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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로라도 스프링스 올림픽 공원 호수에서 노는 아이들.
콜로라도 스프링스 올림픽 공원 호수에서 노는 아이들. ⓒ 문종성

8월 27일. 콜로라도 스프링스를 떠났습니다. 국도 85번을 타고 퍼블로(Peublo)로 내려가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도로가 안 나옵니다. 멀리 돌아도 보고, 몇 번이나 도로가 갈라지는 다리를 건너도 보고, 사람들에게 수차례 길을 물어보아도, 85번 도로를 끝내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기를 한 시간여. 알고 보니 85번 도로와 25번 고속도로가 함께 가는 길이라서 도로를 찾을 수 없음을 화물차 운전수로부터 듣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퍼블로로 가는 길은 자전거로는 진입할 수 없는 고속도로기 때문에 루트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제 자전거 북미 횡단의 변곡점이 될 줄이야! 덴버에서부터 쭉 고민했습니다. 서진해서 로키산맥을 넘어갈 것이냐, 남진해서 뉴멕시코 사막으로 지나칠 것이냐? 3000m가 넘는 고지에 야생 동물의 위협 가능성과 숙식장소 찾기도 수월치 않을 로키산맥보다는 무척 덥더라도 평지로 가는 뉴멕시코 사막으로 가자고 결론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제 의사와는 상관없이 길은 로키산맥으로 돌진할 것을 종용하고 있었습니다.

 길을 가다 언제라도 꽃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여유로움, 이것이 자전거 여행이 가져다 주는 하나의 매력이다.
길을 가다 언제라도 꽃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여유로움, 이것이 자전거 여행이 가져다 주는 하나의 매력이다. ⓒ 문종성

길은 로키산맥으로 돌진하라 하고

길이 없다고 화를 낸다면 나만 손해.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서 거의 처음 자리까지 다시 32km를 돌아왔습니다. 그러니까 총 64km를 헛걸음 한 셈입니다. 이미 시간은 오후 3시. 결국 이것이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사막이 아닌 로키산맥을 넘어가기로 합니다. 이거 혹시 늑대 피하려다 호랑이 만난 건 아닌지.

아직 초입이어서 그런지 경사는 걱정했던 것보다는 완만한 편이네요. 로키산맥으로 들어간 첫째 날 저녁 7시쯤 펜로즈(Penrose) 지역에서 카터(74)를 만났습니다. 침례교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로키산맥의 혼령에 정신이라도 잃은 것처럼 멍한 표정의 나를 따뜻이 맞아주었습니다.

보청기를 귀에 꽂았는데도 잘 들리지 않았지만 얘기는 그런대로 통했지요. 제가 오자마자 자신의 일을 그만둔 카터와 집에 들어왔고 부인은 낯선 이방인을 위해 저녁 식탁부터 차렸습니다.

"아니, 사람은 셋인데 왜 햄버거가 넷이야?"

지글지글 고기가 익는 냄새가 진동하는 주방에서 의아해진 카터가 넌지시 묻자 부인이 상냥하게 대꾸합니다.

"호호, 당신도 참. 생각해 봐요. 갈렙이 얼마나 배고파할지."

그들의 따뜻한 정이 식사도 하기 전에 마음을 부요하게 해 줍니다. 햄버거로 저녁을 때우고 거실 소파에 앉아 차분히 얘기하는데 그는 1953년 7월에 한국에 온 적이 있다고 합니다. 김포, 수원, 부산 등에서 비행기 정비공으로 일했다는 그는 자신의 얘기를 느릿느릿 조용하게 독백조로 내뱉었습니다.

"TV를 보면서 종종 한국 소식을 접할 때마다 깜짝 놀라곤 해. 한국은 예전과 참 많이 달라졌어. 내가 그 때는 공항에서 일만해서 한국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하고 할 얘기도 별로 없어. 그런데 그건 기억나더라고. 가끔 밖에 나가면 말야, 여기저기 굶주림에 허덕이던 아이들이 길거리에 있다가 우리가 주는 음식을 받으면 '땡큐!'하고 소리쳤지. 아마 걔네들이 하는 영어 중에 제일 많이 그리고 자신 있게 발음하는 단어였을 거야."

그는 50년도 더 된 지난 추억을 회상하며 웃어 보였습니다. 비록 말하는 것과 듣는 것이 많이 힘겨워 보였지만 카터는 74세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아직도 은퇴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밀링선반 등의 작업을 하면서 하루를 나고 있다고 합니다.

 "은퇴는 무슨 은퇴? 난 아직까지 일 하는 게 좋아. TV를 봐.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를. 그들을 보면서 항상 생각하거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들을 보면 정말 일하고 싶어진다고. 그래서 난 바쁜 게 좋아. 일이 없는 문제로 고통 받지 않은 건 축복이지."

 "일이 없는 문제로 고통 받지 않은 건 축복"

담담하게 내뱉는 카터의 얘기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몸이 쇠하는 그 날까지 일하고 싶다는 그를 보니 요즘 보기 드문 근면한 인간상을 보는 것 같아 뿌듯하고 또 게으른 제 자신을 채찍질하게 됩니다. 아, 카터의 성실함을 닮을 수만 있다면….

로키산맥에서의 첫날 밤에 인생 선배로부터 머릿 속에만 담아두고 실천하지 않는 익숙한 두 단어인 근면과 성실에 대해 배웁니다. 밖에는 비가 오고 더없이 카터의 집이 푸근하게 느껴집니다.

 록키산맥 여행 첫 날 만난 카터씨 부부. 74세에도 정력적으로 일하는 그에게서 근면성실함이 묻어나온다.
록키산맥 여행 첫 날 만난 카터씨 부부. 74세에도 정력적으로 일하는 그에게서 근면성실함이 묻어나온다. ⓒ 문종성

다음 날 다시 짐을 꾸리고 아쉬움 속에 카터 부부와 작별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러고는 사모하는 그녀와의 마음의 거리만큼이나 멀어만 보이는 로키산맥의 길을 계속 헤쳐 나갑니다.

그래도 아직까진 급경사를 만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고도가 높다보니 가쁜 숨을 몰아쉬는 때가 많아집니다. 그럼에도 어쩐지 로키산맥으로 들어온 게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산천초목이 펼쳐지는 경치가 정말 아름다웠거든요.

가쁘게 숨을 몰아쉴 땐 물을 마십니다. 더울 때보다 오히려 고도가 높은 산에서 더 많은 물을 섭취하게 됩니다. 목이 말라서라기보다 물을 충분히 마시면 몸의 신진대사를 도와주고 피곤의 원인이 되는 노폐물을 씻어내 준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물을 마시면 물 속에 녹아든 산소 한 모금이라도 빨아들일 수도 있고 자주 음식물을 섭취할 수 없기에 잠시 동안 공복을 해결해 줄 수 있기도 합니다.

오다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한 미국 자전거 횡단자인 제인(Zane)과 스캇(Scott)을 만났습니다. 동진하는 그들은 지금까지 1500마일 정도를 달렸다고 하는군요. 짐도 저보다 간소하고, 두 명이서 다니기에 서로 의지가 되어 보입니다. 앞으로 뉴욕까지 갈 거라고 하는데 친구끼리 여행하는 것도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혼자 여행하는 것과 여럿이 여행하는 것에 일장일단이 있겠지만 가끔은 마냥 힘들 때 아무런 부담 없이 어깨를 빌려줄 수 있는 누군가가 미치도록 그리울 때가 있는 법이거든요.

 동진하며 미국을 횡단 중인 제인과 스캇.
동진하며 미국을 횡단 중인 제인과 스캇. ⓒ 문종성

서로에게 짧은 격려를 나눈 후 계속해서 오르막길을 달려갑니다. 3000m가 넘는 봉우리들이 눈앞에 펼쳐지지만 생각처럼 높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내가 2000m의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오르면 힘듭니다. 산을 오를 땐 그저 자전거를 밀고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오만 살림살이가 꽉 찬 패니어를 앞뒤로 달고 거기에 야영 장비까지 뒷 짐받이에 실었으니 무게가 오죽하겠습니까? 산이 시각적으로 높아 보이지 않는 것이 심리적으로 위로를 줍니다.

아무리 '하늘 아래 뫼'라지만...

로키산맥을 따라 옆으로는 소리마저도 시원한 강이 흐릅니다. 모험과 스릴을 즐기고자 하는 사람들이 카약이나 래프팅을 즐기네요. 급류나 깊이가 초급 혹은 중급자가 타기에도 그렇게 무리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 자전거가 수륙양용이라면 한 번쯤 도전해 보고 싶긴 한데 나는 양탄자만큼이나 부질없는 상상입니다.

        
 로키산맥 트레일을 따라 래프팅을 비롯해 등산, 스키, 헬기투어 등 다양한 레저 활동을 즐길 수가 있다.
로키산맥 트레일을 따라 래프팅을 비롯해 등산, 스키, 헬기투어 등 다양한 레저 활동을 즐길 수가 있다. ⓒ 문종성

 강을 따라 카약을 즐기는 사람들.
강을 따라 카약을 즐기는 사람들. ⓒ 문종성

 과거 금광업과 광산업이 발달했던 시대를 보여주는 100량짜리 폐화물기차.
과거 금광업과 광산업이 발달했던 시대를 보여주는 100량짜리 폐화물기차. ⓒ 문종성

 강에서 낚시하는 사람.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을 떠올린다.
강에서 낚시하는 사람.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을 떠올린다. ⓒ 문종성

로키산맥의 날씨는 정치꾼들만큼이나 변덕이 심합니다. 실은 그게 바로 로키의 매력 아니겠습니까? 확실성에 근거를 둔 무미건조함보다 미래를 예단할 수 없는 로키의 날씨는 사람의 감정을 수시로 흔드는 기분 나쁘지 않은 난감함을 가져다줍니다.

맑고 파란 하늘에서 구름이 모여들고 비가 내리기까지는 불과 20분의 시간도 채 걸리지 않습니다. 반면 잔뜩 어둠이 드리운 가운데 천둥번개까지 치면서도 끝내 빗방울을 떨구지 않는 때도 태반입니다. 그래서 일말의 의심도 없이 확실한 것처럼 보여도 날씨에 대해 오늘은 맑겠거니, 비가 오겠거니 하며 함부로 단정 짓지 않습니다.

그걸 보니 사람을 대하는 것도 똑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가지 면만 보고 전체를 단정지어 버렸던 감정 섞인 판단이 얼마나 어리석고 위험한지를. 로키의 날씨를 통해 성급한 결정이 가져다주는 부질없는 편협함에 대해 또 한 수 배웁니다.

정치꾼만큼이나 변덕이 심한 로키산맥의 날씨

단순할 것 같은 로키산맥의 트레일도 반드시 길을 확인하고 다녀야 합니다. 산길이 뭐 별거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가끔 헷갈리는 구간이 나타나거든요. 사실 지도보다 정확한 게 사람입니다. 지도는 내가 어쩌다 잘못 볼 수도 있지만 사람에게 많이 물어볼수록 그 실수는 줄어드니까요. 지도의 텍스트보다 사람의 체험이 녹아든 감각이 가져다 주는 정확성은 결코 무시할 게 못됩니다.

       
 콜로라도 스프링스에서 로키산맥으로 들어가는 길. 초입이라 그런지 아직은 경사가 완만한 편이다.
콜로라도 스프링스에서 로키산맥으로 들어가는 길. 초입이라 그런지 아직은 경사가 완만한 편이다. ⓒ 문종성

고도가 높아서 그런지 덥지 않은 건 참 좋습니다. 하루 동안 96km 정도를 달려 작은 타운인 코토팍시(Cotopaxi)에 도착했습니다. 코토팍시 초입에 위치한 교회에 갔더니 나를 보자마자 사람들이 참으로 반갑게 맞아주어 정말 좋습니다.

제 이마에 '나 무지 배고파요!'라고 항변하듯 써있는지 목사님 사모님께서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고서는 비프 샌드위치 두 개와 음료를 제공해 줍니다.

이곳은 인구가 겨우 200명이 될까말까한 작은 타운입니다. 여기에 6년 전인 2001년에 와서 목회를 하는 빌(58)목사님을 만났습니다. 학생들에게 축구를 가르치고 온다는 그의 첫인상은 결코 근엄하거나 위엄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이웃집 아저씨처럼 푸근하고 소탈해 보여 더 친근감이 생깁니다. 원래는 역사과목 고등학교 교사하다 30년 전 목사로 서원한 그의 얘기를 찬찬히 들으면서 참 귀한 분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여기 한 200명 정도가 살아요. 근데 작은 마을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야망이 없어요. 하지만 인품들은 정말 좋지요. 모두가 친절하고 배려할 줄 알거든요. 자연 환경도 좋고. 산 속이라 주변에 교회가 없어요. 그래서 다른 타운에서도 오기 때문에 예배 인원은 125명 정도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성경구절 빌립보서(philippians) 4장 전체에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어떻게 주를 믿어야 하는지, 크리스챤의 모든 문제를 함축적으로 다루고 있거든요."

그는 장황하고 화려한 문구를 사용해 어렵게 말하지 않습니다. 지금 자리에서 경건함을 잃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크리스챤이라고 간결하게 단언합니다. 새삼 새로울 게 없는 내용임에도 다시 한 번 새겨듣게 됩니다. 내가 경건함을 잃지 않고 있는가? 그저 흉내만 내는 것인가? 지금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여행의 최선이 무엇인가? 많은 묵상을 안겨 줍니다.

"결국 우리가 어떤 자리에 어떤 모습으로 있든지 그 자리에서 경건하게 최선을 다해야 하는 거죠. 제가 여기 산골짜기에서 목회를 하거나 갈렙이 자전거 타고 여행을 하듯이 말이에요."

 록키산맥에 자리잡은 작은 타운 코토팍시(COTOPAXI)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빌 목사님 부부. 냉수 한 그릇 대접하는 제자의 마음으로 나를 따뜻이 섬겨주셨다.
록키산맥에 자리잡은 작은 타운 코토팍시(COTOPAXI)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빌 목사님 부부. 냉수 한 그릇 대접하는 제자의 마음으로 나를 따뜻이 섬겨주셨다. ⓒ 문종성

"그 자리에서 경건하게 최선을 다해야 하는 거죠"

빌 목사님은 언제든지 이곳을 지나치는 여행자들이 자신에게 들르면 연락하라고 주소를 남겨주었습니다. 그러고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서 일어났습니다. 매번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난 참 행운아입니다. 어쩌면 내가 가지지 못한 부족한 점을 그들을 통해 배우라는 신의 뜻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어른이 될수록 잘못은 더 많이 하는데 혼내주는 사람은 점점 더 없어집니다. 그래서 또한 가끔 듣는 훈계나 조언이 더없이 감사할 때가 있습니다. 그만큼 나를 사랑하고 기대한다는 반증일테니까요.

밤이 깊었습니다. 온수에 샤워를 하고 소파에 몸을 뉘었습니다. 긴장과 피로가 풀리고 눈꺼풀이 만근이 되는 순간 걱정 없이 밤이슬을 피한다는 게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왠지 오늘 밤엔 하늘을 나는 신나는 꿈을 꿀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주소 - PASTOR AND MRS. WILLIAM KORF PO BOX 309
COTOPAXI CO 81223-0309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뉴스파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는 http://www.vision-trip.net 입니다.



#자전거#미국횡단#세계여행#세계일주#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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