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멀었어요?(Are we there yet?)”
아이들 목소리에 부스스 눈을 떠 정신을 추스리고 보니 휴게소(Rest Area). 새벽 출발 후 처음 서는 휴게소다. 아마도 집 나선 지 두어 시간쯤 지났나 보다.
어제(7/6)는 밤을 꼬박 새웠다. 길고 긴 여름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뉴욕으로 짧은 여행을 다녀왔고, 바쁜 학기 중에 미뤄두었던 손님 초대를 몇 차례 했으며, 멀리 다른 주에 사는 지인들의 방문을 받기도 했다. 거기에 시간을 두고 처리해야 할 집안 일들이 몇 가지 더 있었고 모든 일을 다 마치고 나니 정작 길고 긴 횡단 여행 준비를 제대로 못 한 것이다.
떠나기 전날 뒤늦게 이것저것 챙기다 보니 밤을 새워버렸다. 남편이 주로 운전을 하게 될 테니 나는 차에서 부족한 잠을 보충할 수 있을테고, 장거리 여행을 앞두고 신경 쓰이는 일이 한둘이 아니었던 탓이기도 했다. 허둥지둥 일상에 치여 정신과 육체의 에너지가 소진된 느낌이다. 이번 여행이 새로운 의욕을 채워오는 시간이 되길 바라본다.
오늘은 우리 사는 버지니아를 출발해 웨스트 버지니아, 켄터키, 인디애나, 일리노이 주를 지나 미주리 주까지 달려 세인트 루이스에 도착할 예정이다. 지금은 켄터키 주의 어디쯤 휴게소. 웨스트 버지니아를 벗어난 지 얼마 안 된 듯 하다.
웨스트 버지니아라면 밤 운전은 정말 사양하고 싶다. 전에 캐나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밤을 꼬박 새워 12시간을 남편이랑 둘이 번갈아 운전을 하며 달린 적이 있는데 그 스산했던 느낌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칠흑같은 한밤, 고속도로라고는 하지만 굴곡이 매우 심한 깊은 숲 속 도로, 길인지 아닌지 분간하기도 어려운 데다 앞 뒤로 차는 한 대도 보이지 않으니 순간순간 등이 오싹할 지경. 설상가상으로 안개는 어찌나 두텁고 짙은지 차를 향해 돌진해 오는 느낌인데 유리창이라도 뚫고 들어올 기세다. 게다가 서늘한 시선으로 이쪽을 바라보며 미동도 않고 서 있는 사슴을 세 번씩이나 만났는데 그 야릇한 분위기는 좀처럼 잊기 어렵다.
하지만 오늘처럼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는 아침 무렵에 달리기엔 더없이 싱그럽고 운치 있는 곳이 그곳이기도 하다. 깊고 깊은 숲 속에 꼬불꼬불 난 넓은 고속도로를 통째로 전세라도 낸 듯 함께 달리는 차 한 대 없이 내달리고 있자면 가슴 속까지 절로 시원해지곤 한다.
아이들 간식을 챙겨 주는 둥 마는 둥 어찌된 일인지 다시 또 몽롱해지면서 스르르 잠이 들어 버렸다. 창 밖의 풍경들을 주워담을 겨를도 없이 눈 뜨고 보니 또다시 다음 휴게소.
어느새 인디애나 주 웰컴 센터다. 아무래도 어젯밤을 꼬박 새운 건 무리였나 보다. 오전 내내 몇 개 주를 넘으며 운전해 온 남편한테 미안함한 느낌이 든다. 관광버스 운전기사도 아니고 잠든 가족 싣고 허허벌판을 혼자 달리려면 지루하다 못해 깜빡 졸음이 밀려오기까지 할텐데 아무래도 이쯤에서 자리를 바꿔 운전대를 잡아야겠다.
미국을 자동차로 여행하다 보면 제일 아쉬운 것이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파는 우동이다. 점심으로 국물 맛 시원한 우동 한 그릇 먹고 자판기 커피 한 잔 빼 마시면 정신도 바짝 나고, 어딘가로 떠나고 있다는 설렘이 좀더 확실하게 들 터인데 말이다. 우동은커녕 햄버거 하나 없는 그야말로 ‘쉼터’만 제공하는 미국의 휴게소에서 무얼 바라랴.
준비해 온 김밥과 과일을 펼쳐 놓으니 그런대로 쓸만 하다. 회색빛 서울에선 이렇게 바구니 들고 소풍 나오는 것만도 큰맘 먹어야 할 수 있는 일이었고, 게다가 진한 초록 잔디 위에 마구 자리 펴고 앉는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으니. ‘고속도로 휴게소 우동’의 미련은 버리고 지금 즐길 수 있는 것들에 감사하는 수밖에.
웰컴 센터 안내원에게 물어 보니 30마일 앞에서 시간 경계선을 지나게 된단다. 1시간을 벌게 되는 셈이다. 미국 동부에서 서부로 이동하다 보면 세 번의 시간 경계선을 만나게 된다. 때마다 1시간씩 시간을 벌면서 이동하는 셈이라 낯선 도시로 향하는 마음 한구석이 그래도 여유롭다. 반대로 돌아올 땐 1시간씩 잃어버리며 이동하게 되니 너무 늦지 않게 도착해야 한다는 조급증과 불안감이 들기도 하는 게 사실이다.
두 꼬마는 늘 그렇듯 휴게소에 비치된 각종 안내 책자를 잔뜩 꾸려 나온다. 알록달록 사진들이 실려 있는 작은 가이드북들은 심심한 차 안에서 얼마간은 좋은 놀이 도구가 되어 줄 것이다. 뒤에 앉아 둘이서 지도를 들여다보며, 사진들을 들척이며 재잘거리는 목소리는 앞 자리의 엄마 아빠에게도 여행의 흥을 더해 주곤 한다.
남편이 잠시 눈을 붙이는 동안 운전을 교대했다. 끝없는 옥수수 밭 사이를 가르는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시원하고 자유롭다. 곳곳에 멋진 풍경들이 펼쳐지곤 했지만 사진은 아쉽게도 포기해야 했다. 운전대를 잡고 느끼는 자유와 사진기에 담고 싶은 욕심. 둘 중 하나는 포기할 수 밖에 없는 법.
어느덧 안내 표지판에 세인트 루이스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끊임없이 펼쳐지던 들판과 옥수수밭도 끝나가고, 도로의 차선이 하나 둘 늘고 그 위로 차들도 조금씩 많아지고 이제는 도시로 진입했다. 아하! 그러고 보니 저 멀리 빌딩들 위에 걸쳐진 게이트 웨이 아치가 살짝 보인다.
“언니! 저기 봐봐! 저거 보여?”
“어디?”
“저~~~기! 저기 보이지?”
“아! 저거, 머리띠처럼 생긴 거?”
서부 개척정신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미국 내 조형물들 중 가장 높다는 게이트웨이 아치가 단숨에 ‘머리띠’로 정의되어버리는 순간. 흠…그러고 보니 딱 어울리는 표현인 것도 같다. 다섯 살, 여덟 살 딸아이들 눈에만이 아니라 내 눈에도 저건 영락없는 머리띠네. 온종일 11시간을 달려 다다른 곳, 세인트 루이스. 그 곳에서 처음 만난 건 다름 아닌 커다란 머.리.띠.
덧붙이는 글 | 지난 여름 17일간 7000마일을 달린 여행의 기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