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송기인)의 유해 발굴 현장 설명회가 9월 20일 오후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열렸다. 진실화해 위원회의 송기인 위원장과 유해 발굴 조사단, 코발트 광산 유족회 회원 등 60여 명이 참석했다.
진실화해위원회 유해 발굴 조사단의 이상길 책임연구원은 2007년 7월 8일 개토제를 시작으로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세 개의 폐광을 발굴한 결과 160여구 이상의 유해가 출토되었다고 발표했다.
1호 수평 갱도에서는 40구 이상의 인골이 수습되었다. 수직갱도에 매장되었던 유해가 수평 갱도 바닥으로 토사와 함께 쏟아져 나온 상태였으며, 발굴 과정 중에 동굴 붕괴 위험이 있어 작업이 중단되었다. Y자형 평면 형태를 이루는 2호 수평갱도에서는 120여구 이상의 유해가 흙더미 속에서 출토되었다.
민간인들을 학살하여 직접 매장한 것으로 추정되는 1호 수직 갱도에서는 11.5미터의 깊이까지 토사를 제거하는 작업을 진행하였으나 유해는 출토되지 않았다.
2001년과 2005년에 영남대학교에서 발굴한 유해 80여 구를 포함한 240여 구의 유해와 유류품들이 한 자리에 전시되었다. 신체 부위별로 분류된 유골 더미와 총상의 흔적이 뚜렷한 두개골, 희생자를 결박하는 데 사용한 전선줄 등을 보면서 유족들은 ‘숨통이 터진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포항에서 온 김정순(65세)씨는 "이 가운데 우리 아부지의 유골이 있을지 모른다"며 울먹였다. "우리 아부지는 경산군의 씨름 선수였다. 재판 한 번 받지 못하고, 여기로 실려 와서 억울하게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이상길 책임 연구원은 "여성 의복의 단추가 출토된 점으로 봐서 희생자 가운데는 여성도 있었음이 확인 된다"고 말했다. 1950년 당시 정규군이 소지한 것으로 알려진 M1 소총의 탄피와 탄두가 출토됨으로써 가해자의 신분 파악이 가능해 졌다. 그러나 학살 당시에 교도소 재소자들도 있었다는 증언을 뒷받침 하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한편, 2호 수평 갱도에서 출토된 도장에는 ‘朴奉羽(박봉우)’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어 희생자의 신원을 확인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민간인 유해발굴에서 신분이 확인된 경우는 한 번 뿐이었다. 2004년 마산 여양리에서 '(정)태인'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도장이 유해의 양복 상의에서 발견된 바 있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매장된 것으로 알려진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발굴된 유해들은 향후 충북대 박물관으로 옮겨져 유해의 사망 시점과 성별 구분 등의 기초적인 감식 과정을 거칠 예정이다.
내년 봄으로 예정된 2차 발굴 작업을 앞두고 갱도의 구조와 위치에 대한 정확한 파악, 수직 갱도의 조사 방법을 개발하는 등의 작업이 과제로 주어져 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김동춘 상임위원장은 "정부 기관이기 때문에 책정 되는 예산 범위 내에서 조사가 이뤄질 수밖에 없는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발굴된 유해의 안치와 보관을 위한 예산을 신청하였고, 11월에 열리는 국회의 심의를 앞두고 있다"며 언론과 시민단체에서 유해 발굴 내용을 적극적으로 알려 국민들이 관심이 모아져야 한다고 말했다.
경산 코발트광산 유족회가 구성된 지 7년 만에, 어두운 갱도에 갇혀있던 희생자의 유골들은 빛을 보게 되었다. 유족들 가운데서는 "유해 발굴 작업보다도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 회복이 선행 되어야 한다", "혹시라도 예산 부족으로 발굴 작업을 철회하면 어떡하나", "울지 않는 아이에게 젖을 주지 않는다, 우리가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말들이 오갔다.
1950년 7월에서 9월에 걸쳐 대구 경북 지역의 보도 연맹 가입원들과 재소자 3500여 명은 경산 평산동 코발트 광산 일대에서 학살당했다. 2005년 8월, 영남대 문화인류학과에서 유해 발굴 작업을 펼쳤던 경산 코발트 광산 근처의 대원골은 이제 사라져버렸다. 2007년 9월 현재 그 자리에는 서양 잔디가 깔리고 인공 호수가 조성된 골프장이 개장을 앞두고 있다.
무관심으로 또다시 '진실'이 매장되지 않기를 폐광에 갇힌 원혼들은 고대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