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독재정권 당시 동백림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바 있는 세계적 작곡가 윤이상(1917~1995년)의 탄생 90주년을 기념하는 ‘윤이상 탄생 90주년 기념 2007 윤이상 페스티벌’이 9월 16일 오후 4시부터 약 2시간 동안 서울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는 윤이상의 부인인 이수자 여사가 참석한 가운데, 프란시스 트라비스(윤이상 구명운동 전개)의 지휘 하에 윤이상의 곡 <낙양>이 연주되고, ‘2007 국제 윤이상 음악상’의 대상 및 BMW 특별상 곡이 연주된 데 이어, 1985년생인 신예 첼리스트 고봉인(하버드대 생물학과 및 뉴잉글랜드 음악원 재학)과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협연으로 윤이상의 곡 <첼로 협주곡>이 연주되었다. 이 중에서 맨 나중 곡인 <첼로 협주곡>은 여러 가지 면에서 주목할 만한 곡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 문화성의 위촉으로 1976년 프랑스 뤼양에서 초연된 <첼로 협주곡>은, 첼리스트 윤이상이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악기가 바로 첼로였기에, 그의 정신세계를 비교적 잘 드러낼 수 있는 곡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음악이 담고 있는 메시지는 관객에 따라 혹은 때에 따라 각기 다르게 해석될 수 있지만, 이 곡은 ‘소멸되지 않는 도전의 미학’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곡이라고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곡은 잔잔함의 이미지로부터 출발한다. 마치 넓은 호수를 연상시키는 그런 잔잔함이다. 그런데 호수는 가만히 있지 않고 항상 무언가를 향해 도전적 물결을 일렁인다. 그 도전의 끝은 하늘을 향해 있다. 호수와 바다 사이에는 적막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팽팽한 긴장감이 존재한다. 이따금씩 호수는 이 적막을 뚫고 하늘에 대해 기습적 도전을 감행한다. 때로는 그것이 발전하여 전면적 전쟁으로도 확대된다. 호수의 물결은 꽝꽝 올라 이따금 하늘 언저리까지 도달한다. 그러나 그러한 전면적 전쟁이 호수에게 전면적 승리를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호수가 하늘에 영원히 오를 수 없듯이, 하늘에 대한 호수의 도전은 어쩌면 처음부터 승산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전면적 도전 다음에는 새로운 잔잔함이 이어지고, 전쟁의 여파 때문인지 호수에게는 기나긴 시련이 이어진다. 하지만, 하늘을 향한 호수의 도전은 한 번의 실패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끊임없이 시도된다. 이러한 도전이 호수에게 부분적이고 점진적인 승리를 안겨준다는 점은, 하늘의 옷자락에 조금씩 묻어 있는 물기에서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호수의 도전은 점진적이고 호수의 승리도 점진적이다. 그래서 그것은 소멸되지 않는 도전의 미학이라 할 만한 것이다.
‘소멸되지 않는 도전’을 메시지로 한 윤이상의 <첼로 협주곡>은 그가 살다 간 삶에 대한 성찰을 통해 보다 더 구체적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윤이상이 활동한 공간은 한반도와 유럽이었다. 시각을 한반도에 국한시킬 경우, 그와 특별히 관련된 특징적인 역사경험이라면 일제식민통치와 개발독재정치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기간에 윤이상을 포함한 한반도 민중들이 경험한 것은 일종의 부자연스러움이었다. 한 기간에는 외래 종족에 의해 민족적 자율권이 억압되는 상황 속에서 언어마저 남의 것을 구사해야 하는 강제가 가해졌다. 또 한 기간에는 군부 쿠데타 세력이 분단과 냉전을 심화시키는 상황 속에서 자기 땅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게 하는 강제가 가해졌다. 하고 싶은 언어를 구사할 수 없고 가고 싶은 데를 갈 수 없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움을 저해하는 악이었다. 그런 악에 맞서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것은 윤이상에게는 선이었다. 악에 맞서 선을 추구하는 것이기에 윤이상의 도전은 확신과 신념에 찬 것일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윤이상에게 있어서 자연스러움이란 대자연과 자신의 합일을 이룩할 수 있는 방도였다. 대자연의 일원인 존재가 대자연과 합일을 이룩할 수 없다면, 그것은 대자연으로부터의 분리라는 끔찍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정치권력이 강제하는 부자연스러움에 구애받지 않고 대자연의 자연스러움에 도달하기 위한 도전에 나서게 되었다. 자연스러움을 얻기 위한 그의 도전이 결코 중단된 적이 없기에 그것은 ‘소멸되지 않는 도전의 미학’이라고 불릴 만한 것이다. 일제식민당국이 일본어를 쓰라고 억지로 강요하는데도 그는 한글 가사에 곡을 붙였다. 그것이 발각되어 한때 구속을 당하기도 했다. 내 혀에서 자연스러운 언어를 구사할 수 있을 때에 인간은 비로소 자연스러움을 얻을 수 있다. 복잡한 정치논리를 떠나 그는 그런 자연스러움을 얻기 위해 일제의 강제를 무시했을 뿐이다. 다른 역대 정권도 그러했지만 정통성 없는 개발독재정권이 남북교류를 특히 더 심하게 차단하는데도, 그는 1963년에 ‘제 마음대로’ 북녘 땅을 밟았다. 죽마고우를 만나고 또 강서고분을 구경하고 싶어서였단다. 자신에게 가해지는 부자연스러움을 잠시 무시했을 뿐이지만, 그는 이로 인해 정권에게 납치되어 사형 구형을 받는 크나큰 시련을 겪기도 했다. 위와 같이 윤이상은 인간으로서 언제나 자연스러움을 희구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현실의 정치권력은 자기 통치범위 안에서 그런 자연스러움이 향유되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기에 윤이상을 포함한 민중들에게 끊임없는 강제를 가했고, 그에 대한 반응으로 윤이상은 다른 민중들과 마찬가지로 일제와 개발독재정권에게 끊임없는 도전을 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감히’ 자연스러움을 추구한 데 대해 정치권력이 가한 형벌은 무서운 것이었지만, 그에게는 인간이 대자연의 일원으로서 기본적인 자연스러움을 향유할 수 없다는 것 자체가 구속이나 사형보다도 더 무서운 형벌이었다. 그래서 그는 현실 정치권력에 아랑곳없이 또 한두 번의 시련에도 낙담하지 않고 계속해서 도전의 길을 걸어 나갔다. 그는 하늘을 향해 물길을 내뿜는 호수 같은 존재였다.
첼로 협주곡에서 약 40분간 은은히 그러면서도 힘 있게 울려 퍼진 윤이상의 메시지는 바로 그런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결코 소멸되지 않는 도전의 미학. 자신의 삶을 완성시키기 위해 소멸되지 않는 도전을 계속할 필요가 있다는 점은 비단 윤이상에게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그것은 한반도에 사는 각 개인뿐만 아니라 집단으로서의 전체 민중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윤이상에게 고난을 주었던 일제식민당국과 개발독재정권은 이미 물러갔다. 그래서 오늘날 한반도 민중의 삶은 그때보다는 훨씬 더 향상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반도 민중의 삶은 여전히 부자연스럽기만 하다.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평등, 정치적 자유, 민족적 자존이라는 측면에서 부자연스러움에 허덕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하루 종일 열심히 일을 하면서도 안정된 직장은 물론 내 집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고, 또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헌법 제3조)고 했는데도 임진강 이북으로는 마음대로 다닐 수 없으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헌법 제1조)고 했는데도 한국인이 아닌 미국인들이 한국의 운명을 결정하고 있다. 복잡한 논리를 떠나서 이런 모든 것들은 한반도에 사는 인간의 삶을 부자연스럽게 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그러한 부자연스러운 삶은 인간과 대자연의 합일을 방해하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인간의 인격적 완성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다. 윤이상에게 부자연스러움을 준 일제와 개발독재정권이 물러간 지 이미 오래인데도, 한반도 민중들이 여전히 경제적·정치적·민족적 부자연스러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은, 이 땅에서 아직도 개발독재정권의 잔존세력이 여전히 강력한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부자연스러움을 만들고 그로부터 이익을 얻는 세력이 존재하고 있기에, 한국 민중들은 여전히 자연스러움을 향한 투쟁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사회의 진보를 위한 도전은 개발독재세력의 잔당들을 향해 칼날을 겨눌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자연스러움을 향한 한국 민중의 투쟁은 단순히 개발독재세력을 모두 물리치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개발독재세력이 모두 물러간 뒤에는 새로운 반동세력이 출현하여 민중의 자연스러운 삶을 또다시 방해하려 할 것이다. 그래서 이 투쟁은 ‘소멸되지 않는 도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금년 11월까지 서울·평양·부산·베를린 등지에서 저 하늘을 향해 울려 퍼질 윤이상의 음악이 퍼뜨리는 메시지 중 하나는 바로 그것이다. 인간이 자연스러움을 통해 대자연과의 합일을 이루려면, 당장의 작은 승리에 만족하지 말고 영원히 도전하고 쉼 없이 싸워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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