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보행자 통행체계에 관한 문제가 쟁점화되는 것 같다. 지난 7월 10일 송파구는 서울특별시 최초로 안전도시 공인을 앞두고 '송파구, 이제는 우측보행'이라는 보도자료를 냈고, 9월엔 건설교통부가 우측통행 타당성조사에 들어가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최근 이 사안은 논술 주제로도 자주 등장한다.
보행자 우측통행을 지지하는 이들은 '일제 시대의 악습' '지하철역 개찰구와 공항 출입문 등 실제 생활에선 우측 통행' '외국의 경우 대부분 우측통행' '대부분 사람이 오른손잡이' '보도 내에서 차와 마주보고 걸어갈 경우 피하기 쉽다' 등 이유를 내세웠다.
과연 그럴까?
일제 잔재? 왜 감정을 앞세우나 우리나라는 1906년에 처음 우측통행이라는 통행체계를 마련했다. 이후 일본 정부는 자국과 같은 도로통행체계를 만들기 위해 1921년 조선총독부령에 의해 우측통행에서 좌측통행으로 바꾼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보행자 좌측통행은 그대로 두고, 차만 우측통행으로 통행체계가 바뀐 이후 현재에 이른다.
즉 해방 이후 차의 통행방향을 바꾸면서 일제 강점기 시절 통행체계를 완전히 뒤집었다. 그런데 우측보행을 주장하는 이들은 차의 통행방향이 바뀐 것에 대해선 전혀 주목하지 않고, 보행자 통행방향이 같은 것만 문제삼고 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사람과 차의 통행방향이 같았다면, 해방 이후엔 달라졌다. 지금 우측통행을 하자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일제강점기 시절로 돌아가자는 것이나 다름없다.
현재 일본 통행체계는 '차량은 좌측통행'을 하도록 한다(우리나라와 반대다). 보행자 통행에 대해서는 도로교통법 제10조에서 도로 우측으로 하도록 정하고 있다.(위험한 경우에만 좌측 가장자리를 통행하도록 하고 있다.)
보행자 통행체계가 반드시 좌측통행이어야 한다는 강제규정은 우리나라 법에 없다. 다만 도로교통법 제8조 제2항에서 보행자 통행을 정하면서 '보행자는 보도와 차도가 구분되지 아니한 도로에서는 도로의 좌측 또는 길가장자리구역으로 통행하여야 한다'고 함으로서 '보도와 차도가 구분되지 아니한 도로에서는 좌측통행 또는 길가장자리구역을 통행'하도록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임기응변적 발상에 원칙이 무너진다 대부분 초등학교에서는 보행자 안전을 위해 도로를 통행하는 경우 좌측통행을 생활화하도록 하고 있다. 좌측통행을 습관화하는 방법 중 하나로 교사(校舍) 복도 가운데 화분 등을 두고 나눠, 학교생활 중 좌측 통행을 몸에 익히도록 하고 있다. 필자 역시 우리 아이들이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그런 광경을 본적이 있다.
이렇듯 학교에서는 좌측통행을 하도록 교육하지만 교문 밖을 나서면 상황이 바뀐다. 교문을 나서서 도로를 건너야 하는 경우 아이들은 횡단보도를 이용한다. 횡단보도를 이용하는 아이들은 횡단보도 우측부분을 이용한다. 횡단보도에서는 오른쪽을 이용하는 것이 우측통행을 하는 차들로부터 조금이라도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안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횡단보도를 이용하는 보행자 안전 조치로 횡단보도 예고표시, 일시정지선, 볼록 사다리꼴 과속방지턱 등 이중 삼중의 안전장치가 돼 있다. 이런 시설들을 제대로 활용하고 지킬 생각을 하지 않고, 오른쪽으로 바꾸자는 것은 임기응변적인 발상이다.
다음은 각 사례별로 보행자 좌측통행이 왜 타당한지 살펴보겠다.
① 보도-차도 구분 안된 일반도로에서 차와 보행자의 통행
현행 법률에서 보행자는 좌측으로 다니거나 길 가장자리 구역을 쓰도록 하고 있다. 보행자가 좌측통행하는 경우 차와 보행자는 서로 마주보는 상황에서 통행이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차 운전자와 보행자는 서로에 대한 예측이 가능하다. 차 운전자가 부주의한 행위 등으로 보행자 안전을 위협하는 경우에도 보행자는 빨리 대처할 수 있다.
차와 보행자 모두 우측통행체계로 하는 경우 차와 보행자가 같은 방향으로 통행하게 된다. 이 경우 차 운전자는 앞서 가는 보행자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어 항상 불안한 상태에서 운전할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보행자가 예기치 못한 행동을 하는 경우 보행자와 마주보고 있을 때보다 대처능력이 떨어진다. 보행자 역시 뒤쪽 상황에 대해 알 수 없기 때문에 항상 불안한 마음으로 통행하게 된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예기치 못한 행동을 하는 경우 뒤쪽에서 오는 차에 부딪칠 수 있는 상황이 쉽게 일어날 수도 있다. 우측통행은 차 운전자와 보행자 모두에게 장점보다는 많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요인을 가진 통행체계이다.
② 자전거보행자겸용도로에서 자전거와 보행자의 통행
일반도로에서 떨어져 있으면서 자전거와 보행자가 함께 이용하는 자전거도로에 관한 문제다. 자전거는 '차'다. 그래서 보도와 차도가 나눠지지 않은 도로에서 차(자전거 포함)와 보행자의 통행체계와 같이 자전거는 우측, 보행자는 좌측으로 통행하여야 한다. 그것이 현행제도이고 자전거운전자와 보행자는 편안하고 안전하게 통행할 수 있다.
일부 둔치 자전거도로에선 같은 방향(자전거와 보행자 모두 우측통행)으로 통행하도록 노면표시를 하고 있다. 자전거도로 폭이 좁기 때문에 취한 조치라고 한다.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도로 폭이 좁기 때문에 마주보고 통행해야 안전하다.
간혹 자전거는 우측, 보행자는 좌측으로 통행하는 경우 자전거와 보행자가 서로 부딪히기 때문에 같은 방향으로 다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여기에서 좌측은 도로 끝단(보행자 통행 공간)이지만, 자전거 통행 공간은 도로 중앙 기준 우측이다(이 대목을 잘 이해해야 한다).
일반도로와 나눠진 자전거도로 양측에는 0.2m의 갓길을 만들도록 하고 있다. 자전거도로 폭은 1.1m로 정해져 있지만 둔치지역 등에 만들어진 자전거도로 폭은 규정보다 훨씬 넓다.(대부분 자전거도로의 차로 폭을 1.1m 이상으로 하고 있음).
그러므로 자전거가 통행할 수 있는 우측 한계선은 갓길에서 자전거도로 안쪽이다. 또한 보행자가 통행하여야 하는 좌측 한계를 자전거도로 갓길을 기준으로 한다면 우측통행하는 자전거와 좌측통행하는 보행자는 마주치지 않을 만큼 충분한 공간을 얻을 수 있다.
③ 횡단보도에서 보행자 통행 횡단보도는 보행자 통행이 많은 곳에 설치한다. 횡단하는 도로 폭이 4미터 미만일 경우에는 통행방향을 그리지 않지만, 4m가 넘을 때는 방향표시를 해야 한다.
통행방향은 화살형태 노면표시로 횡단보도 우측에 그리도록 하여 횡단보도에선 우측통행이 원칙임을 알 수 있다. 학교주변이나 보행자 보호 등을 위해 차 속도를 시속 30킬로미터 이하로 묶어야 하는 도로에서는 횡단보도를 노면보다 높게 하여 운전자의 시선을 끄는, '블록사다리꼴 과속방지턱' 형태의 고원식 횡단보도를 설치하도록 하고 있다.
횡단보도가 있는 경우 횡단보도 50~60m 앞 노면에 횡단보도 예고표시를 한다. 또한 횡단보도 바로 앞에는 정지선을 만든다. 도로교통법 제27조 제1항에서는 횡단보도를 이용하는 보행자 안전을 위해 '모든 차의 운전자는 보행자가 횡단보도를 통행하고 있는 때에는 그 횡단보도 앞(정지선이 설치되어 있는 곳에서는 그 정지선을 말한다)에서 일시 정지하여 보행자의 횡단을 방해하거나 위험을 주어서는 아니 된다'고 정하고 있다.
횡단보도 앞에서 반드시 잠깐 멈춰야 한다는 것은 우리의 약속이다. 그 약속을 의심하여 횡단보도 안에서 우측통행을 하도록 하는 것은, 횡단보도 앞에서 일시 정지해야 한다는 규정을 믿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 약속이 무너지면 도로교통법의 여러 규정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우측통행을 하도록 하는 게 아니라, 차가 반드시 횡단보도 앞에서 잠깐 멈추도록 하는 게 원칙이다. 그리고 그 원칙을 보행자들이 믿게 해야 한다. 이것이 법을 믿을 수 있도록 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④ 보도에서 보행자통행 "좌측보행 시에는 사고 위험이 훨씬 더 높습니다. 보도에서 좌측보행을 하면, 우측으로 진행하는 차량을 등지게 되어 달려오는 차량을 볼 수가 없고 운전자와 보행자가 서로의 진행방향을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우측보행을 하게 되면 달려오는 차량을 마주 볼 수가 있어 사고를 훨씬 줄일 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2005년 이후 발생하는 보행 교통사고 중 좌측보행 즉, 차량을 등지고 걷다가 발생한 사망률이 차량을 마주보고 우측보행을 하다가 발생한 사망률보다 1.6배 높게 통계수치가 나타납니다." 우측보행을 하여야 하는 이유로 제시된 내용의 일부이지만, 오히려 좌측통행의 필요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좌측보행과 우측보행에 대해 제안자조차 헷갈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장하는 내용을 보면, 통행 장소는 보도로 하면서 위험상황은 보도와 차도가 구분되지 아니한 일반도로에서의 상황을 예로 하고 있다.
도로에서 보도(步道)는 보행자 전용공간이다. 보도는 차와 보행자가 함께 이용하는 공간이 아니라 차도와는 구분된 별도 공간이다. 보도를 이용하는 보행자가 차도 상황에 대해 부담을 갖고 다닌다면, 그 보도는 보도 기능을 잃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경우라면 보도 지정을 없애든지 새로 시설을 만들어야 한다.
우측통행 차량 때문에 보도에서 보행자 통행방법을 논한다는 것은 소모적이다. 보행 교통사고 중 우측보행보다 좌측보행 중에 사망률이 높다는 통계의 발생 장소가 보도인지, 차도와 보도가 나눠지지 않은 도로인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지속가능한 통행체계가 필요하다 우측보행 제안자들은 '일제강점기에 실시된 제도' '인간의 신체발달상 우측보행 편리' '대부분 관련시설들이 우측보행체계에 맞게 설치' '세계 기준' 등의 이유를 내세운다.
재차 강조하지만 우리나라 현행제도에는 좌측보행을 해야 한다는 강제규정은 없다. 다만 보도와 차도가 구분되지 아니한 일반도로에서 보행자의 안전을 위해 도로의 좌측 또는 길 가장자리구역을 통행하도록 규정한다. 여기에서 보행자의 좌측통행을 규정한 것은 도로에서 우측통행을 해야 하는 차의 통행체계 때문이다.
일제에 의해 강제적으로 만든 규정이라기보다는 산업발전에 따른 다양한 교통요소들의 변화로 이해하여야 한다. 일본의 경우 보행자의 통행체계가 우측인 것은 도로에서 차의 통행체계가 좌측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나 일본 모두 보도가 없는 도로 즉, 차와 보행자의 만남이 상존하는 이면도로 등에서 보행자 안전과 운전자의 편의를 위해 차와 보행자가 서로 마주보고 통행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도로교통에서 통행체계를 구축하는데 있어 차의 통행체계를 바꾼다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 그러므로 차의 통행체계를 기준하여 보행자의 통행체계를 마련하는 것이 순리이다. 신체적 특성·습관·편의 등도 고려되어야 하겠지만 안전과 원칙을 우선하여야 하며, 도로교통 이외의 모든 보행공간에서의 보행체계도 가능한 도로에서의 통행체계와 일관성 있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결론적으로 앞의 언급한 요건들을 만족하는 보행자의 통행체계는 좌측보행이다.
덧붙이는 글 | 오수보 기자는 사단법인 자전거21 사무총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