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년 전 북경여행에서 꼭 가보고 싶었으나 못 간 곳이 있었다. 땅의 제왕이라던 중국 황제가 하늘에 다가가려고 하던 곳, 천단(天壇)에 가보고 싶었다. 이번 단체 여행에서도 북경의 유명 관광지 여정에 천단은 제외되어 있었다. 나는 다시 이른 새벽에 몸을 씻고 홀로 길을 나섰다. 중국의 황제들은 자신을 하늘의 아들인 '천자(天子)'라고 칭했다. 그들은 당연히 하늘을 숭배하고 제사를 지내게 된다. 하늘에 대한 제사는 황제의 중요 활동이었고, 하늘을 상징하고 하늘에 제사 지내는 건축물을 장대하게 짓기 위해 노력하였다. 명나라의 영락제(永樂帝)는 북경 천도 후 북경 남쪽에 천단을 옮기고 국가의 중요한 행사인 제천(祭天) 의식을 행했다.
북경 외성(外城)의 남동쪽에 자리한 천단은 무려 6km에 이르는 성곽이 둘러싸고 있었다. 나는 천단의 동문을 통해 천단의 벽을 통과했고, 천단의 외단 안으로 들어갔다. 천단의 건축물과 외벽, 그리고 나무 위에는 아침의 찬란한 햇살이 부서지고 있었다. 저 멀리 기년전(幾年殿)의 푸른 지붕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중국에서 푸른색은 하늘을 상징하는 색상이다. 푸른 하늘빛이 태양을 받아 더욱 푸르게 빛나고, 땅의 초록도 싱그럽다. 아침의 눈부신 태양 아래 산책을 즐기는 할아버지들이 많다. 천단을 둘러싸고 있는 이 숲의 공원에도 태극권과 검무를 즐기는 노인들이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고 있다. 산책길에는 수령이 수백 년은 되었을 것 같은 측백나무들이 잔디밭 위에 커다란 기둥을 세우고 있다. 수시로 관리하는 것으로 보이는 잔디밭은 말끔하게 깎여 있다. 잔디밭 너머로 황건전(皇乾殿)의 붉은 벽에 밝은 햇빛이 반사되고 있었다. 천단공원의 가장 북쪽에 자리 잡은 중심건물인 기년전(祈年殿)은 3층 건물의 둥근 몸체가 이색적인 건물이다. 기년전 건물이 둥근 형태를 보이는 것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라는 중국 고대의 사상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이 기년전에는 수많은 기둥이 높이 38m를 지탱하고 있다. 처마 기둥은 24절기, 건물 바깥 기둥은 12시간, 건물 가운데 기둥은 12개월, 건물 중앙 기둥은 사계절을 나타낸다. 단순하면서도 여성처럼 예쁘게 생긴 건물이다.
삼중 처마를 이루는 기년전의 지붕은 마치 유리처럼 푸르게 빛난다. 푸른빛도 바로 하늘을 상징하고 있다. 하늘의 자손이라고 자부하던 중국의 황제는 하늘을 상징하는 건물 안에 들어와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서 풍년을 기원했다. 기년전에서 황궁우로 향하는 길은 대단히 멀다. 그 길 이름을 단폐교(丹陛橋)라고 하는데, 길 중앙의 밝게 빛나는 대리석 길은 오직 황제만이 다니던 길이다. 길이 워낙 길고 넓게 뚫려 있기 때문인지 굳이 황제의 길로만 걷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동쪽에서 뜨는 햇살을 가려주는 나무 그늘 아래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다. 천단의 한 건물과 건물 사이를 가는 데에만도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이곳도 자금성과 마찬가지로 모두 둘러보려면 다리 아픈 것은 감수해야만 하는 곳이다.
한 개의 처마와 둥근 몸통, 푸른 지붕을 가진 황궁우(皇穹宇)는 마치 기년전을 1층 건물로 축소해 놓은 것 같이 생겼다. 그 모습이 마치 삿갓을 쓴 인형의 머리 같이 생겼다. 이 황궁우는 하늘을 뜻하는 상재(上宰)의 위패를 모시던 곳이다. 그런데 이 황궁우가 유명한 것은 황궁우 건물 때문이 아니다. 황궁우의 둥근 건물을 다시 한 번 둥글게 감싼 외벽, 회음벽에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다. 이 회음벽은 완전 원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이 소리를 지르면 그 소리가 벽을 돌고 돌아서 메아리처럼 들린다. 황궁우를 지나 석문을 통과했다. 석문 안쪽, 천단 가장 남쪽에 3층의 한백옥 제단인 원구단(圓丘壇)이 있다. 우리나라 서울 소공동의 한 호텔 앞에도 이 곳 천단과 똑같은 이름의 원구단이 있고, 그 안에 팔각 3층 처마를 가진 황궁우가 남아 있다. 중국의 명과 청 왕조 시기에는 중국 북경에 살던 황제만이 하늘에 제사를 올릴 수 있었고, 조선의 왕은 하늘에 제사를 올릴 수 없었다. 그러다가 조선의 힘이 가장 미약하던 시기에 고종이 대한제국을 칭하고 황제를 칭하면서 생겨난 것이 지금 서울의 원구단 유적이다. 하필 국력이 역사에서 가장 미천하던 때에 황제를 칭하고 하늘에 제사를 올렸으니, 이도 어찌 생각하면 웃기는 일이다.
온갖 권위로 치장된 중국의 명, 청나라 황제는 이 곳 원구단의 세계 최대 제단에 직접 올랐다. 그 황제는 층마다 9개의 계단을 밟고 3층을 올랐다. 황제가 올라선 각 층의 제단에는 하늘을 상징하는 숫자, 9의 배수로 이루어진 기둥이 서 있었다. 황제가 오른 각 층의 동그란 제단은 중국인들이 9개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는 하늘을 상징하고 있었다. 황제는 하늘을 상징하는 원형 제단에서 온갖 제천의식을 거행했다.
원구단의 한 중앙에는 천심석이 있고, 황제는 이 돌에 올라 제사를 지냈다. 현재 천단공원 내단에 위치한 이 원구단은 아침 입장시간이 있는데, 이 입장시간 이후에는 원구단의 천심석에 말 그대로 발 디딜 틈이 없다. 황제가 발을 딛고 올라섰다는 그 작은 돌에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줄을 서서 한 번씩 올라가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관광객들이 이 돌 위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황제인 척 해 보는 것을 즐긴다. 그리고 일부 관광객들은 이 많은 관광객들에 치여서 천심석 위에 올라서는 것을 포기한다. 나 역시 그 많은 중국 관광객들의 뒤에 줄을 서기는 싫었다. 천단 밖으로 나가야 할 시간이다. 나는 원구단을 나와서도 천단의 남문을 향해 한참을 걸어야 했다. 서울의 원구단에서는 느낄 수 없는 긴 거리이다. 천단의 처음과 끝을 쉬지 않고 계속 걷는 나의 다리는 이미 지쳐가고 있었다. 화려한 궁궐에서 호의호식하며 운동 부족이었던 중국의 황제들은 도저히 걸어서 도달할 수 없는 거리였을 것이다. 중국의 황제는 가마를 타고 이동했기 때문에 천단이 이렇게 깊은 줄을 피부로 느끼지는 못 했을 것이다. 천단은 중국을 여행할 때에 어떤 점을 주의해야 하는지를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중국은 문화유산의 크기가 워낙 크다. 그런데 중국의 유적지 내부에서는 여행자들이 걸으면서 유적을 감상할 수밖에 없으니, 다리에 피곤이 밀려드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리고 문화유산의 규모가 큰 만큼 한 문화유산을 감상하는 시간도 당연히 많이 소요된다. 그래서 중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는 여행자들은 항상 걸어야 하는 동선과 걷는 시간을 미리 생각해 두어야 한다. 아침의 관광객들이 천단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오늘도 천단의 천심석 위에는 황제를 경험해 보려는 사람들로 가득 찰 것이다. 수많은 관광객들은 제단에 서서 한 번씩 하늘도 올려다 볼 것이다. 천단은 그렇게 계속 많은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계속 토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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