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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스 암스트롱씨

난 당신이 우리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3607km를 자전거로 86시간 15분 02초에 달리며 평속 41.65km로 달렸다'는 기록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더욱 굳혔죠.

세상에… 평속 41km라뇨. 제가 갖은 애를 써야 간신히 낼 수 있는 속도로 3600km를 넘게 달린다는 게 말이 됩니까. 게다가 그 기록은 10km 넘게 이어지는 오르막도 있고, 보호막도 없는 급내리막길도 있으며, 3m 앞도 안보이는 안갯길을 달린다는 그 유명한 '투르 드 프랑스'에서 세운 게 아닙니까.

더구나 그 기록은 고환암, 폐암, 뇌종양을 이기고 세웠다죠. 너무 어마어마해서 대단하긴 한데, 오히려 별 감동이 없었습니다. 저와는 딴 세계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런 가운데 당신의 자서전 <이것은 자전거 이야기가 아닙니다>를 읽게 됐습니다. 덕분에 며칠 새벽잠을 못잤습니다. 아주 독특한 인간의 영웅담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더군요. 처음엔 '사이클 선수가 쓴 자서전이 자전거 이야기가 아니라니…'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자전거 이야기가 아니더군요.

랜스 암스트롱씨

램스 암스트롱, 샐리 젠킨스가 지은 <이것은 자전거 이야기가 아닙니다>
 램스 암스트롱, 샐리 젠킨스가 지은 <이것은 자전거 이야기가 아닙니다>
ⓒ 체온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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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책 속에서 어릴 때부터 뭔가 남달랐던 위인이 아니라, 고통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했던 한 소년을 만났습니다. 소년의 어머니는 세 번의 남편을 맞이했고, 그 중 한 명은 소년이 한 살 때 헤어졌고, 또 한 명은 폭력 아버지였습니다. 나머지 한 명이 소년을 좋아했지만 아쉽게도 부부 합의하에 헤어졌더군요.

테니스공에 불을 붙여서 던지기 놀이를 하셨다구요. 불행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니 속에 담은 울분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습니다. 만약 자전거를 타지 않았다면 그 울분이 어떻게 폭발했을 지 알 수 없었겠지요.

당신은 자전거를 타고서 자동차를 이리저리 피하고 빨간 불이 켜져도 무시하고 달렸다고 털어놓으셨네요. 그러다가 차에 받혀 뇌진탕을 당하고 무릎엔 부목까지 대야 했지만, 트라이애슬론 경기에 나가 3위를 했더군요. 그런 악바리 기질은 아무래도 울분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즐거움을 느끼려고 자전거를 타는 게 아니다. 고통을 느끼려고 타는 것이다."(111쪽)

당신은 참 솔직합니다. 프로 대회에 출전해 경쟁 선수에게 '엿 먹어라'라고 외쳤다면서 스스로 '매너가 거칠었다'고 말할 정도니 말입니다. 암에 걸렸을 때는 매일 마음속으로 암과 협상을 하셨더군요. '내가 다시는 사이클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나를 살려준다면 그 조건을 받아들이겠다'구요. 심지어 살려만 준다면 폐품 수집이라도 하겠다고 말입니다. 그렇죠. 저는 십 몇 년 전 무릎에 고름이 찼을 때 그렇게 협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암을 치료하고 병원에서 퇴원한 뒤에도 1년 동안 전전긍긍하셨네요. 암은 치료 뒤 1년 안에 재발할 가능성이 있으며, 만약 재발하게 되면 2-3달 안에 죽기 때문이라고 당신은 이야기했습니다. 그 1년을 당신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삶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참 그렇네요. 암을 이기는 것도 어렵지만, 이기고 난 뒤의 삶은 오히려 더 처참할 수 있겠군요. 치료하느라 무일푼이 된 당신은 이제 새 삶을 고민합니다. 하지만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 상태로 사이클을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죠.

게다가 이전 후원사들은 모두 계약을 포기했더군요. 당신의 재기 가능성을 의심하면서 말입니다. 죽음에서 돌아왔는데, 박수는커녕 냉대라니요. 세상 인심을 보는 듯해 마음이 씁쓸했습니다.

당신은 아주 뚜렷한 현실을 맞이한 상태로 고민을 시작합니다. 매달 2만달러의 장애보험을 5년 동안 받게 돼 있는데, 만약 사이클을 다시 시작하게 되면 그 돈을 모두 포기해야 합니다. 그런데 기껏 붙잡은 후원사가 내놓은 계약금은 18만달러. 성적이 나쁘면 언제 해약할지 모르는 계약이니, 참 고민이 되었겠습니다.

차라리 장애보험금을 타면서 즐기고픈 마음이 왜 없었겠습니까. 실제 당신은 그렇게 방황하셨죠. 사이클을 버리고 말입니다. 만약 제가 시한부 생명이라도 직장생활을 하기보다는 열심히 놀고, 열심히 먹었을 겁니다.

"내게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지만, 그 시간을 사이클을 타며 보내고 싶지는 않아요. 사이클을 타야 하는 환경과 조건이 싫고, 당신(약혼자)에게서 떨어져 있는 게 싫어요."(232쪽)

당신의 솔직함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 책에 푹 빠진 이유입니다. 당신은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며 '삶이란?' '행복이란?' 질문을 던집니다. 덕분에 6월 '서울 랠리'(자전거 대회) 이후 발길을 뚝 끊은 북악산엘 자전거를 타고 올랐습니다. 오르면서 '고통과 행복'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랜스 암스트롱씨

당신은 '투르 드 코리아 우승자 랜스 암스트롱'보다 '암을 이긴 랜스 암스트롱'으로 불리길 더 원합니다. '분노'에 가득한 한 청년에게 삶의 새로운 가치에 눈을 뜨게 해주었다면서 말입니다.

"암을 앓고 난 후 나는 또 다른 감정적인 원동력이 필요했다. 분노가 아닌 어떤 다른 원동력 말이다. 암은 내게 삶을 위한 계획을 세우게 했다. 그리고 투르 드 프랑스의 각 구간 승리를 하는 것처럼 작은 목표를 위한 계획을 세우는 법도 가르쳐 주었다. 또한 암은 잃는 법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 건강이건 집이건 예전의 자신이건 가끔 무언가를 잃는 경험은 인생에서 나름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352쪽)

<이것은 자전거…>를 읽으면서 당신의 고통에 함께 아프고, 이겨낼 때 함께 긴장했습니다. 종종 잊곤 하는 삶의 고통을 떠올리며 지금 얼마나 행복한지 만족해하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자전거 이야기엔 좀 인색하셨네요. 요즘 자전거 후진국인 우리나라에선 부쩍 자전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에너지 고갈, 대기오염, 교통사고와 교통소음, 도시 온도 상승, 주차난 등 갖가지 문제가 불거지면서 자전거가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죠.

하긴 당신은 그런데는 전혀 관심이 없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전히 자전거를 타고 자동차 사이를 누비고, 신호를 무시한다고 말할 정도니 말입니다. 게다가 모터 달린 건 죄다 좋아하고, 그중 스쿠터는 가장 좋아하는 물건이라고 말하는 점에 비춰보면 자전거의 친환경성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당신이 자전거를 타는 모습을 보면서 보다 많은 사람이 자전거를 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자동차를 몰 때는 자전거를 타는 사람을 좀 더 배려하겠지요. 그리고 자전거 타는 재미에 푹 빠진 사람들은 자동차 타는 비율을 좀 더 줄일 것입니다. 더불어 '자전거는 멋있다'고 외치겠지요. 그래서 앞으로도 당신이 자전거 타는 모습을 한국에서 종종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만 당신이 '암공동체' 활동을 하면서 보다 많은 사람의 생명을 걱정하는 것처럼 자동차가 사람들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신경을 써주면 좋겠습니다. 자전거가 자동차의 대안교통이 된다면 암운동 못지않게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즐겁게 책 읽어놓고, 사족으로 끝을 내고 말았네요. <백 투 더 퓨처>와 <인디애나 존스>를 제작한 프랭크 마샬이 감독, 맷 데이먼이 주연인 당신 영화가 만들어지기로 했다지요. 축하합니다. 암을 축복이라고 한 당신의 말, 영화 속에서 어떻게 표현될 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당신의 당당함과 솔직함이 영화 속에서도 잘 드러나길 바랍니다.

"암이 내게 해 준 가장 큰 일은 내 안에 있던 벽을 무너뜨린 거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암에 걸리기 전, 나는 자신을 순전히 '승자'와 '패자'라는 말로만 정의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런 경직되고 허영에 젖은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건 내 머리카락과도 같다.…하지만 이제 나는 머리를 모두 밀어버린다. 아내가 내 머리를 이발기로 다듬어 준다. 지금 내 머리는 손질하기가 정말 쉽다. 평생 이렇게 하고 다닐 것이다."(357쪽)

암 극복과 미국의 사회보장제도

이 책을 보면서 미국의 의료제도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됐다. 랜스 암스트롱은 철인같은 의지로 말기암을 이겨냈다. 하지만 만약 랜스 암스트롱처럼 재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겨낼 기회조차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내내 들었다.

건강보험이 없고 민간보험에 의존하는 미국 사회에선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모든 병을 치료해야 한다. 감기 하나에 10만원이 들어갈 수도 있다. 그런 사회에서 말기암 치료라면 상상을 초월할 터. 연봉이 2백만달러(약 18억원)였던 암스트롱은 암 치료를 위해 집과 차 등 모든 재산을 다 팔았다.

자서전에 따르면 미국에선 암에 걸려도 민간 의료보험에 들어있지 않으면 혜택을 전혀 받을 수 없다. 조기검진 제도가 실시되고 있고, 조기검진을 통해 발견된 암 환자에게는 치료비가 지원되는 우리와는 사정이 다른 셈이다.

헬렌 켈러가 집안의 재력이 있었기 때문에 최고급 교육을 받고 장애를 이길 수 있었던 것처럼, 랜스 암스트롱 재력이 있었기 때문에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 점에 관한 언급이 없는 게 책을 읽는 내내 찜찜했다.



이것은 자전거 이야기가 아닙니다 - 랜스 암스트롱, 삶으로의 귀환

랜스 암스트롱.샐리 젠킨스 지음, 김지양 옮김, 체온365(2007)


태그:#랜스암스트롱, #암, #자전거, #투르드프랑스, #사이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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