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떠나 보내는 아프리카 어머니짐바브웨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을지 아침부터 걱정이다. 아침 5시 일찍 감치 일어나 숙소 아래층에 있는 버스터미널로 내려갔다. 이미 40여명의 아프리카인 승객들이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 5시 50분께 "마르코폴로(Marcopolo)"라고 쓰인 대형 버스가 터미널 안으로 들어오는데 버스운전사 앞에 "요하네스버그(Johannesburg)"라는 목적지를 알리는 종이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내가 운전사에게 행선지를 물었다.
"어디 가는 버스냐?"
"남아공 요하네스버그까지 간다."
"짐바브웨 하라레는 안 가느냐?"
"하라레를 거쳐 요하네스버그까지 가는 버스다."말라위 릴롱궤에서 모잠비크를 거쳐 짐바브웨를 지나 남아공까지 가는 말 그대로 4개국을 달리는 국제버스다. 내가 "어제 표가 매진되어 예매를 못했다"며 사정 얘기를 하자 운전사는 "한번 기다려 보라"고 말한다.
버스승객의 대부분은 요하네스버그까지 가는 사람들이었다. 배웅 나온 가족들이 많다. 다른 아프리카 버스와 분명히 다른 점이다. 승객들 대부분이 젊은이들인데, 남아공으로 취업을 하러 가거나 사실상 이민가는 것으로 보였다. 아프리카에서는 그나마 남아공이 경제적으로 가장 앞서 있다 보니 말라위와 짐바브웨 등 경제가 어려운 국가의 젊은이들이 몰려가고 있다.
배웅하는 가족들의 아쉬운 작별에서 멀리 떠나는 그들의 사정을 알 수 있다. 남편으로 보이는 남자가 아내의 보따리를 들고 와서 버스 짐칸에 실어준 뒤 아내의 두 손을 꼭 잡으며 떨어지지 않았다.
한 중년의 어머니는 젊은 아들을 떠나보내고 있었다. 그 어머니는 치마 속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지폐를 한 장 꺼내 창문을 통해 버스에 타고 있던 아들에게 건넨다. 차가 떠날 때까지 가지 않고 아들을 안쓰럽게 쳐다본다. 아마도 요하네스버그에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아들 같다. 차창에 비치는 아들의 얼굴도, 밖에서 떠나보내는 어머니의 얼굴도 근심이 가득하다.
먼 길을 떠나는 아들을 보내는 어머니의 마음은 똑같다. 내가 시골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도시의 고등학교로 유학을 떠날 때 나의 어머니가 그랬다. 버스를 타고 대전으로 떠나는 나에게 나의 어머니도 속주머니에서 농사일로 땀에 전 지폐를 꺼내 주면서 "끼니 거르지 말고 빵 사먹어라"고 말했다. 버스가 한참을 달린 뒤 내가 뒤돌아보았을 때 나의 어머니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머리에 수건을 두른 어머니의 얼굴은 어린 나의 마음속에 그대로 흐릿한 흑백사진이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이나 아프리카나 여전히 어머니는 있었다.
기사회생으로 짐바브웨 버스를 타다모든 승객이 탄 뒤 운전사가 나에게 올라오라고 손짓을 한다. 안도의 한 숨을 쉰다. 이제 짐바브웨 하라레를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무작정 기다린 보람이 있는 날이다. 이럴 때 여행의 또 다른 기쁨을 맛본다. 장기간 여행을 하다보면 아무리 철저히 계획을 세워도 어긋날 때가 있다. 결국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는데, 운도 최선을 다한 다음에 오는 것이지 결코 그냥 오는 것은 아니다.
내 자리는 운전석 바로 뒤의 왼편에 홀로 놓여 있는 작은 의자이다. 정식 승객용 자리가 아니라 차장용 자리이다. 남자 차장은 대신 차문 앞의 보조의자를 펴서 앉는다. 작은 차장용이든 넓은 승객용이든 내가 가릴 처지가 아니다. 버스를 탔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다. 물론 요금은 미국 돈으로 42달러를 모두 내야 했다. 버스는 국제선답게 대형이고 45인승인데 빈자리가 하나도 없이 꽉 찼다. 당연히 입석은 없고 앉는 좌석만 승객을 태웠다.
차는 승객을 태우고 짐을 싣다 보니 아침 6시 30분에 출발했다. 1시간 30분 정도 달리자 높은 바위산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데드자(Dedza) 지역이다. 데드자 산맥을 따라 모잠비크 국경을 끼고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원뿔형의 화강암 산봉우리들도 보이고 평지와 나무숲이 번갈아 나타난다.
경찰 검문소에서 차가 멈춘다. 승객들이 모두 내린다. 용변을 보는 등 생리현상을 해결한다. 나도 차에서 내려 따라한다. 아프리카 버스에 익숙해지다보니 기회만 있으면 생리현상을 미리 해결한다. 아프리카에는 휴게소가 없으니 도로 옆 집 뒤뜰의 풀밭에 실례를 할 수 밖에 없다.
조금 더 지나니 안개가 짙게 깔린 산등성이 도로를 10분 정도 달린다. 그 다음은 햇살이 내리쬐는 평탄한 길이 나타났다. 평탄한 길이 쭉 뻗어 있다. 도로에는 숯과 땔감용 나무를 내다파는 모습이 보인다. 아마 산악지대여서 숯과 나무가 많이 생산되나 보다. 국경 가는 내내 거의 100m마다 팔려는 숯이 거리에 쌓여 있다. 도로에는 오직 숯만 파는 것으로 보아 주생산품이 숯인가 보다. 모잠비크 국경을 끼고 가는 길은 그제 릴롱궤로 오는 길보다도 포장이 잘 되어 있는 2차선 도로이다. 다리 역시 모두 2차선이다.
자전거 도시 음완자오른쪽으로는 음완자(Mwanza 또는 므완자), 왼쪽으로는 블랜타이어 가는 길이라는 팻말이 보인다. 잘레와 지역의 갈림길이다. 버스는 모잠비크 국경방향인 음완자로 간다. 음완자까지 46km남았다는 팻말도 보인다. 국경도로라서 그런지 대형 화물트럭 이외에는 오가는 차량이 거의 없어 한산하다.
음완자쪽으로 10여분 달리자 멋진 풍경이 나온다. 바오밥 나무숲이다. 도로 왼편의 산에 갖가지 모양의 크고 작은 수백 그루의 바오밥 나무가 야생으로 자라고 있었다. 말라위나 탄자니아 등에서 띄엄띄엄 볼 수 있는 것과 달리 바오밥 밀집지대이다. 마다가스카르 모론다바가 '바오밥 거리'로 유명하다면, 이곳은 '바오밥 산'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바오밥 산은 모잠비크의 테테를 지나면서 다시 한 번 만난다.
음완자에 버스가 들어가자 멋진 바위산들이 뒤쪽으로 병풍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말라위와 모잠비크의 고원지대를 넘어가는 길을 실감한다. 산악지대의 자그마한 국경도시인 음완자는 앞뒤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사람들이 자전거를 많이 타고 다니는 것이 인상적이다. 도로 포장이 잘 되어 있는데다 고원지대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자전거 타기에 안성맞춤이다.
베트남의 하노이가 오토바이 도시라면, 말라위의 음완자는 자전거 도시이다. 자전거가 주요 교통수단일 정도로 작은 마을에 자전거 천지이다. 르완다의 잘 포장된 도로에서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을 본 뒤로 가장 많은 자전거를 본다. 그러고 보니 르완다 사람들이 친절했는데, 말라위 사람들도 친절하다. 자전거를 즐기는 사람들이 친절한가보다. 시골 도로를 달리는 자전거는 평화로운 느낌을 준다.
버스운전사가 교대해 다른 운전사가 운전대를 잡는다. 3시간 만에 교대하는 셈이다. 처음 운전사 1명에 차장이 2명인 줄 알았는데, 운전사가 2명이고 차장이 1명이었다. 차 문 앞의 보조의자에 앉은 사람은 차장이 아니라 운전사였다. 차장은 뒤쪽 바닥에 앉아 있었다. 내가 앉은 작은 의자는 차장이 아니라 운전사 대기석이었던 것.
남아공 요하네스버그까지 이틀 이상을 달려야 하는 밤샘 장거리 운행이다 보니 운전사 1명으로는 애초 불가능하다. 두 명의 운전사는 교대로 잠을 자고 번갈아 운전을 했다. 운전사는 이불을 준비하고 있었다.
말라위의 출국수속은 음완자 국경 출입국사무소에서 했다. 출국절차는 간단했으나 워낙 사람들이 많아 1시간 이상이 걸렸다. 경찰이 마약단속을 위해 독일산 셰퍼드 같은 마약견을 끌고 다니며 짐 검사를 한다. 감자튀김과 음료수를 파는 길거리 상점들이 많다. 어린아이들은 손을 내밀며 잔돈을 달라고 끈질기게 달라붙는다.
모잠비크 땅을 달린다말라위 출입국 사무소로부터 버스로 5분 거리에 모잠비크 쪽 국경인 조부에(Zóbué) 출입구 사무소가 있었다. 모잠비크 땅이다. 이때가 오전 11시 30분. 워낙 많은 버스들이 줄을 지어 입국수속을 밟기 위해 서 있다. 역시 1시간 이상 걸렸다. 미국 돈 25달러를 내고 통과비자를 받았다.
모잠비크 사무소의 남자 직원이 다른 여자직원과 시시콜콜한 얘기를 하는 등 게으름을 피워 비자를 받는 데 30분이 걸렸다. 다른 국경에서 비자는 대부분 10분 이내에 나왔다. 외국 여행객에 대해서는 일부러 시간을 끈다는 인상을 받았다. 미국 돈 30달러를 냈는데, 거스름돈 5달러를 다 돌려주지 않고 2달러만 돌려준다.
직원이 "직인(Stamping)"하면서 고무도장을 찍으며 3달러를 더 가져간다. 고무도장 찍는 비용으로 3달러를 더 받는 것인지, 아니면 국경통과 세금으로 3달러를 받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직원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떼어 먹는 돈일 수도 있다. 아프리카 어느 나라에도 비자요금 이외의 돈을 추가로 받는 곳은 없었다. 비자를 받는데 워낙 오래 기다렸고, 그것도 내가 제일 늦게 받다보니 항의할 수도 없었다. 내가 비자받기를 기다리며 버스가 오랫동안 출발을 하지 못하고 서 있기 때문이다.
모잠비크는 국경사무소부터 말라위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낡고 허름하다. 출입국 사무소 직원들의 태도도 불성실하다. 사무소 건물은 20여 년 전에 지은 건물 같은데 보수를 하지 않아 허물어질 듯이 낡았고, 공중 화장실에는 아예 문짝이 없다.
국경사무실의 비자 대기석에는 '입구'라는 뜻으로 "엔트라다(Entrada)", '출구'는 "사이다(Saida)"라고 쓰여 있었다. 포르투갈어이다.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이 대부분 영국의 식민지여서 영어를 쓰는데, 모잠비크는 앙골라와 함께 포르투갈의 식민지여서 그렇다. 아프리카에서 포르투갈의 식민지는 모잠비크와 앙골라, 기니비사우 그리고 대서양 섬나라인 카보베르데, 상투메 프린시페 등 5개 국가이다.
남미 국가의 대부분이 스페인 식민지를 겪어 스페인어를 쓰는데 반해, 브라질만이 포르투갈 식민지여서 포르투갈어를 쓰는 것과 같다. 아시아에서는 마카오와 동티모르가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는데, 21세기 첫 독립국가로 지난 2002년 독립한 동티모르도 그 영향으로 포르투갈어를 사용한다.
식민지 착취와 내전을 남긴 포르투갈 제국주의의 추악한 얼굴포르투갈이 모잠비크를 사실상 식민지로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1498년 탐험가 바스코 다 가마가 나칼라 아래에 위치한 모잠비크 섬(일라 데 모잠비크)에 상륙하면서이다. 포르투갈은 상아와 금, 그리고 노예무역을 하면서 철저히 착취에 몰두했을 뿐 지난 1975년 모잠비크를 떠날 때까지 학교나 의료시설, 도로 등 사회간접자본시설 등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모잠비크가 독립하자 약 23만 명의 포르투갈 백인들 중 95%가 밤사이에 포르투갈로 도망쳤고, 오직 1만 명 정도만 남았다. 독립 모잠비크 정권은 오히려 백인들이 남아 새로운 국가건설에 기여하기를 바랐는데도.
모잠비크의 독립투쟁은 지난 1962년 전설적 게릴라 지도자인 에두아르도 몬들라네(Eduardo Mondlane)에 의해 모잠비크 해방전선(Frelimo, 프렐리모)이 결성되면서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몬들라네가 1969년 암살당하자 사모라 마셸이 이어받아 마침내 1975년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 대다수의 아프리카 국가들처럼 서구제국주의에 대한 반발 등으로 사모라 마셸 초대 대통령은 사회주의 정책을 펼치게 된다.
당시 모잠비크에 국경을 맞대고 있던 두 백인정권인 남아공과 로디지아(짐바브웨의 전신)는 모잠비크 국민저항운동(Renamo, 레나모)이란 반군을 만들어 프렐리모에 싸우도록 부추겼다. 레나모 뒤에는 남아공과 로디지아 뿐 아니라 포르투갈과 미국 우익세력들의 적극 후원이 뒷받침되었다. 모잠비크가 독립 이후에도 오랜 내전에 시달려야 했던 이유이다. 1992년 모잠비크는 가까스로 평화협정이 체결되면서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현재 다당제 아래 성공적인 민주주의 실험을 하고 있다.
그러나 17년간의 내전으로 1백만 명이 사망하고, 240만 명의 난민이 발생하기도 했다. 서구제국주의는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철수하면서도 내전이라는 이이제이 전술을 사용해 수많은 아프리카인들을 서로 죽이게 하는 추악한 범죄행위를 저질렀다. 모잠비크는 독립 이전에는 서구제국주의 식민지의 착취 현장으로, 독립 이후에는 동서 양 진영의 냉전 대리전쟁터로 고통을 당해야 했다.
모잠비크의 미래를 여는 두 여성독립투사이자 초대 대통령인 사모라 마셸은 1986년 잠비아를 방문하다 남아공 상공에서 의문의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는데, 그의 부인 역시 독립투사였으며 초대 교육부 장관을 지낸 그라사 마셸이다. 광산 노동자의 딸로 태어난 그라사 마셸은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유학한 뒤 돌아와 모잠비크 해방전선에 가입해 게릴라가 되었다.
모잠비크 여성 인권운동의 어머니로 불리는 그녀가 바로 세계적 인권운동가이자 남아공 최초의 흑인대통령이었던 넬슨 만델라의 현재 부인이다. 남아공의 만델라와 모잠비크의 그라사는 만델라가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 지난 1998년 만델라의 80회 생일에 결혼했다.
모잠비크도 아프리카에서 여성의 정치 활동이 활발한 국가이다. 모잠비크의 현 총리인 루이사 디오구는 여성으로 지난 2004년 40대 중반에 총리에 올라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녀는 여당인 프렐리모의 당대표직을 맡고 있어 미래의 대통령 감으로 꼽히고 있다. 지난 2005년 아프리카 대륙에서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선출된 라이베리아의 엘런 존슨 설리프에 이어 두 번째로 대통령에 오를지 관심이다.
말라위에서 모잠비크의 국경 하나만을 넘어도 도로상태가 다르다. 모잠비크 쪽도 포장이 돼 있으나 오래된 데다 보수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움푹 팬 곳이 많다. 당연히 버스가 자주 속도를 줄여야 한다. 산악지대여서 흙과 풀, 나무로 이은 집들이 많고, 머리에 바구니를 이고 가는 아낙네들도 많다.
맑은 하늘이 낮게 드리우니 산으로 내려와 있다. 방목하는 염소 떼들이 많이 있다. 15분 정도 달리니 테테와 북쪽의 안고니아로 가는 갈림길 팻말이 보인다. 조금 더 달리니 작은 마을이 나오는데, 역시 모두 초가집이다. 이곳도 지나가는 차량들을 상대로 팔기 위한 숯 자루가 길가에 많이 보인다. 산악지대다 보니 숯 이외에 달리 팔 물건이 없다. 집집마다 한두 마리의 닭이 먹이를 찾기 위해 열심히 땅을 쫒고 있다. 전형적인 산악지대의 가난한 마을풍경이다.
말라위의 가난한 산악마을과 큰 차이가 없지만 모잠비크가 더 살기가 궁핍한 것 같다. 차량도 모잠비크 쪽으로 넘어오자 구경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한산하다. 도로는 우리 버스 전용이다. 어느 마을이나 흙과 나무로 된 벽과 풀로 이은 지붕으로 만들어진 둥근 초가집들이 많은데, 모잠비크와 짐바브웨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전통가옥인 다가 오두막(Daga Hut)이다. 언뜻 보면 둥근 형태의 초가 건물이어서 농작물이나 음식을 시원하게 보관하기 위한 창고로 보이지만 사람이 사는 전통 집이다.
집 앞 나무그늘 밑에는 남자들이 3~4명씩 앉아 있는데, 특별히 할 일이 없어 무료해 보인다. 산을 개간해 밭작물을 짓기 위해서인지 들판에 불을 놓아 시커멓게 그을린 곳들이 많다. 화전이다.
한참을 달린 끝에 제법 큰 마을이 나왔다. 빨간 벽돌집과 시멘트 건물도 보인다. 제법 도시다운 국경으로부터의 첫 마을이다. 모아티제라는 지역이다. 풍부한 석탄이 나오는 탄광으로 유명한 곳이다. 도시에서 10분 정도 내려오자 강물도 보이고 평지로 내려온 듯하다. 미니버스와 트럭 등 차량들도 눈에 띈다. 마을입구에 바오밥 나무들이 수십 그루 서 있다. 빨간 장미들이 울타리를 한 마을도 보인다.
아름다운 잠베지 강을 건너다모아티제를 거쳐 도착한 곳은 테테(Tete)이다. 중서부 지역의 잠베지 강변에 위치한 테테는 오래전부터 교통의 요지로 유명하다. 테테의 잠베지 강 다리를 건너기전 모잠비크에서는 처음으로 경찰 검문이 있었다. 차량 짐칸까지 열고 검사를 한다. 차가 검문을 위해 멈추자 환타와 마른 생선을 파는 행상들이 몰려든다.
잠베지 강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프리카에도 이렇게 큰 강이 있나 싶을 정도로 넓다. 아프리카 여행 중에는 바다나 호수를 제외하고는 온통 가뭄으로 바닥이 바싹 마른 강들만 보아 왔기 때문이다. 강이 파랗고 강물도 많이 흐른다. 그 유명한 잠베지 강을 처음으로 본다.
영국의 탐험가 리빙스턴이 '신의 고속도로(God's Highway)'라고 부른 잠베지 강은 잠비아 북서쪽에서 발원해 앙골라와 나미비아, 보츠와나, 짐바브웨, 모잠비크를 거쳐 인도양으로 흘러들어가는 길이 2740km의 남부 아프리카 최대의 강이다. 리빙스턴이 '신의 고속도로'라고 부른 것은 아프리카 내륙으로 들어갈 수 있는, 신이 내린 유일한 길이라는 뜻이다. 물론 잠베지 강은 현지인들에게 물고기와 경작할 물을 공급해주는 생명의 강이라는 의미인 '위대한 강'이라는 뜻에서 나온 이름이다.
테테의 잠베지 강을 건너는 다리는 그 자체로도 명물이다. 길이가 100m 족히 넘는 아름다운 현수교 다리이다. 아프리카 여행 중 가장 인상적인 다리였다. 다리는 차량이 다니는 도로와 옆으로 사람이 다리는 인도가 따로 구분되어 있었다. 다리 밑으로는 배들이 지나다닌다.
리빙스턴이 노예무역을 보고 분노했던 테테다리를 건너자마자 오른쪽 큰 건물에 "잠베지 호텔(Hotel Zambeze)"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테테는 잠베지 강변을 따라 만들어진 아담하고 아름다운 도시였다. 리빙스턴이 아프리카 탐험을 하는 도중 노예무역의 비참한 실상을 보고 분노했던 장소도 바로 이곳이다. 잠베지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탐험하던 리빙스턴은 두 번째 아프리카 탐험을 기록한 <잠베지 강과 그 지류>라는 책에서 당시 테테에서 보았던 노예무역의 참상을 이렇게 썼다.
"어린이 노예 중에는 이제 겨우 다섯 살인 아이들이 대부분이었고, 더 어린아이들도 있었다...그리고 한 불행한 아이엄마는 아이를 업는데 방해가 되는 짐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곧장 그녀의 불쌍한 아이가 총살당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고 한다."당시 노예무역은 젊은 남자 뿐 아니라 여자, 어린아이까지 팔아넘겼다. 리빙스턴은 이미 1841년 첫 번째 아프리카 탐험에서 서부 앙골라 루안다에서 출발해 1855년 빅토리아 폭포를 거쳐 1856년 테테를 지나 동부 인도양에 도달했다. 유럽인 최초로 앙골라에서 동부의 모잠비크 켈리마네까지 아프리카 대륙을 횡단한 사람이 되었다.
테테 위쪽으로는 잠베지 강을 막은 세계에서 가장 큰 댐 중의 하나인 카보라 바싸 댐(Cabora Bassa Dam, 또는 카호라 바싸 댐) 겸 수력발전소가 있다. 리빙스턴의 두 번째 아프리카 탐험에 따라 나섰다가 1862년 숨진 리빙스턴 부인인 메리가 묻힌 곳도 바로 테테의 잠베지 강 하류이다. 모잠비크 해안에서 130km 떨어진 슈팡가(Shupanga, 현재는 Chupanga)의 커다란 바오밥 나무 아래 그녀가 묻혀 있다.
테테는 이미 16세기 초 포르투갈인이 정착하면서 잠베지 강 언덕에 세워진 도시로 오랫동안 교통의 요지이자 면화와 가축을 기르는 교역의 중심지였다. 17세기 중반에는 상아와 금의 거래시장이었고, 그 후 주변지역에서 채굴된 석탄과 금, 석면, 우라늄을 잠베지 강과 철도를 통해 인도양 항구도시 베이라까지 수송하는 중간 도시로 번창했다.
모잠비크 바오밥 나무와 마다가스카르 바오밥 나무의 차이버스는 다리를 건너자마자 외곽 도로로 급히 빠지는데, 그 주위에도 바오밥 나무가 많이 눈에 띈다. 도로 옆에는 "창가라 (Changara) 90km"라는 팻말이 있어 짐바브웨 국경 쪽으로 가는 창가라 지역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길가에 바위를 깬 작은 돌을 팔기 위해 무덤처럼 쌓아 놓았다. 정원용이나 비포장 도로, 또는 건축용 석재나 골재로 파는 돌이다. 뒷산에 바위를 캔 채석장이 뻥 뚫린 상태로 흉측한 몰골을 드러내고 있었다. 말라위와 모잠비크의 산악지대에서 팔 수 있는 것은 숯과 돌 뿐이다. 수많은 행상들의 물건을 보았지만, 석재를 파는 것은 처음이다. 오죽 팔 것이 없어 돌이라도 내다 팔겠느냐마는. 아프리카 산악지대의 고단한 삶의 모습이다.
작은 나무인 관목만이 자라는 황량한 들판이 계속된다. 여기저기 산 가운데 대못 박히듯 바오밥 나무가 서 있다. 말라위 국경에서 모잠비크 테테를 지나 짐바브웨 국경으로 가는 길에서 가장 많이 만나는 나무는 바로 바오밥이다. 바오밥의 끈질긴 생명력을 볼 수 있다. 사막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모잠비크 산악지대의 황량한 땅에서 꿋꿋이 서 있는 것은 오직 바오밥 나무 뿐이다.
모잠비크의 야산에 자라고 있는 바오밥 나무를 보면 정말 프랑스 소설가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왕자>에 나오는 바오밥 나무의 번식력과 강인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소설 속의 어린왕자는 자신이 떠나온 작은 별에 바오밥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서 별에 구멍을 뚫고 산산 조각으로 별을 깨뜨릴 것을 우려해 바오밥이 자라기가 무섭게 뿌리를 뽑아버린다.
바오밥 나무가 온통 작은 별을 뒤덮어 버릴 것이라는 어린왕자의 걱정이 결코 지나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모잠비크의 황량한 산에 자라는 바오밥 나무를 보면 알 수 있다. 가뭄과 척박한 모잠비크의 산에서도 이렇게 땅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데, 꽃들이 무성하게 자라는 어린왕자의 작은 별에서는 얼마나 빠른 속도로 자라겠는가.
아프리카 여행 중 바오밥 나무가 가장 많은 곳은 바로 모잠비크 테테의 산악지대와 마다가스카르 모론다바의 들판이었다. 그러나 같은 바오밥 나무지만, 여행객에 다가오는 인상은 전혀 딴 판이었다. 바오밥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 나무의 생김새가 달랐고, 여행하는 나의 마음도 달랐기 때문이다.
들판에 자라는 마다가스카르의 바오밥 나무가 키가 크고 굵은 허리의 몸통이라면, 척박한 산에 자라는 모잠비크의 바오밥은 키가 작고 기아에 시달린 나무처럼 말랐다. 마다가스카르의 바오밥이 가로수처럼 도로를 따라 밀집해 있다면, 모잠비크의 바오밥은 물이 적은 삭막한 산에서 살려다보니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마다가스카르의 바오밥이 통통한 무우처럼 부드러움과 후덕한 인상이라면, 모잠비크의 바오밥은 빼빼한 가시나무처럼 강인함과 날카로운 얼굴이다. 마다가스카르의 바오밥이 낭만의 상징이라면, 모잠비크의 바오밥은 생명력의 상징이었다.
지독한 가뭄으로 몽달귀신이 되어 버린 나무들모잠비크 바오밥의 생명력은 말라붙은 강물 바닥에서도 알 수 있다. 만디에 지역을 지나면서 계곡의 강물이 말라붙어 다리 밑에 강바닥만이 드러나고 흐르는 물을 찾을 수가 없다. 마을사람들이 강턱에 박은 수도펌프를 통해 물을 끌어 올리려고 위아래로 펌프질을 하는데도 물이 한 방울 나오지 않는다.
가뭄이 얼마나 심각한지는 버스를 타고 가면서도 한 눈에 들어온다. 어떤 마을입구에는 빨간색 4각형에 별이 새겨진 깃발을 꽂아 놓았다. 깃발은 모잠비크의 국기에서 따온 듯하다. 마을 공동체의 단결과 노력을 상징하는 우리의 새마을운동 깃발과 같다. 집들은 나무 울타리로 경계를 삼고 있는데, 바오밥 나무라도 없으면 정말 쓸쓸한 마을이다.
조그만 마을을 지나 다리를 건너는데 은부제 강(Nvuze River)이라는 팻말이 있다. 다리가 놓일 정도로 제법 큰 강인데도 물이 옹달샘에서 찔끔 찔끔 흘러나오듯 한줄기로 흐른다. 다른 강바닥은 모두 바짝 말라붙어 바닷가 해변 모래 같다. 다 자라지 못한 나무들도 산 곳곳에서 말라 죽은 시체로 몽달귀신이 되어 서 있다. 내가 간 7월이 비가 오지 않는 건기여서 그런지, 아니면 최근 유난히 비가 오지 않아서 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독한 가뭄임에는 틀림없다.
한참을 달린 뒤에야 강에 조그만 물웅덩이가 보인다. 어린이들이 홀랑 벗고 목욕을 하고 아낙네들은 빨랫감을 이고 와서 그 작은 물에 빨래를 한 뒤 강가에 널려 놓았다. 황량한 도로를 따라 달리는 버스는 창가라(Changara) 지역을 지나자마자 짐바브웨 국경에 도착했다. 오후 3시 35분. 니아마판다(Nyamapanda) 국경이다. 3시간 만에 말라위 국경 사무소인 조부에에서 짐바브웨 국경 니아마판다까지 횡단한 셈이다.
모잠비크 출입국 사무소 건물은 역시 허름한데다 화장실도 벽돌로 칸막이만 해놓았고 지붕은 아예 없다.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다. 승객들도 화장실을 이용하지 않고 근처 들판에서 일을 본다. 더러운 화장실은 없는 만 못하다.
음료수와 과일 등을 파는 행상도 한두 명에 불과하다. 다른 나라의 북적거리는 국경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참 못 산다는 느낌을 받은 모잠비크의 출국 수속을 마친 뒤 걸어서 5분 정도 걸어가자 짐바브웨 국경사무소가 나타났다. 버스는 승객들의 입국 수속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짐바브웨 국경에서 기다리고 있다. 깔끔한 분위기의 건물부터 모잠비크와 다르다. 짐바브웨는 경제가 완전히 파탄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출입국 사무소의 건물이나 시설은 매우 깔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