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될 경우 지지자만의 대통령이 아니라 온 국민의 대통령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야 나라가 잘 되지 않겠습니까. 국민에게 기쁨을 주는 정부, 국민이 더 행복한 나라,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서 존경받는 품격 있는 국가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지난 8월 18일 대권도전을 선언한 유시민은 당찼다. 경기도 일산 킨텍스(KINTEX)를 가득 메운 그의 지지자들은 이에 대한 화답으로 손수 접은 '종이비행기'를 유시민을 향해 날렸다. 그동안 대권에 대해 말을 아껴온 그의 도전은 세간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유시민은 "오늘 구체적인 정책공약은 말씀드리지 않겠다"며, 선진통상국가, 사회투자국가, 평화선도국가 등 포괄적인 3개의 정책비전만을 제시했다. 초반부터 그의 행보는 구체적이기보다는 주로 자신이 범여권 경선에 '흥행카드'라는 점을 부각시키는데 주력했다. 8월 20일 울산강연을 시작으로 전국을 돌며 지지자 모임, 기자간담회 등을 벌이며 본격적인 대선레이스에 돌입한 그는 조금은 엉뚱한 정책공약을 제시하며, 다시 이슈의 중심에 선다. 바로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는 '멧돼지 공약'이다. "농촌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멧돼지들의 공격 때문에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제가 대통령이 되면 첫눈이 내리는 날 (대통령 긴급명령권으로) '공수부대'를 동원해 멧돼지들을 잡을 것입니다. 10% 정도는 부대에 넘기고 나머지는 도축해 양로원에 주거나 팔면 될 것입니다." 차라리 '희화화'를 위한 발언이었더라면 이해가 가겠지만, 유시민은 정색하며 자신의 구체적인 대권공약 중에 하나라며 자신 있게 말했다. '멧돼지 포획', '새만금 골프장 100개 건립' 공약은 지지자들도 고개 저음 논란이 일자 그는 "작년 10월 MBC 예능프로그램 <느낌표>의 '산 넘고 물 건너‘에 출연해, 전북 무주에 사는 한 할머니로부터 멧돼지 퇴치 민원을 받고 대책 수립을 약속한 내용"이라며, "멧돼지 소탕공약이 즉흥적인 공약이 아니라 국민과의 작은 약속도 소중히 여기는 준비된 공약"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조차 이 공약의 취지는 이해하나 실효성에 대해서는 고개를 저었다. 이어 유시민은 '새만금 골프장 공약'을 내세웠다. 2005년 열린우리당 당의장 선거 당시에 새만금 간척사업에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그가 발표한 정책공약에 사람들은 다시 한 번 머리를 갸우뚱 했다. "새만금의 물막이 완료되고 공사가 진행되어 되돌릴 수 없게 되었다. 진행된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 바탕 위에 전북의 발전과 대한민국 발전을 도모하는 새로운 대안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새만금에 '골프장 100개'와 함께 콘도, 마리나시설 등이 들어서는 레저 파라다이스를 조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공약이 발표되기가 무섭게 환경단체들은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의 대운하에 버금가는 환경 파괴 정책"이라며 강력 반발하고 나섰다. 그리고 지지자들 사이에서 "패착이 아니냐"는 반응까지 나오기도 했다. 범여권 친노진영의 한명숙 후보조차 지난 6일 <MBC 100분 토론>에 나와 "골프장은 이제 선진국에서도 사양스포츠다. 이런 스포츠 시설을 100개나 만드는 것은 시대적 발상에 뒤지는 공약이 아닌가"라고 반박했다. 즉흥적이고 조금은 엉뚱했던 대권공약을 내놓던 유시민에게 드리워진 불행한 징조는 지난 5일 국회 헌정기념관에 벌어진 대통합민주신당 예비경선에서 드러났다. 범여권 대선레이스의 ‘흥행카드’, 그리고 친노진영의 대표후보를 호언장담하던 유시민의 성적은 8명의 후보들 중에 같은 친노진영의 이해찬 후보(2709표, 14.4%)에 이은 4위(1913표, 10.1%)였다. 5명만이 본경선 후보가 될 수 있는 '컷오프'에 간신히 턱걸이 한 셈이다. 이후 손학규, 정동영 후보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인 친노진영의 표를 결집시키기 위해, 한명숙 후보가 주장했던 '친노후보 단일화 논의'는 급물살을 타게 된다. 하지만 유시민은 이해찬, 한명숙 총리가 주장하는 9월15일 제주·울산지역 경선투표 전 후보단일화를 이루자는 주장에 반박하며, 독자노선(15일 이후 후보단일화 논의)을 추구하게 된다. 첫번째 본경선 투표에서 친노진영의 유력 단일화 후보인 이해찬 전 국무총리보다 표가 많이 나올 경우 자신을 중심으로 한 후보 단일화가 가능할 것이라는 노림수 때문이었다. 갈 길 바쁜 유시민은 6일 <MBC 100분 토론>에 출연해 특유의 입심으로 유권자들이 눈길을 끌려 노력했다. 하지만 예전 토론무대에서 우리의 가슴을 뛰게 했던 유시민의 모습을 발견 할 수 없었다. 오로지 유력후보에 대한 네거티브 공세만 있었지, 유시민만이 보여줄 수 있는 미래비전은 없었다. 한명숙 후보의 '이해찬 지지 선언'은 유시민을 궁지로 몰아 결전의 순간인 제주·울산지역 본 경선을 하루 앞둔 14일, 한명숙 후보는 춘천에서 벌어진 대통합민주신당 비전창조릴레이에서 돌연 후보사퇴를 선언하며 친노후보 단일화를 위해 이해찬 전 국무총리를 지지하겠다고 발표한다. 갑작스럽게 직격탄을 맞은 유시민은 당황했다. 예비경선에서 친노진영 1위를 한 이해찬 후보에게 한명숙 총리의 표가 몰리면 첫 본경선의 고전을 물론 친노후보 단일화의 주도권을 빼앗길 것은 당연지사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5일. 2890표, 18.5%의 득표율을 받은 유시민은 4명의 후보 중 꼴지를 하며 고배를 마신다. 이어 그는 "우리의 꿈과 소망은 뜨겁고 높았으나 현실의 장벽은 우리 힘으로 건너뛰기 너무 높았다. 오늘 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대통합신당 후보가 정통성 있는 후보, 좋은 정책노선을 가진 후보, 경선 과정에서 진실의 이름으로 정정당당하게 반칙하지 않고 싸운 후보에게 모든 힘을 몰아주자"며 돌연 후보사퇴를 선언한다. 이날 그는 눈물을 흘렸다. 유시민이 흘린 눈물만큼 그동안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도 안타까운 마음을 거두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29일 간의 유시민의 대권도전은 '김빠진 맥주'처럼 우리에게 신선한 감동은 주지 못한 채, 맥없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대학시절 읽은 유시민의 저서 <Why not?>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모든 시대에는 현실의 권력과 결탁한 지배적인 사상과 이론 이데올로기가 존재합니다. 이는 인간의 상상력과 창의성에 고삐를 채우는 정신의 감옥입니다. 이 감옥 안에 머무르면 만사가 안전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발견의 즐거움과 자유의 환희를 맛보고 싶은 자는 먼저 문을 박차야 하며, 그 힘찬 발길질은 지배적인 사상의 도그마에 대한 반문, Why not?에서 시작됩니다." 유시민은 <한겨레>와의 인터뷰(9월 13일자)에서 국회의원, 보건복지부 장관시절 이라크 파병 및 한미 FTA 추진에 대한 입장을 다시 한 번 피력했다. "대통령이 욕 얻어 자시는데, 국회의원인 내가 모면하고 반대하는 건 옳지 않아 두 번째 파병연장 동의안은 찬성했으며, FTA 역시 처음에 중간수준에서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돼서 찬성했다"고 말했다. 그의 회고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진보진영을 대표했던 유시민은 기성정치권에 들어와서 소신보다는 권력을 향한 '충심'이 강했고, 누구보다도 신자유주의의 대변자였다. 그는 우리의 가슴을 뛰게 했던 예전의 '유시민'이 아니었으며, 그의 시대정신은 기억 속으로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리고 알맹이 없던 대선공약들…. 이에 대해 유권자들은 냉험한 심판을 내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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