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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가에 먼저 갈 것인가 처가에 먼저 갈 것인가’를 두고 아내와 다투다 남편이 자살했다고 하고, 남편이 나이트클럽에 간 아내를 찾아가 명절인데도 집안일을 소홀히 한다며 흉기를 휘둘렀다고 한다. 이렇듯 올 추석연휴에도 가족끼리 다툰 사연이 잇따랐다.

이런 소식을 접할 때면 ‘민족 최대의 명절에 한발씩만 양보하지 왜 그런 일을  저지르지’ 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런데 우리 가족에게도 이번 추석에 말 못할 사건이 벌어졌다.

나에게 친정나들이는 거의 연중행사다. 해외도 일일생활권인 요즘, 내가 사는 부천과 친정이 있는 울산은  마음만 먹으면 쉽게 다녀올 수 있다. 그러나 거미줄처럼 촘촘히 엮인 일상을 조절하고 다녀오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명절이면 비교적 여유 있게 친정에 다녀올 수 있어 보름달처럼 두둥실 뜬 마음으로 고향으로 달려간다.

남편과 나는 시댁과 친정, 어디부터 먼저 가는 것은 따지지 않는다. 도로 사정, 가족들과의 만남 등을 고려해  합리적인 결정을 한다. 이번 추석의 경우 추석 전에  쉬는 날이 많았기 때문에 친정에 먼저 들렸다가 시댁에 가는 쪽이 나을 거라는 의견에 합의했다.

22일 밤 12시 부푼 가슴을 안고 울산으로 향했다. 고향에 가서 담아 올 이야기 주머니와 부모님의 정성이 담긴 음식을 담아 올 주머니를 준비하고 떠났다. 20여년 명절기간 고속도로를 달려본 결과 자정에 움직이면 비교적 소통이 잘되었기에 우린 심야를 잘 이용한다.  도착하니 새벽 4시 30분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한창 단잠에 빠져 있을 시간이지만 친정 부모님은 벌써 하루를 시작할 채비를 하고 계셨다.

낮이 되자 객지에 사는 우릴 반기러 언니, 오빠, 동생이 선물꾸러미를 들고 속속 도착했다. 차례를 지내기 전  들르는 게 좋을 거라며 고모부도 친정집에 먼저 오셨다.

올해 칠순이신 고모부는 정말 적성에 맞는 직업을 찾았다며 자랑하셨다. 아니 요즘 같은 불경기에 웬 직업이냐고 눈이 휘둥그레졌더니 주 3회 평택항에서 출발하는 배를 타고 중국에 가서 중국의 농산물을 수입해 오는 일이란다.

곳곳에 넘쳐나는 중국산 농산물이 이런 경로를 통해 많이 수입된다는 고모부의 말씀에 “불법이 아니냐”고 물었다. 정부에서 실업자 구제책으로 1인당 87kg까지의 수입은 허용하고 있다는 게 고모부의 설명이었다.  새로운 정보를 받아든 우리 가족은 “세상에 별 직업도 있다”며 입을 모았다. 그밖에도 우리는 이런저런 훈훈한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러다가 일이 벌어졌다. 아버님 통장에 남은  잔고가 발단이었다.

올해 초 보건소 부지로 친정 땅이 매각되면서 보상금으로 약 8천여만원이 나왔다. 부모님은 2남 4녀인 자식에게 일부 분배를 하고 나머지는 아버님과 어머님 통장으로 입금을 시켰다. 평생 흙을 일구며 힘들게 살아오신 팔순 부모님에게는 그 돈이 든든할 수밖에 없다. 노인정에 파티를 열어주고, 손자들에게 용돈을 듬뿍 주는 등 기분 좋게 한턱 쏘기도 하셨다.  6남매지만 모두 제 살기에 바쁘다는 핑계로 부모님께 흡족하게 용돈 한번 드리지 못했다. 자식들은 그나마 그 돈이 효자 노릇을 한다는 생각에 조금이나마 위안을 삼았다.

부모님은 큰언니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언니는 50년대 가난한 농부의 맏이로 태어나 동생들 업어 키운다고 고생하며 배우지도 못했다는 게 이유였다. 그래서 동생들도 부모님처럼 언니가 지나치게 친정에 의지한다는 생각이 들어도 한없이 관대했다. 집안의 대소사로 형제들이 갹출하는 일이 생겨도 언니는 제외시켜 주었다. 동생들 돈을 빌려가 갚지 않고 두루뭉술 넘어가도 그냥 눈감아 주었다. 

  “아버지 통장에 예금된 돈 잘 있지요. 아무도 주지 말고 아버지 맛있는 것 사 드시고 여행도 다니세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아버님 통장의 안부를 물었다. 그랬더니 역시나 어머님 통장은 이미 바닥이 났고 아버님 통장 잔고도 반 이상 줄어 있었다.

“너네 큰 형부가 가져갔다. 잠시 빌려간다고 두 달 전에 가져갔다.”

어머니 통장은 통장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이미 큰언니가 홀라당 가져갔단다. 물론 언니의 사정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없는 살림에 조카 넷 4년제 대학 다 보내고 특히 큰 조카는 돈 많이 든다는 미대 보낸다고 재수까지 시켰으니 형편이 좋을 리가 없다.

누군들 제 자식 교육시키고 싶지 않겠나. 그래도 본인의 사정을 고려해서 결정해야하지 않나. 그러나 언니는 아니었다. 저질러 놓고는 수습은 뒷전이다. 보다 못한 부모 형제가 늘 해결을 하는 식이다. 부모님은 언니네가 살 집도 마련해주고 빚도 갚아주었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참으로 부모가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는 올케 몰래 남동생 직장에 대출까지 해 갔다는 사실을 알았다. 형제들은 언니가 너무나 경우에 어긋난 일을 저질러도 괜히 집안 시끄러워진다며 참고 참았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 내가 한마디 했다.

“언니, 어떻게 엄마의 피 같은  돈을 다 가져 가냐? 동생도 은행에 갚아야 할 돈이 많은데 올케도 몰래 대출했다고...”
“내가 너네들 키운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것도 이해 못하나. 못된 것...”

입에 담지 못할 욕이 돌아왔다. 올케도 남동생도 언니의 욕설에 흠뻑 젖었다.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엄마  용돈과 대출에 대한 사연을  물었을 뿐인데. 대화가 되지 않았다. 그동안 집안 시끄러워진다고 이성보다 인정으로만 대한 것이 화근이었다. 오빠와 올케의 쌓인 울분도 터졌다. 평생 참고 참았던 울분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형제라는 끈에 얽매어 따지지 않고 무조건 참고 넘어간 지난날을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이미 굳어진 관습에 논리는 통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엄마가 나섰다.

“참아야 한다. 할 말은 다 못하고 산다.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다. 동네 시끄러우니 그냥 참아라. 세월이 약이다. ”

돌아보면 언니의 그 타령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오히려 강도는 더 심해진다. 이런 상황에 조용한 게 정상이 아니다. 남 눈치볼 상황이 아니라고 했더니 엄마는 나를 나무라셨다.

평생 자식 걱정에 허리를 펼 날이 없으신 부모님, 부모님의 삶을 보면 나도 자식을 키우는 입장에서 자식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회의가 든다. 기력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팔순 부모님의 남은 생이 좀 편안해졌으면 한다.

얼마 전 모 아나운서의 강연을 들었다. 그 아나운서는 방송에 들어가기 전 커닝 페이퍼를 만들었을 때는 불안하고 자신이 없었다고 한다. 그 커닝 페이퍼를 던지는 순간 자신감이 생기고 당당해지더라고 했다.

  부모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성인실업자가 많다는  요즘,  아무리 배가 고파도 내 집 마당에 떨어진 남의 집 감은 먹지 않겠다는 올곧은 정신이 그립다. 부모라는 커닝 페이퍼에 의지하지 말고 문제를 스스로 풀어 나가는 이 땅의 자식들이기를 바란다. 1년 만에 친정에 간다고 부풀었던 내 마음은 부모님께 불효하고 온 것 같아 꺼질 대로 꺼져버렸다.

덧붙이는 글 | <우리 가족의 특별한 추석 풍경>응모글



#자식의 의미 #부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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