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자 종교적 동물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종교의 가르침 없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진리는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종교는 위협을 당하고 있다. 스스로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고 어둠과 부패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인질이 무사히 귀환했음에도 사건은 종결되지 않고 더 많은 잡음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남의 종교는 자기 종교를 들여다 보는 거울이다. 남의 종교 없이 자신의 종교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탈레반 인질사태의 원인은 종교적 문화와 차이를 존중하지 않는 데서 시작되었다. 일부 성직자들의 편협한 종교관이 부른 인재였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남의 종교를 인정하는 않는 독선이 얼마나 끔찍했던가. 이슬람 종교문화권의 정벌에 나섰던 중세의 십자군 전쟁과 영국으로부터 독립된 인도가 종교적 이유로 분열되기까지 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종교적 차이와 갈등으로 얼마나 많은 폭력과 전쟁이 난무하는가. 우리 역사는 어떠한가. 기독교를 서학으로 연구했던 천주교는 1784년 북경에서 이승훈이 세례를 받으면서 선교가 시작되었다. 선교사들의 선교가 시작되면서 많은 박해와 순교자가 발생했다. 박해 100년 동안 2만 명이 넘게 순교했다. 박해의 원인은 유교의 조상제사 거부, 양반체제에 도전하는 평등사상, 정치적인 당파싸움, 서양세력에 대한 거부감 등을 들 수 있다. 박해의 가장 큰 이유는 조상제사문제였다. 조상제사가 우상숭배인가 전통문화인가의 문제로 100년간이나 논쟁을 벌였다. 적응주의를 고수했던 예수회는 전통문화로 보았고 다른 수도회들은 우상숭배로 보았다. 교황청에서 조상제사를 미신적인 행위로 판단하고 금지령을 내렸다. 일부 선교사들이 조상제사를 우상숭배로 본 편협한 선교관이 2만 명이 넘는 순교자들을 발생케 한 주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의료 봉사를 갔던 이슬람 종교문화권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들의 종교와 문화를 그리스도교 문화로 바꾸는 것만이 선교일까? 그들에 대한 바른 선교는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올바른 선교는 성서를 선물하거나 물질적인 시혜를 베푸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들의 종교적 문화를 존중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예수천당 불신지옥’과 같은 편협한 종교관으로는 타 종교인들에게 선교하기가 어렵다.
물질이나 말로 하는 선교가 아니라,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고 선교지역의 주민들을 사랑하고 봉사하는 삶으로서의 전교가 바람직하다. 봉사와 사랑의 성녀였던 마더 데레사 수녀처럼 말이다. 단기선교나 물량공세의 선교는 인질사태 같은 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타종교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자, 한반도에 천주교가 전해진지 200여년, 개신교는 100여년이 되었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 불교나 유교를 믿고 토속신앙을 믿었던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예수천당 불신지옥처럼 우리 모든 조상들은 지옥에 떨어져 불타고 있을까?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성자까지 십자가에 못 박은 하느님께서 그렇게 옹졸한 분이실까? 그리스도인들은 위대한 우주를 만드신 분이 하느님이라고 고백한다. 우주에는 태양계 같은 은하계가 무수히 존재한다. 이러한 우주적 관점에서 볼 때 지구는 점에 불과하다. 그 지구에서 한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와 같다. 그 인간이 죄를 지으면 얼마나 짓겠는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삶 자체가 죄라고 하더라도 그 죄는 먼지에 불과하다. 내 밥그릇을 챙기기 위해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와 사랑을 축소하고 왜곡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손바닥만 한 종교관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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