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다가스카르는 온통 프랑스어 천지다. 지방으로 내려올수록 그런 인상이 강한 것 같다. 그런 점은 마나카라도 마찬가지다. 거리에는 프랑스어 간판이 많고, 식당의 메뉴판도 프랑스어뿐이다. 내가 머물고 있는 작은 호텔의 주인도 프랑스인이고, 호텔 맞은 편에 있는 식당의 주인도 프랑스인이다.
그러고 보니 이살로에서 묵었던 호텔의 주인도 프랑스인이었다. 모두 조금은 나이 들어 보이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마다가스카르에서 은퇴 후의 삶을 보내고 있는 모양이다. 사실 마다가스카르라는 섬은 돈 있는 프랑스인들이 머물기에 좋은 곳이다. 파리에서 직항이 있는데다가 프랑스어가 기본적으로 통하는 곳이다.
마다가스카르에서 은퇴 후의 삶을 보내는 사람들 물가와 인건비가 싸기도 하다.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던 곳이라서 프랑스식의 법과 제도가 남아 있는 곳이다. 이곳 현지인들은 워낙 온화하고 순박하기 때문에 좀처럼 범죄가 발생하지 않는다. 돈이 좀 있는 프랑스인들이라면, 이런 곳에서 식당이나 호텔을 차려서 제2의 인생을 살기에 적당하지 않을까?
물론 어느 정도 불편한 면은 있을 것이다. 지방으로 내려오면 전기의 보급이 원활하지 않고 우기 때는 엄청난 비 때문에 고생하기도 한다. 휴대폰이 어디서나 시원하게 터지는 것도 아니고, 인터넷 서비스는 느리기만 하다.
그렇더라도 이 마다가스카르라는 섬은 이런 불편을 감수할 만큼의 매력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거친 자연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면, 거미를 포함한 각종 절지동물과 도마뱀을 싫어하지 않는다면, 이 섬은 그런 프랑스인들이 은퇴 후의 삶을 즐기기에 적당한 장소처럼 보인다.
"인도양과 모잠비크해협은 많이 달라."이살로에서 만났던 한 외국친구가 했던 이야기다. 다르긴 다르다. 무릉다바에는 축구장만큼 넓은 모래사장이 있었다. 그리고 낮 시간 동안에는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과 따가운 햇볕이 있었다.
마나카라는 그렇지 않다. 모래사장도 그다지 넓지 않고, 건기인데도 흐린 날이 이어진다. 축구를 하는 아이들 대신에 물장난을 하는 아이들이 있고, 일몰 대신에 일출을 볼 수 있다. 같은 점도 있다. 바다 멀리 탁 트인 수평선과 파도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이지만, 처음에 마다가스카르에 상륙한 사람들은 1500년 전의 폴리네시아인들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들이 이 섬에 상륙했다면 그 장소는 아마도 마다가스카르의 동쪽 해안이었을 것이다. 그 최초의 장소가 어디였을까. 마나카라였을 수도 있다. 아니면 북쪽의 타마타브이거나 좀 더 남쪽의 포르도팽이었을 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건, 그들은 이 섬에 발을 디딘 최초의 인간이었다. 당시 이 섬에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개발되지 않은 자연이 있었을 것이다. 수많은 여우원숭이는 물론이고, 지금은 멸종해버린 피그미하마, 코끼리새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 태고의 자연을 보면서 가슴 벅차했을지 모른다. 자신들이 새로운 신천지를 찾았다고, '잃어버린 세계'를 발견했다고 기뻐하지 않았을까.
고장으로 취소되어버린 정기여객열차
마나카라에서 이틀 밤을 보낸 나는 금요일 아침에 피아나란츄아(피아)로 돌아가기 위해서 짐을 꾸렸다. 원래 금요일은 마나카라에서 피아로 가는 정기 열차가 있는 날이다. 그런데 무슨 일 때문에 그 열차편이 취소되었다고 한다. 예정대로라면 목요일, 그러니까 어제저녁에 열차가 피아에서 도착했어야 한다. 그랬다면 오늘 그 열차를 타고 피아로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뭔가가 망가졌기 때문에 어제 피아에서 열차가 출발하지 못했다고 한다. 호텔 주인과 역의 직원들이 모두 나에게 이 소식을 말해주었다. 뭔가가 망가졌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뭐가 어떻게 망가진 건지 모르겠다. 그래서 목요일에 피아에서 출발할 열차는 토요일로 연기되었고, 금요일에 이곳에서 출발할 예정이었던 열차는 일요일로 미루어졌다.
즉 내가 마나카라에서 기차를 타고 피아에 가려면, 일요일까지 2일을 더 여기서 기다려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마나카라에서는 2일을 쉰 것으로 충분하다. 빨리 안타나나리보에 간 다음에 섬의 북쪽으로 올라가는 것이 좀 더 좋을 것이다. 그곳에 가면 인도양도 볼 수 있고, 인드리원숭이도 구경할 수 있다.
이렇게 결정한 나는 이곳에 올 때와 같이 역시 미니버스를 타고 피아로 떠나기로 했다. 버스가 출발하는 시간은 아침 8시, 약 8시간을 달려가면 피아에 도착할 수 있다. 버스를 타려고 터미널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때, 스코틀랜드에서 온 앤드류를 만났다.
그는 마다가스카르에서 수개월간 머물면서 NGO 활동을 하고 있는 친구다. 지금은 4주간의 휴가를 받아서 마다가스카르를 여행하고 있다고 한다. 영어와 프랑스어는 물론이고 말라가시어도 조금 구사할 줄 아는 친구다. 난 그에게 기차에 관한 것을 물어보았다.
"원래 오늘 피아로 가는 기차가 있는 날이잖아?"
"응. 그런데 그 기차가 고장 났거든."
"어떻게 고장 났는데?"
"글쎄, 그것까지는 모르겠어"앤드류가 다시 말했다.
"예전에는 피아-마나카라 운행열차가 2대였었어. 그 중에서 한 대가 사고가 나서 더 이상 운행을 못 해. 이제는 한 대만 남은 거지. 그런데 그 남은 한 대가 고장 나버린 거야"
"사고가 났다고?"
"응, 운행하다가 탈선했어. 내 생각에는 기관사가 술을 마셨던 것 같아."어딜 가나 그놈의 술이 문제다. 앤드류도 피아로 간다고 한다. 그곳에서 자전거를 빌려서 피아의 남쪽 공원과 산을 여행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 친구는 지금까지 꽤 많은 나라를 여행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스코틀랜드 여행자, 앤드류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한 나라에 적어도 몇 개월씩 눌러 살면서 일을 하고, 또 다른 나라로 옮겨서 일을 하고, 또 다른 나라로 옮기고 하는 식이다. 호주, 파푸아뉴기니, 뉴질랜드 등의 나라에서 살면서 일을 했고, 지금은 마다가스카르에 머물고 있다. 호주에서는 여자친구와 함께 살았는데, 자신이 파푸아뉴기니로 갈 때 여자친구는 영국으로 갔다고 한다. 내가 물었다.
"그 여자친구는 지금 어디 있어?"
"그건 나도 모르지."그때 여자친구와 헤어졌다고 한다. 자신은 뉴기니의 자연이 좋았는데 여자친구는 그런 지역을 싫어해서 결국 헤어졌고 지금은 소식도 모른단다. 앤드류는 뉴기니에 머물면서 일을 하고 그곳의 정글 속을 혼자서 몇 주일 동안 여행하기도 했다. 가장 기본적인 식량과 물만 가지고 정글로 들어가고, 음식이 떨어지면 정글 속의 작은 마을에 들러서 물과 감자 같은 것을 얻어가면서 여행했다.
이거야말로 정말 뿌리 없는 유목민 같은 삶이 아닐 수 없다. 앤드류는 스코틀랜드가 고향이지만, 그곳에서 한참 떨어진 남반구를 떠돌면서 살고 있다. 나는 앤드류에게 '여행 좋아하는구나?'라고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앤드류는 여행처럼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살고 있는 친구다. 이런 친구한테 '여행 좋아해?'라고 묻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런 질문은 알코올중독자에게 '술 좋아해?'라고 묻는 것과 똑같다.
앤드류 같은 삶을 산다면 어떨까. 여행이 여행일 수 있는 이유는, 돌아갈 곳이 있기 때문이다. 앤드류는 어딘가로 돌아가는 것 대신에 끊임없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앤드류는 아직도 스코틀랜드를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으로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앤드류는 나에게 좋은 정보를 한 가지 알려주었다.
"사카이(Sakai) 소스 먹어봤어?"
"아니, 그게 뭔데?"
"칠리소스 같은 거야. 무지 매워. 아마 너한테는 좋은 소스일 거야."이곳에도 매운 소스가 있구나. 그런 소스가 있다면 밥을 먹을 때마다 훨씬 즐거운 식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싱겁고 느끼한 음식만 먹어온 걸 생각해 보면, 앞으로는 좀 더 입맛에 맞는 식단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앤드류가 말했다.
"사카이를 먹고 싶으면, '메쉬 사카이?'라고 말하면 돼."
"그게 무슨 뜻인데?"
"말라가시어로 '사카이 있어요?'라는 뜻이야"앤드류는 요즘 말라가시어를 열심히 배우고 있는 중이다. 그는 나에게 유용한 정보를 이것저것 알려주었다. 먼 길에는 동행이 있어야 한다고 하던가? 마나카라에서 피아로 버스를 타고 오는 8시간 동안, 앤드류는 나에게 좋은 동행이 되어 주었다.
덧붙이는 글 | 2007년 여름, 한달동안 마다가스카르를 배낭여행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