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억만은 제일 뒤에서 화승총을 손에 움켜준 채 조심스럽게 일행을 따라갔다. 청안은 행여 놓칠세라 김억만의 옷자락을 잡은 채 따라오고 있었다. 사방에 늘어선 침엽수림은 우뚝 선 장승들처럼 괴괴하게 열 세 명의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구조다 일행은 침엽수림에 들어서서도 한참동안을 걸어갔고 그 동안 김억만은 짐승들의 배설물 따위를 볼 수 있었다. 이를 무시하는 것으로 보아 사구조다의 목적이 사냥이 아님은 너무나 자명했다. ‘뭘 어쩌자는 거야.’ 김억만은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뒤를 따랐다. 숲을 벗어나서 넓은 길이 두 갈래 나왔고 그곳에서 사구조다는 멈추어 섰다. 김억만은 화승총을 꽉 움켜잡았지만 장전을 하지 않은 화승총은 몽둥이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사구조다는 청안의 앞에서 김억만이 알아들을 수 없는 청국어로 말을 늘어놓았다. ‘이 여자는 귀머거리라 들었는데 말을 해서 뭘 하겠다는 거야.’ 사구조다의 말은 계속 이어지다가 손으로 두 갈래의 길을 번갈아 가리켰다. 청안은 가만히 사구조다를 지켜보고 있다가 불현듯 김억만의 손을 잡아끌더니 북쪽으로 향하는 길로 가기 시작했다. “어, 어 왜 이래?” 당황한 김억만은 사구조다를 보며 청안에게 이끌려 뒷걸음질을 쳤다. 그 순간 사구조다의 입에서 또렷한 조선말이 튀어 나왔다. “이봐 조선 포수! 그 여자에게 이끌려 가지마라!” 김억만은 자신을 잡아끄는 청안의 손길을 잡으며 사구조다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지 제대로나 알려 주시오! 남녀 관계가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아무 상관없는 사람까지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 대장부가 할 짓이오?” “난 자네를 곤란하게 할 마음이 추호도 없네. 그러니까 그 여자만 놓아주면 되네.” 김억만은 자신의 손을 여전히 끌고 있는 청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김억만의 눈은 청안의 눈 속에 깊숙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청안의 눈 속에는 고요한 호수가 담겨 있었다. 그 호수에는 다소곳이 서있는 청안의 모습이 있었고 김억만은 다시 그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속에는 죽음과 증오, 공포가 있었고 이를 지나가자 다시 고요한 호수가 펼쳐지며 평온이 찾아왔다. 청안의 눈이 깜박이는 순간 김억만은 제 정신을 찾을 수 있었다. “그 여자만 놓아주면 되네.” 사구조다의 말이 김억만의 귓속에서 왱 하니 울렸고 김억만은 청안의 손길을 확 잡아채며 청안이 가고자 했던 길로 가기 시작했다. “어이 조선포수! 이러면 내가 너희들을 해치게 될지도 몰라!” 김억만이 멈칫 서더니 잠시 후 몸을 돌리자 총알을 장전한 화승총 총구가 사구조다 일행에게로 겨누어졌다. “이백 보(步) 정도는 물러나는 게 좋을 거요.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둘 셋은 저승길 동무로 삼을 수 있수다.” 김억만의 실력을 아는 사구조다와 청나라 병사들은 함부로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청안은 뒤를 돌아보고 있는 김억만의 옷깃을 끌어갔고 그렇게 김억만은 알 수 없는 곳으로 향하게 되었다. “너희들은 모두 배로 돌아가라. 난 저 자들을 뒤쫓겠다.” 사구조다의 결정에 깜짝 놀란 청나라 군관 하나가 그를 수행하겠다고 나섰지만 사구조다는 끝내 이를 물리쳤다. 사구조다는 김억만과 청안이 멀어져간 곳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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