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사건을 고르라면 역시 '사도세자 폐사 사건'입니다. 일국의 세자가, 그것도 아버지에 의해 쌀궤짝에 갇혀 죽은 것입니다. 세자의 품위에 걸맞지 않은 아주 비참한 죽음이죠.
이 사건을 후세에 가장 명확히 전해주는 사료는 역시 <한중록>입니다. 사도세자의 아내 '혜경궁 홍씨'가 한글로 저술한 책입니다. 가장 가까이서 사건을 지켜본 사람의 기록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널리 전해진 사료입니다.
하지만 이 <한중록>은 자세히 뜯어보면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조선의 역사에 걸쳐 가장 영특한 임금 중 1명으로 평가받는 영조, 그리고 어릴 때부터 신동의 자질을 발휘했다는 사도세자. 이 부자가, 사도세자가 점점 머리가 커짐에 따라 일종의 '정신병 촌극'을 벌였다는 것입니다.
<한중록>을 잘 보면 영조는 '치매노인' 쯤으로 그려지며, 사도세자는 조울증과 편집증 등 다양한 정신병 질환에 시달리는, 말 그대로 '정신질환자'입니다.
혜경궁 홍씨에 따르면, 조선 후기 르네상스의 기초를 닦은 임금 영조가 시종일관 콤플렉스가 범벅이 된 성격이상자였으며 치매노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정신병에 시달리는 부자에 의해 조선 후기 르네상스의 기초가 시작됐다는 것입니다. 너무 극단적입니다.
사학자 이덕일은, 혜경궁 홍씨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사도세자의 비극'에는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정치논리가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저 유명한 '예송논쟁'과 '장희빈'을 기억하면 이 주장이 일리있다는 판단도 들 것입니다. 앞서 벌어졌던 '예송논쟁'과 '장희빈' 모두 당파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엇갈린 정치적 사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도세자 '왜' 죽었을까영조의 배다른 형 경종은, 과거에 자신의 어머니 '장희빈'을 죽이는 데 앞장선 집권당 노론을 일시에 몰아낼 기회를 노리던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합니다.
곧바로 '독살설'이 제기됐고, 주범으로는 노론과 노론이 임금으로 밀던 '연잉군(영조)'이 지목됩니다. 연잉군은 배다른 동생으로, 자식이 없던 경종이 사망할 경우에는 왕위계승 1순위였던 왕세제였던 것입니다.
'경종독살설'은 당시에 전방위적으로 펼쳐진 의혹이라고 합니다. 성벽과 마을에는 온갖 '괘서'가 붙여졌었고, 소론 계열의 이인좌는 경종의 위패를 들고 반란까지 일으킵니다.
총체적인 위기였죠. 역사적으로, 영조는 이때부터 '탕평책'을 주장합니다. 자신의 원수나 다름없던 소론도 조정에 기용하면서 노론과 소론의 조화를 추진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왕이든 뭐든 자신을 충실히 지지할 수 있는 집단을 편애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조는 왕이지만 그 역시 사람입니다. 게다가 배다른 형을 독살했다는 소문에 노론이같이 연루됐기 때문에 심리적인 공감대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세자는 바로 아버지가 연루된 '큰아버지의 독살설'을 거론하며 대들었다가 비참하게 죽었다는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사도세자는 소론 계열 선비들에게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노론이나 영조로서는 그를 좌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결국, 자신의 아버지에 의해, 노론의 중진이었던 자신의 처가가 앞장서면서, 그리고 자신보다 친정을 더 따르던 아내 혜경궁 홍씨의 방관 아래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의 한을 기억하는 이는 단 한 명, 바로 11살의 나이로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세손 '산(?)'이었습니다.
비극적인 어린 시절, 위태로웠던 즉위 과정노론으로서는 당연히, 세손의 즉위를 막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옵니다. 왕위에 즉위해서 아버지의 복수를 하겠다고 벼르면 꼼짝없이 죽어야 할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손은 심지어 궁궐을 넘어들어오는 자객까지 맞이하는 등 극단적인 처지에 빠집니다.
주변에는 누구도 도울 사람이 없었습니다. 외할아버지의 동생 홍인한마저도 폐세손을 주장했고, 고모 화완옹주는 양자 정후겸의 왕위 즉위를 추진하면서 역성혁명까지 꿈꿉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혜경궁 홍씨가 '모정(母情)'은 잊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아들만큼은 철저히 보호했으며, 기어이 왕위에 오릅니다. 하지만 영조가 일찍이 잃은 아들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됨으로써 즉위한 정조는, 10여년을 참았던 한 마디를 내뱉는다고 하죠. 아주 비장합니다.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로다."결국 선전포고였습니다. 정조와의 개인적인 원한을 차치하더라도, 영조의 편애 아래 수십년을 독주했던 노론은 정치적으로도 경장(개혁)의 대상이었으며, 조선 팔도에 걸쳐 어디에든 그들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전방위적으로 힘을 과시하는 구체제는 제 아무리 왕이라 할지라도 쉽게 타파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가장 결정적으로 자신을 방해할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 역시 노론 중신 가문의 딸이었기 때문에 사이가 좋을 리는 결코 없었던 것입니다.
드라마 <이산>이 다룰 이야기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누구보다 비극적인 성장기를 보냈고, 어렵게 왕위에 즉위해서도 평생을 구체제와의 갈등으로 소모한 '정조'의 이야기죠.
<이산>, <한중록>과 <사도세자의 고백>의 타협"사도세자는 당쟁의 희생양"이었다는 주장은, 이덕일의 <사도세자의 고백>을 통해 구체적으로 거론됩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덕일은 <한중록>에 대한 전면 비판으로 색다른 시각에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다룹니다.
<이산>은 1, 2회에 걸쳐 사도세자의 죽음을 다뤘습니다. 정조를 이야기하자면 빼놓을 수 없는 장면이죠. 하지만 <이산>은 '타협'을 추구합니다. <이산>에서는 사도세자가 왜 쌀궤짝에 갖혔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산>의 홈페이지에 공개된 '등장인물의 관계' 등에 대한 설명에서, <이산>이 어떻게 '타협'했는지는 잘 드러납니다.
먼저, 앞장서서 '폐세손'을 주장했던 홍인한이나 화완옹주, 그리고 정후겸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대결구도'를 굳혀놨습니다. 하지만 가장 예민한 '혜경궁 홍씨'나 '홍봉한'에 대해서는 역시나 <한중록>을 따른 것 같았습니다.
그들의 역할이 구체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누구보다 중요할 이 캐릭터들은 존재감도 희미하며, 어딘가 어색합니다.
물론 그네들에게도 "세손이라도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홍인한의 적극적인 움직임을 사실상 방치했던 점으로 봐서는 그네들 역시 최소한 사도세자의 죽음에 있어서는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손댄 일이 자신의 외할아버지와 작은 외할아버지를 각각 귀양보내거나 사약을 먹인 일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홍봉한 역시 뭔가 모종의 역할을 했던 것을 유추할 수도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친정을 지키려는 혜경궁 홍씨와의 정조의 갈등 역시 만만치 않았다고 하는데, 이쯤 되면 우리는 역시 그동안 계유정난이나 중종반정을 다룬 사극에서 느낀 역사의 교훈을 한번 더 느끼게 됩니다.
"권력은 피도 눈물도 없습니다"<이산>도 팩션 사극<이산>도 팩션 사극을 표방합니다. 정조의 그림자처럼 그려질 '박대수'나 성장과정이 기록되지 않은 정조의 후궁 의빈 성씨 등이 정조가 세손이었을 당시에 인연이 이어져 삼각관계를 이룬다는 식의 이야기가 추가된 것입니다.
물론, <이산>의 팩션은 실록에 기록된 인물의 탄생시기까지 조절한 <왕과 나>와는 달리, '고증'을 중시하는 일부 시청자들의 반발을 살 우려는 적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정사에 기록된 틀 자체가 바뀔 정도의 '팩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팩션'보다 중요하게 여겨야 할 점이 있다면 이순재의 '영조' 연기일 것입니다. 사도세자 폐사 당시 그는 이미 일흔에 가까워졌고, 40년 가까이 왕위를 지킨 대정객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산>에서 신하들이 감히 대꾸조차 못할 정도로 엄격한 임금으로 그려지는 모습이 일리가 있는 것입니다. 정치밥 40년이라. 게다가 자신을 둘러싼 "배다른 형을 죽였다"는 소문과 그로부터 촉발된 역모까지 제압한 입지전적인 임금입니다.
<이산>에서 그가 왜 사도세자를 죽였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의 묘사가 궁금해지는 일면도 있습니다. <한중록>에서는 사도세자 폐사 이후의 영조를 철저하게 치매노인으로 묘사합니다.
하지만 민감한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피했기 때문에 <이산>으로서는 묘사의 폭을 넓힐 수 있다는 효과를 얻었습니다. <거침없이 하이킥>으로 더 확실한 탄력을 얻은 이순재의 노장 연기를 기대해볼 수 있는 여지도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재미있는 것은, 실제로 정조의 최대 적수였던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가 사라지고, 최석주라는 가공인물이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영화 <영원한 제국>을 보신 분이라면, 최종원이 기가 막힐 정도로 연기한 심환지의 이미지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바싹 마른 노인 이미지의 '심환지'가 풍체 넉넉한 중견연기자 조경환을 만나 전혀 상반된 캐릭터 '최석주'로 변신한 것, 어떤 의도일지는 모르겠습니다. 꽤 궁금해집니다.
비극의 임금, 왜 호기심이 느껴질까<왕과 나>에서는 '예종독살설'을 묘사하면서, 그리고 선대의 공신들에 둘러싸인 성종을 그리면서 구체제와 싸우려다 실패하거나 좌절하는 임금의 초상을 그려나갑니다.
이런 식의 이야기는, <용의 눈물>이나 <장희빈>과 같이 임금의 절대적인 힘을 이야기하던 지난 10년간의 사극 패턴과는 또다른 이야기 구도입니다.
'왕'이라는 인물의 오래된 인식에서 벗어나 보다 섬세하면서도 고뇌에 휩싸이는 '인간'을 더 주목하는 경향이 통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죠. 이미 종영된 <한성별곡-정>도 '경장'을 주도하면서 사실상 좌절하는 정조의 내면을 잘 드러냈던 적이 있습니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연개소문>과 같이 절대권력자를 묘사한 사극이 유행했고, <주몽>이나 <대조영> 같은 창업군주를 다룬 사극이 유행했다는 것을 기억해본다면 이건 또다른 변화라는거죠. 사극, 이렇게 점점 섬세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미디어다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