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시 찻길 문화
7월쯤인가요. 잠깐 서울 나들이를 하고 홍제동 선배네에 놀러갔습니다. 하룻밤 묵고 아침에 길을 나섭니다. 햇볕이 좋아 조금 걷기로 합니다. 무악재를 넘습니다. 버스로는 금세 넘고, 자전거로는 조금 헉헉거리면 넘을 수 있는 무악재. 걸어서 넘자니 제법 땀이 나는군요. 그러나 땀보다는 자동차들 방귀 때문에 걷기 안 좋습니다. 차소리도 참 시끄럽고요. 이래서 도시에서는 걸어다니는 문화가 차츰 사라지겠구나 싶습니다. 나날이 골목길이 넓어지면서 골목 문화가 사라지고 골목집도 창문을 꽁꽁 닫아걸잖아요. 아이들이 골목길에서 뛰어놀 수 없다면, 부모들도 골목길에 부업감을 가지고 나와서 이웃사람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일할 수 없습니다. 부모들, 거의 아주머니와 할머니들이 골목길에 돗자리 깔고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며 일할 수 없다면, 아주 나어린 아이들은 집안에만 갇혀 지내야 합니다. 아이들이 집안에만 갇혀 지내야 한다면, 집에서 무슨 놀이를 할까요. 자연스레 컴퓨터 놀이요 비디오 놀이겠지요.
언덕배기를 넘습니다. 언덕배기 둘레로 새로 짓는 아파트가 참 많이 올라섰습니다. 곧 다 짓겠군요. 저 아파트들이 다 지어지면 이 길에는 차가 훨씬 많이 늘 테고, 차방귀는 더 모질 테며, 차소리는 더 시끄럽겠지요. 그러면 사람들이 이 길을 걸어서 오갈 일은 더 줄어들 테고, 걸어서 오가는 사람은 몸이며 귀며 마음이며 아주 고달프겠네요. <2> 사진감을 어디에서 찾느냐
이제 서대문 역사박물관이 나옵니다. 안쪽 나무길을 걷습니다. 큰길 바로 안쪽, 나무를 두 줄로 심어 놓은 거님길인데도 아주 조용하네요. 다른 세상을 걷는 느낌입니다. 도시에서는 어쩔 수 없이라도 차 다닐 길을 놓아야 하는데, 차 다닐 길을 놓는다 하면, 찻길 옆으로 사람들 걷는 길을 길쭉하게 내어놓고, 이 거님길에 나무를 두 줄로 알뜰히 심어 주면 어떨까 싶군요. 그렇게 되면 거님길을 걸을 때 한결 조용하고 나무그늘을 즐길 수 있겠지요.
서대문형무소를 옆으로 보며 걷습니다. 독립문도 옆으로 보며 걷습니다. 독립문까지는 못 들어가게 쇠울타리가 놓여 있습니다. 울타리를 뛰어넘어 지나가고 싶지만 참습니다. 건널목을 건넙니다. 파출소 옆을 지나고 영천시장 들머리 한켠에 자리한 <골목책방>에 닿습니다. 안으로 들어가 가방을 내려놓으며 인사를 합니다. 얇고 큰 책 하나를 집어들어 부채로 삼습니다. 팔랑팔랑 땀을 들이며 <어거스틴-참회록>(대한기독교서회,1954)을 먼저 고릅니다. 세로쓰기로 된 판. 나중에 읽어 보리라 생각하며 고릅니다. 다음으로 <장수명-행복한 나그네 매표소 시인, 장수명>(멘토,2007).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여러 곳에서 크게 소개를 해 주었습니다. 부천 어디께에 이분 일터인 버스표 파는 곳이 있다던데. .. "넌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했구나. 근데 지금 내가 널 잡으면 어떻게 되게? 넌 아마 절름발이 날개를 갖게 될걸? 나처럼 말야. 그러니까 조심해야 돼." 나비는 30분쯤 머물다 완전히 기운을 차렸는지 아침 햇살 속으로 팔랑팔랑 날아가 버렸다. 점심시간에 몰려나온 아이들한테 나비가 얼마나 예뻤는지, 어떻게 쉬다가 갔는지, 무슨 무늬가 있었는지 시시콜콜 얘기해 주었다. 매표소에 들르는 손님들에게도 이 신기한 사건을 전해 줬다. "나비가 허물 벗는 거 봤어요? 이게요, 오늘 아침에 나비가 태어난 번데긴데요……." 공간이 텅 빈 고치집을 증거로 삼아 놓고 종일 들뜬 시간을 보냈다 .. 〈22쪽〉
글치레가 조금 보여 아쉽지만, 이런 대목 몇 군데를 살짝 걷어내면 수수함을 느낄 수 있어 좋습니다. 장수명 님이 조그마한 당신 일터에서 사람을 만나고 복닥이면서 겪은 일을 찬찬히 적어내려갑니다. 때때로 당신 어릴 적을 돌이키면서, 당신이 당신 일터에서 만나는 아이들한테 '어른이 된 자기가 들려줄 수 있는 슬기'를 나누기도 하고, '아이들이 어른한테 깨우쳐 주는 슬기'를 얻어 받기도 합니다.
<안드레아 케르베이커/이현경 옮김-책의 자서전>(열대림,2004)는 나중에 읽어 보려고 골라듭니다. <지율-지율, 숲에서 나오다>(숲,2004)가 보입니다. 처음 나왔을 때는 책값이 비싸다고 느껴져서 안 샀는데. 지율 스님이 밥굶기 저항을 하며 적었던 짤막한 글을 모은 책이지만, 좀 수수하지 못하게 엮었거든요. 빈자리가 많고 줄간격도 넓습니다. 여느 책과 같은 판으로 짜느라 그랬을 수 있으나, 아예 손바닥책으로 엮고 부피도 줄여서, 호주머니에 쏙 들어가도록 엮었다면, 이 책을 더 많은 사람이 사들고 선물을 하며 좋은 뜻을 나눌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 .. 그런데 최근 내원사를 방문한 분들이 몇 분 계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부산의 오거돈 부시장과 나오연 국회의원 등이 내원사 주지 스님을 찾아뵙고 제 단식을 만류하여 달라고 하셨답니다. 이상한 일이지요. 시청 앞에 있는 저는 그들이 누구인지 모르는데 모두에게 열려 있는 현장을 두고 그들은 왜 내원사까지 가야 했을까요. 직선을 좋아하는 그들이 우회 노선을 택하는 이유가 궁금해집니다 .. 〈44쪽〉
60년대 노동자들의 임금 불만족 원인은? 사진잡지를 몇 가지 구경합니다. <日本カメラ> 347호(1974.7.)와 382호(1976.12.)를 보고 <アサヒカメラ> 544호(1977.5.)와 882호(2000.6.)와 878호(2000.3.)를 봅니다. 서른 해 묵은 잡지와 2000년에 나온 잡지를 함께 들추어보는데, 사진쟁이 눈높이는 어슷비슷합니다. 사진 찍는 재주는 그다지 나아지거나 달라지지 않는구나 싶습니다. 다만, 예나 이제나 비슷한 대목이 있다면, 일본에서 사진을 즐기는 사람들 가운데 퍽 많은 이들은 '사진감을 자기 삶이나 이웃 삶에서 찾는다'는 대목. 먼 데에서 예술을 빚어내려고 사진을 찍지 않는군요. 예술 사진을 만드는 사람도 있으나, 예술이 아닌 삶으로 사진을 즐기는 사람이 더 많아 보입니다.
'보고서 제4집'<노사협조의 조성과 지도(柳成기업주식회사)>(한국생산성본부 생산성연구소,1964)가 보입니다. 순 한문투성이 자료모음이지만, 노동자들한테 설문받기를 많이 해서 눈길이 갑니다. 첫 물음은 '여러분은 현재 받고 있는 임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읍니까?'. 여기에 '아주 만족'은 아예 없거나 한둘(학력에 따라 설문받기를 합니다 : 국졸, 중졸, 고졸, 대졸). 표3을 보면 '불만의 원인'이 무엇인가 받아 놓습니다. ┌ 너무 적어서 생활이 안 되기 때문에 (36.6%) ├ 다른 회사보다 적기 때문에 (14.1%) ├ 일에 따라 공평하게 주지 않기 때문에 (9.9%) ├ 사무직원에 비해 너무 적기 때문에 (7.0%) ├ 다른 회사보다는 많지만 가족이 많아 생활이 어렵기 때문에 (2.8%) └ 그밖에 / 모르겠다 다음으로 재미있는 설문받기는 표8로 나오는 '열심히 일하고 싶지 않는 이유'. ┌ 임금이 너무 적기 때문에 (30.4%) ├ 아무리 열심히 해도 그 대가가 없기 때문에 (13%) ├ 사람다운 대우를 안 해 주기 때문에 (13%) └ 그밖에 / 모르겠다
<3> 내 삶이 없는 사람한테는
<レニ-ン/和田哲二 옮김-左翼小兒病>(希望閣,1945)을 보면 책 안쪽에 '1928년'이라고 되어 있으나 판권은 1945년. 흐흠. 잘 모르겠으나, 이 책을 쓴 레닌은 1924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레닌이라는 사람이 1928년에 쓴 책은 아닐 테지요. 인터넷으로 찾아보기를 하니, 레닌은 1920년에 이 책을 썼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 희망각 출판사에서 1928년에 첫판을 내고 1945년에 거듭판을 냈다는 소리일까요?
<이종기 편저-위인들의 일화집>(세종문화사,1980)을 봅니다. 머리말에 "우리보다 앞서 간 분들의 이야기 중에서 다른 사람의 머리에 잊혀지지 않고 오래도록 기억되는 일, 그것이 어떠한 적은 일이거나 큰 일이거나를 막론하고 그 사람을 대표하는 것으로 남는 일이 대부분입니다" 하고 나옵니다. 차례를 봅니다. 갈릴레오, 아이젠하워, 아르키메데스, 에디슨, 아인슈타인, 웹스터, 구렌펠, 보크, 웰즈, 소크라테스, 뿌스, 헬렌 켈러, 죤슨, 톨스토이, 에머슨, 와트, 라이트, 컬럼버스, 쎙키, 이렇게 모두 서양사람들만 나옵니다. 이 가운데 여성은 헬렌 켈러 한 사람.
아이들이 자기가 커 가는 동안 '본보기 삼을 어른들 삶'을 톺아보도록 이끄는 일은 반갑습니다. 그런데 그 어른들이 어찌 아이들하고는 너무 멀리 떨어진 서양나라 사람들뿐일까요.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서는, 아이들이 옆에서 흔히 만나거나 부대낄 수 있는 사람들에서는 훌륭한 어른을 찾아보기 어려웠을까요? 없었을까요? 하긴, 책만 그렇겠습니까. 우리가 돈벌이로 삼는 일도, 우리가 사랑하거나 좋아한다고 믿는 짝꿍도, 우리가 돈들여 장만해서 입으려는 옷도, 우리가 신나게 놀 만하다고 느끼는 관광지도, 우리 마음에서 우러나와 찾아가는 곳이라기보다 '거기 좋다더라'라든지 '그거 좋다더라' 하는 유행을 좇지 않나요. 내가 보기에 좋은 옷이 아니라, 남이 보기에 좋은 옷을 입지 않습니까. 내가 하기에 좋은 일이 아니라, 돈을 벌기에 좋은 일을 하지 않습니까. 내가 사랑하기에 좋은 짝꿍이 아니라, 나와 잘 어울려 보이거나 내 기쁨을 채워 줄 짝꿍을 찾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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