르러 세도정치로써 파국을 맞게 됩니다.

 

그런 반면에 태종은, 쿠데타로 즉위한 뒤 자신들의 공신들, 심지어는 처남과 사돈까지 끊임없이 '꼬투리'를 잡아 숙청합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왕 자신의 처남과 사돈처럼 자신의 뒤를 이을 아들의 왕권에 위협될 존재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태종의 최대 치적은 세종"이라고도 주장합니다. 삼촌이나 장인, 선왕의 공신과 같이 거치적거릴 존재들을 아버지가 말끔하게 제거해준 상황이었기 때문에, 세종은 마음 편하게 정사에 임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태종과는 달리, 세조는 정반대의 선택을 했던 것입니다. 그는 한명회, 신숙주, 홍윤성 등과 각별한 사이를 유지합니다. 하지만 예종과 성종이 즉위했을 때의 그들은 이미 너무 막강해져 있었습니다. 특히 한명회, 딸들을 예종과 성종의 정실왕후로 동시에 밀어 넣습니다. 왕대비들과 손을 잡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릅니다. 기록에는 없더라도, 예종과 성종으로서는 적잖은 부담이 됐을 것입니다. 

 

참고로, 정조는 노론 벽파와의 싸움에 있어서, 영남 남인을 파트너로 삼아가면서 그들의 만인소(1만명이 서명한 상소)를 유도하고 친위쿠데타를 시도하려 했습니다. 태종의 방식입니다.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준 뒤, 자신은 군사권을 장악한 상왕 자격으로 친위부대 장용영을 일으켜 노론 벽파를 일시에 제거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 사례를 생각해봤을 때, <왕과 나>가 그렸던 '예종의 개혁'은 실패할 수밖에 없던 일입니다. 부친 세조마저도 묵인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 증조할아버지 태종조차도 20여 년에 걸쳐 갖은 모략과 음모를 다 꾸며내고 나서야 공신들을 몰아낼 수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권력과 재력을 움켜쥔 구체제를 몰아내는 일, 아무리 병권을 쥔 종친이 있었다 하더라도, 기껏 대간(사간원과 사헌부, 언론과 검찰로 보면 됩니다) 몇몇 믿고서 시도할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역사적 사실로도 그렇습니다. 대간의 주축을 이뤘던 사림파는, 총체적 권력을 장악했던 훈구파와 중종반정 권신에 의해 몇 번이나 사화를 당하고 처절한 피를 흘려가면서 명종 말기에 문정왕후 사망에 이르러서야 역사의 전면에 등장합니다.

 

정치란 명분과 힘의 균형

 

루마니아에서는 차우셰스쿠의 잔당들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총체적 권력을 한 번이라도 누리게 되면, 그들은 퇴치가 어려운 존재들이 됩니다. 그 총체적 권력이 사회 곳곳에 미쳐있기 때문에 자체를 일시에 제거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뿐만 아니라,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 아무리 명분이 있어도 '힘'이 부재돼서는 구체제를 몰아낼 수 없는 일입니다. 정조를 생각해봅시다. 거대여당 노론 벽파의 독주를 막아내려 했고 근대적 개혁에 눈을 뜬 군주였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결국 노론 벽파의 총체적 힘을 당해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말년에 친위쿠데타까지 기획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정치란 명분과 힘의 균형입니다. 우리가 흔히 '정치공학'이라고 하는 것도, 정치인 스스로가 힘과 명분을 얻기 위해 꾸며내는 계략과 아이디어를 일컫는 말입니다.

 

<왕과 나>, 그리고 조선 역대 임금들이 구사했던 '정치공학', 왕을 독살했다는 의심을 받는 당파(주로 서인, 노론)를 보면, 정치는 인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시험해볼 수 있는 기폭제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따지고 보면, "너 죽고 나 사는" 제로섬 게임이 바로 정치이며 '정치공학'이기 때문입니다.

 

<왕과 나>의 조치겸은 비록 가상의 인물이라지만, 그 '제로섬 게임'의 현실을 낱낱이 보여줍니다. 그래서 흥미로운 캐릭터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미디어다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왕과나#오만석#전광렬#조치겸#예종독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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