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의 국내성은 유리왕에서 장수왕에 이르기까지 400여년 이어온 고구려의 도읍지답게 많은 고구려적의 문화유적들이 도처에 널려있다. 남아있는 국내성벽이며 거대하기 이를 데 없는 광개토대왕릉비는 물론이고 위나암성(환도산성)의 유적들 그리고 장군총을 비롯한 수많은 고구려 고분군들….
물론 세월을 이겨낸 석조물이 중심이다. 위나암성을 휘돌아온 통구하(압록강 지류)가 국내성 앞에서 압록강과 만난다. 북한과 경계 짓고 마주하는 이 땅의 무심히 흐르는 강물위에 옛 고구려의 영욕과 오늘의 우리 현실이 같은 깊이로 물결치는 듯하다.
압록 강변 쪽에서 국내성 발굴 현장을 만났다. 호기심 반 반가움으로 현장 가까이 다가갔더니 공안(경찰)인 듯 한 젊은이들이 사납게 밀어냈다. 접근자체를 가로막는 것이다. 갑자기 의구심이 발동한다. 언젠가 뉴스에서 보았던 박작성 이야기가 떠오른다.
박작성은 단동에서 30km 정도 떨어진 압록 강변에 위치한 호장산성을 가리키는 것인데 지금 중국이 만리장성의 시발점이라고 주장하는 곳이다. 중국으로부터 압록 강변을 사수하기 위해 호산의 서쪽에 쌓아올린 고구려의 성을 중국은 임의대로 발굴하고는 동쪽을 향한 성벽으로 개축하여 만리장성의 시발점이라며 억지를 부린다.
만리장성은 산해관에서 끝난다는 역사적 상식마저 뒤집어버린 동북공정의 역사왜곡 현장이 그곳이다. 그래서 역사적인 발굴현장을 보고서도 반가움보다는 안타까움과 걱정이 앞선다. 살림집들을 모조리 철거하고 우리 역사와 조상의 숨결이 배인 유적을 발굴하는 모습이 고맙기는커녕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성안의 궁궐터는 공원으로 개발되었고 복원한 성벽은 옛 모습 그대로를 장담할 수 없다. 매미 겉껍질을 바수어 뱀 허물을 만들려 하는가? 눈으로 보되 마음으로 느껴야 제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장군총의 주인은 누구일까?
장군총을 찾았다. 시원하고 웅장한 모습에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무수하게 널려있는 고구려의 고분들하고는 확실히 그 면모가 달랐다. 우선 1500여년의 세월을 이겨내고도 당당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서있는 자태하며 아스라한 그 옛날에 거대한 돌들을 옮겨 정교하게 다듬어 쌓아올린 솜씨들이 그렇다.
바닥 면적의 한쪽 길이가 30m에 이른다고 한다. 높이 또한 5층 아파트와 맞먹는다. 정교하게 각진 돌로 쌓아 올리고선 4면에는 각각 3개씩의 거대한 자연석으로 버팀돌을 세웠으나 북면의 가운데 하나는 어디론가 사라진 상태이다. 옛 사람들의 계산 값이 정확하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는 듯이 북면의 무덤 돌 피라미드가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왜 버팀돌만 자연석인가? 구준모 선생(한국방정환재단 문화사업팀 백두대간 대표)은 설명한다. “버팀돌은 말 그대로 버팀 힘이 있어야 하기에 크기를 조금도 줄일 필요가 없고 무엇보다도 자연석은 신령스러움을 나타내는 것”이란다. 모두 7층 형태의 피라미드식 무덤의 윗부분의 돌에는 봉분위에 어떤 조형물이 있었음직한 흔적으로 둥근 구멍이 뚫려있다. 4층에 있는 묘실의 방향은 서남향으로 국내성과 집안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그런데 네 모서리가 정확히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다는 설명이다. 묘실 안으로 들어서자 두 개의 관 받침돌이 나란히 놓여있다. 묘실의 천정 돌 하나만도 무게가 50톤이 넘는다고 한다.
누가 만들었을까? 언제 만들었을까? 어떻게 만들었을까? 왜 만들었었을까? 안내인의 설명은 장군총의 주인이 장수왕이란다. 그런데 의문은 가시질 않는다. 우선 장수왕이라 하면 평양천도를 단행했던 사람이 아닌가? 그렇다면 평양부근에 무덤이 있어야 하지 어쩌자고 이곳까지 와서 묻혔단 말인가? 구준모 선생은 또 설명한다. “왕은 왕위에 오르면서부터 자신이 묻힐 무덤을 축조한다”고.
그러나 납득하기가 어렵다. 고구려 고분군에서 발견되는 그 흔한 벽화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으니 말이다. 장군총 뒤켠에는 소위 딸린무덤이라는 작은 고분이 있는데 모양새가 심상치 않다. 아래쪽 기단은 각지게 다듬은 돌로 쌓았으나 위의 지붕돌은 영락없는 고인돌 모습이다. 마치 고인돌과 장군총의 중간쯤 되는 아니, 고인돌 세력과 장군총세력이 합작한 듯 한 느낌이 든다.
이 지역 곳곳에 산재해 있는 고구려 고분 중 어째서 장군총만 제 모습을 간직하고 있을까? 장군총보다 훨씬 더 크게 조성한 광개토대왕릉도 대부분이 무너져 내리고 강돌 가득한 속살을 드러내지 않았는가? 그리고 위나암성 아래 소위 “산성하 무덤떼” 역시 그 많은 무덤중 하나 정도는 온전한 제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련만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 유독 홀로 우뚝 선 장군총은 제 모습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조금 단순하게 접근해보자. 분명한 것은 장군총이 아주 잘 만들어진 무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잘 만들기 위해서는 광개토대왕릉을 비롯한 어떤 왕릉보다도 더 많은 시간과 공력을 투입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어쩌면 한사람의 왕이 아니라 누대의 왕에 걸쳐서 조성된 것은 아닐까? 아무리 절대왕조의 시대라고 해도 주변에 채석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려 50리나 떨어진 채석장에서 얼어붙은 강길 위로 끌고 왔을 거라는 운반방식을 생각해 볼 때, 그리고 상대적으로 다른 무덤보다 강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위치를 생각해볼 때 충분한 시간이 우선 필요했으리라 여겨진다.
결국 고구려 최고의 신전을 조성한 게 아니었을까? 그리고 고구려 최고의 신전이라면 나라의 시조인 동명성왕을 모신 것은 아니었을까? 이곳이 장수왕능이라는 어떤 유적도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한 일반적인 상상 또한 유효할 것이리라.
고구려시대의 왕들은 죽은 후에 일정한 시간을 자기의 무덤 안에서 살아간다고 여겼다. 그래서 왕릉의 지명에 따라 왕의 시호를 정했다. 고국원에 장사지내고 고국원왕이라 하고 장지가 동천에 있으면 동천왕 서천에 있으면 서천왕 식이었으니 그들의 사후 세계는 살아생전의 세계와 일정하게 관계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장수왕 역시 자신이 천도 할 만큼 귀중하게 여겨온 평양을 버리고 다시 국내성 부근으로 돌아가 묻혔을 리 만무하다.
더욱이 ‘세인이 이사 갈 때도 맨 먼저 신주단지를 모신다’고 하듯이 그는 천도하며 시조인 동명성왕의 무덤도 함께 이장해 갔을 거라 여겨지며(평양 동명성왕능 발굴의 예) 결국 장군총은 국내성 시절의 고구려 기술과 역량의 총화일 동명성왕 무덤이 아니었을까? 추정해 본다. 특히 배총이라는 소위 딸린무덤이 장군총을 지키는 사신역할을 했을 거라 한다면 고인돌 형식의 지붕돌 모습으로 보아 당시에서도 훨씬 더 오래된 고대로의 전통을 이어온 느낌이 든다. 또 지붕돌 아래쪽에 무덤 안으로 빗물이 들지 않도록 정성을 다한 흔적인 요철형태의 새김으로 보아 대단히 신성시 했을 거라 짐작되기도 한다. 그러나 구준모 선생은 “딸린무덤이 왕의 정부인이 아닌 다른 부인들의 묘였을 거”라고 설명하였다. 장군총을 축조하기위해 나섰을 고구려인들과 동원된 노예들을 떠올려 보며 광개토대왕릉비로 발길을 돌렸다.
광개토호태왕비 받침돌을 찾아라
광개토대왕릉비는 답답한 전각에 갇혀있다. 비석에 새겨진 광개토대왕의 이름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생각 같아서는 기왕 전각을 지을 바엔 지금의 전각보다 두 배쯤 크게 만들거나 통유리로 둘러쳐서 만들었다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있다.
6m가 넘는 거대한 자연석에 4면을 돌아가며 고구려의 역사를 기록한 이 엄청난 구조물 역시 고구려의 거대한 기상을 가감 없이 그대로 오늘에 전해주고 있는 표상이다. 그런데 어딘지 어색한 앉은뱅이 모습이다. 대륙을 호령하며 그 위상을 드러내 보이고자 조성한 구조물이라는 생각이 들자 지금의 모습에서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짚인다. 그것은 다름 아닌 비석의 기단부분이다. 지금은 마치 평평한 평지에 빗돌을 세워놓은 모습니다. 과연 처음부터 이런 모습이었을까? 생각은 여지없이 도리질을 한다.
일반적으로 빗돌의 받침돌은 지면으로부터 일정부분 도드라지게 올라와 있다. 그래야 위용도 더할 뿐만 아니라 비바람에 올라오는 흙먼지로부터 몸돌이 지저분해지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광개토대왕릉비는 애초에 어떤 모습이었을까? 지금의 모습은 기단부분 즉 받침돌 부분이 매몰되어있는 상태는 아닐까? 습관적인 의문과 상상이 이어진다.
6.39m 거대한 자연석 광개토대왕릉비의 받침돌은 최소한 1m 이상 지면으로 올라와 있어야 정상이 아닐까? 어쩌면 2m 정도에 이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모양새는 빗돌에 어울리게 약간의 가공이 가미된 우람한 모습이 아닐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불현듯 주변이 원망스럽다. 전각 마당 앞쪽으로 난 도로정도의 지표에 맞춰 지면을 깎아내야 광개토대왕릉비의 본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라 여겨졌다. 그러나 지금의 소유권자는 중국이다.
그들의 횡포는 사진 한 장 찍는데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전각 안에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다는 것이다. 딱 한 장만 찍자고 어렵게 사정을 하였더니 딱 한 장만 찍으란다. 전각 안이 비좁은 탓에 비석의 전체 모습이 카메라에 담아지지 않았다. 결국 토막을 담은 사진 단 한 장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태왕께 시대를 묻다
어린 학생들과 전각 앞 그늘에 앉아 광개토대왕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들이 태왕께 시대를 묻는다. 어떻게 그토록 넓은 영토를 정복했는지를…. 태왕의 욕심은 과연 드넓은 영토였을까? 우리는 쉽게 광개토대왕을 영토 확장의 대표적인 군주로 떠올린다. 그러나 구준모 선생의 설명은 달랐다. “당시의 국력은 지금과 같은 영토 개념이 아니란다.”
“광개토대왕은 단순히 땅을 정복한 군주가 아니라 고구려 중심의 물류망을 만들어 천하 경영을 하기위한 고구려 네트워크를 구축한 군주”라는 것이다. 광개토대왕의 정복 순서를 보면 비려공격, 한강유역 공격, 말갈족 공격, 후연공격, 지두우 공격 등을 들 수 있다. 이 정복지들의 성격을 살펴보자.
먼저 거란족, 유목민족을 정벌하여 말과 소금 등을 얻었고 고구려는 유목민과 다른 지역 간의 중계무역을 확보한다. 백제의 한강유역을 공격하고 서해를 얻어서 백제와 신라, 일본의 대 중국 중계무역 권을 장악한다. 고구려 동북지역의 말갈족을 쳐서 담비 가죽 등 짐승가죽이나 뿔 같은 특산물 수출품을 얻었다. 그리고 후연을 공격하여 드디어 고구려 중심의 동북아시아 최대의 국제무역시장을 열게 된 것이다.
이 발판의 연장선에서 장수왕 또한 초원의 길을 얻었으니 이것이 바로 고구려 중심의 천하경영이라는 거대한 고구려 네트워크이자 고구려 중심의 세계질서를 열어낸 것이다. 이러한 질서 아래서 고구려 백성은 다양한 민족을 포괄하고 있었다. 다시 태왕께 고구려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물었다. 구준모 선생이 대신 답한다. “고구려는 천하를 소통하고자 하였으며 생물학적 혈통보다는 문화적 혈통을 중심에 두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100만 체류 외국인과 이주노동자 그리고 다문화 가정을 떠올려 본다. 새삼 고구려시대의 문화적 질서를 바탕으로 한 다민족의 통일적 조화가 지혜롭게 여겨진다. 광개토대왕은 막강한 군사력 또한 지니고 있었다. 태왕의 기마군단을 위시한 군대를 막아설 자가 아무도 없었다. 스쳐지나가기만 해도 대단한 위력을 떨쳤던 그 기세는 비문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백제와 가야 그리고 왜가 연합하여 신라 경주를 포위하고 위세를 떨칠 때 신라는 고구려에 구원을 청했고 광개토대왕은 5만의 군사를 보내서 연합군을 물리치고 신라를 구원하였다는 대목이다. 이로 인해 애꿎게도 강력한 철기문명으로 무장하고 고대국가의 한축을 이루어온 가야는 패망의 길을 걷게 되지 않던가?
광개토대왕릉으로 추정되는 고분은 무수한 강돌을 속살로 드러내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래도 묘실은 남아있어 들여다 볼 수가 있었다. 무덤 외부의 하단에 남아있는 흔적으로 보아 고구려 고분군 중에 가장 큰 규모로 추정한다고 했다. 추정하는 높이가 무려 10층 아파트에 맞먹을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추정하는 외형에 비해 묘실은 작아보였다. 장군총 묘실보다도 더 작은 크기였다. 방안에는 2개의 관 받침돌만 가지런히 놓여 있을 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무덤 밖 4면에는 장군총과 같은 거대한 자연석 받침돌이 여전히 남아있다. 각 면마다 장군총보다 하나씩 더 많은 4개의 받침돌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 규모의 크기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아이들에게 우스갯소리를 하였다. “옛날 고구려 이전 시기에는 압록강 수심이 아주 낮았는데 왕들의 무덤을 쌓느라고 강돌을 다 퍼 와서 지금처럼 수심이 깊어진 게야. 그래 고구려왕들은 모두가 관개 공사를 많이 해서 관개토대왕들이라고 불러야겠구나. 그리고 후대로 내려오면 봉분을 흙으로 덮는데 그건 이미 강돌이 바닥이 났기에 할 수 없이 흙을 사용하게 된 게 아닐까? 만약 저 강돌들을 모조리 압록강에다 쏟아 붓는다면 국내성 앞 강물이 모두 막혀버리지 않을까?” 구준모 선생이 핀잔을 주며 정색을 하고는 잘못된 설명이라고 바로잡아준다. 아이들과 키득거리며 위나암성(환도산성)으로 향했다.
덧붙이는 글 | 전편에 이어서 썼습니다. 시민사회신문에도 올릴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