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치의 아름다움은 보지 못하는 반쪽여행 어떻게 하면 더 정감있는 암자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오마이뉴스>에 시덥잖은 절집 이야기를 쓰면서 그때마다 함량 부족이라는 자괴감에 사로잡히곤 한다. 암자 기행의 참맛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채 문화재에 대한 하찮은 알음 알이나 무미건조한 이야기 따위를 늘어놓다가 끝내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나 자신이 지닌 한계에 비롯한다. 찾아간 곳에서 느낀 감성을 오롯이 담아올 수 있는 내 감성이 부족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내 눈이 아직 미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원인을 나 자신이 아닌 밖에서 찾는다면 변명거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사찰이나 암자를 찾아가는 시간에 혐의를 걸고 싶다. 암자뿐만 아니라 명승이나 고적을 찾아갔을 때도 마찬가지다. 풍경이 가장 아름다운 시간은 아무래도 햇살이 고운 아침이거나 저녁 해가 넘어가는 일몰의 순간일 확률이 높다.
적막은 요지부동으로 앉아 있는데 스물스물 안개가 피어오르는 아침 풍경은 얼마나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는 풍경인가. 또 산야를 붉게 물들이며 소멸하는 태양이 빚어내는 장엄한 일몰은 얼마나 황홀한 슬픔인가. 아침과 저녁의 시간은 죽은 듯이 드러누워 있던 나의 감성을 벌떡 일으켜 세운다.
그런 시간엔 무생물인 카메라조차 감성이 깨어 있어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고운 색을 입혀서 아름다운 풍경을 박아낸다. 아침이나 저녁 시간의 광선은 수동 카메라에 대해 똑딱이가 가진 타고난 열등감마저 잠시 잊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대개의 경우 내가 그 사찰이나 암자를 찾아가는 시간은 한낮일 때가 대부분이다. 햇살은 쨍쨍 내리쬐고 모든 사물은 제 고유의 색을 드러내길 거부하는 시간이다. 햇볕에 온몸이 나른해진 카메라조차 슬슬 태업을 시작한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는 직사광선은 사진이 곱게 나오도록 허락하지 않고 심술을 부린다.
더 좋은 암자 이야기를 쓰려면 하룻밤을 그곳에 머물면서 암자가 연출하는 아침 풍경이나 저녁 풍경을 직접 겪어봐야 하고, 그 절집만이 가진 독특한 분위기를 맛봐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거기에다 인간미 넘치는 스님과의 일화가 덧붙여진다면 금상첨화이리라.
그러나 자발스럽게도 난 그곳에 발을 딛는 순간, 허겁지겁 돌아올 걱정부터 하는 사람이다. 그 암자, 그 풍경이 품은 가장 좋은 순간의 모습은 보지 못하고 서둘러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고도 감히 그곳에 다녀왔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내가 지금까지 쓴 암자 이야기는 모두가 헛것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조금만 세차게 바람이 불어도 셔츠가 걷히어 배꼽이 튀어나와 우세를 살만한 지경이다.
조금 거창하지만, 지식과 정보도 전달하면서 마치 쓰는 사람과 독자가 가까이서 함께 호흡하는 듯한 기행문을 쓰는 게 내 목표다. 이 일석삼조를 동시에 달성해야 하는 험난한 길에서 난 매번 한 마리 새도 제대로 잡지 못한 채 헛팔매질이나 하다 끝내고 만다.
좀 더 감칠 맛나는 암자 여행기를 위하여
며칠 전 <암자에는 물 흐르고 꽃이 피네>(민음사 간)라는 책을 샀다. 인터넷 책방에서 책을 사고 남은 마일리지가 나를 유혹했기 때문에 거기에 넘어간 것이다. 이렇게 쓰면 좀 '거시기' 하니까 좀 더 감칠 맛나는 암자 여행기를 어떻게 써야 할까를 고민하기 위해서였다고 해둘까. 책의 쓴 이는 <나를 찾는 암자여행>, <길이 끝나는 곳에 암자가 있다>, <암자로 가는 길> 등 암자 이야기를 많이 쓴 정찬주라는 분이다. 저 사람은 어떻게 암자 이야기를 쓰고 있을까.
<암자에는 물 흐르고 꽃이 피네>라는 책 속엔 가야산 지족암에서 백암산 운문암에 이르기까지 전국에 있는 "물 흐르고 꽃이 피는" 암자 30군데를 찾아가서 느낀 기행문이 들어 있다. 그리고 성철 스님에게 띄우는 편지인 '무엇이 삼천배인가'라는 글을 비롯해 법전, 달마 스님 등에게 띄우는 편지글 18편도 함께 묶여 있다.
책은 '눈으로 보는 것 없으니 분별이 사라지고,' '귀로 듣는 것 없으니 시비가 끊어지네,' '분별도 시비도 훌훌 놓아버리고,' '오직 마음부처 찾아 스스로 귀의하라' 등 네 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다.
'새벽 예불에 띄우는 편지' 18편 18편에 달하는 편지글은 '새벽 예불에 띄우는 편지'라는 부제를 공통으로 달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성철 스님과 법전 스님께 드리는 글 6편과 달마, 혜가, 승찬, 도신, 홍인 중국의 초기 선종 육조 스님 다섯 분과 마조 스님께 드리는 글 12편이다. 그 중에서 성철 스님을 추억하며 쓴 글이 5편으로 가장 많다. 성철스님의 열반 3주기에 맞춰 찾아간 백련암에서 성철 스님을 추억하며 쓴 글인 '무엇이 삼천 배인가'라는 글 속에선 그는 새삼스럽게 성철 스님이 백련암을 찾아오는 이들에게 '불전 삼천 배'를 시킨 뜻을 생각하기도 한다. '새벽 예불에 띄우는 편지'들 가운데서 내 마음을 크게 움직이는 것은 달마 스님에게 보내는 편지의 한 구절이다.
그런데 지난 가을, 전남 화순에 있는 쌍봉사 다성암 극락전 앞에서 문득 <지심귀명례>가 무언지 깨달았던 것입니다. 고목이 된 단풍나무에서 낙엽이 떨어지고 있었는데, 저는 그 순간 <지심귀명례>라는 화두 하나가 풀어지는 듯했던 것입니다. 스님, 붉음을 다 토해내고 난 후, 한잎한잎 뿌리로 돌아가기 위해 떨어지고 있는 낙엽이야말로 <지심귀명례>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닐런지요. - 136쪽
'지심귀명례'란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라는 뜻이다. 다음으로 흥미를 느낀 것은 중국 초기 선종의 3조인 승찬 스님께 보내는 '불행은 업장을 씻어주는 파도'란 편지글이다. 문둥병으로 머리카락이 다 빠져 붉은 머리가 돼 버려 적두찬(赤頭璨)이란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던 승찬 스님의 불행했던 시절을 회상하며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습니다. 불행이란 비극이나 고통이 아니라 업장을 씻어주는 고마운 파도일 뿐입니다. 그러니 불행이 없는 사람보다 불행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다행한 사람입니까. 때묻은 영혼을 맑게 헹구어 주는 우주 질서의 자정 세탁기를 옆에 두고 있는 사람이니까요. - 212쪽
승찬 스님에 비하면 내 영혼을 자정시키는 세탁기는 턱없이 용량이 작았던 모양이다. 지금 내 영혼은 때 구정물이 줄줄 흐르고 있으니. 그러나 난 영혼을 자정시키려고 굳이 큰 세탁기를 들여놓을 생각은 없다. 발품 팔아 찾아간 서른 곳의 암자들 암자여행에 관해 쓴 글은 모두 서른 편이다. 그가 맨 먼저 발을 디딘 암자는 합천 가야산 지족암이다. 그곳에서 그는 입적하신 일타 스님을 추억하며 도와 돈, 법과 밥을 화두로 삼아 생각에 잠기며 '너는 누구인가' 물음을 던진다. 가장 기본적인 화두지만 절절하지 않으면 우스꽝스럽게 돼버리는 화두이기도 하다. 그래서 내가 애써 기피하는 화두 가운데 하나다. 팔공산 부도암에선 진리의 부처인 비로자나불이 계신 앞마당까지 차를 들이대는 세태에 씁쓸해한다. 나 역시 100% 가득 채운 공감을 보내면서 읽은 대목이다. 영축산 백운암에선 암자가 영원히 졸고 있는 노승의 모습으로 남길 바란다. 고풍스런 절집에 가면 누구나 한 번쯤 품게 되는 이해할 수 있는 '이기심' 아닌가.
설악산 봉정암에선 반가운 신도나 스님이 오면 절에 알리는 까마귀들에게서 불성을 느끼기도 한다. 까마귀라고 편견 때문에 손해를 입는 일은 없어야 함은 물론이다. 책에 들어 있는 많은 이야기 가운데 태백산 백련암에서 스님과 나누는 대화가 오래 가슴에 남는다. 청빈이란 무엇인가를 되돌아 보게 하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이윽고 암자에 다다라 스님을 부르자, 나뭇가지로 얼기설기 만든 문을 열어준다. 노스님이지만 얼굴이 곱고 단아하다. 마루에 앉자마자 일행이 내놓는 국수 등의 시물에 스님이 합장하면서 고마워하신다. "저는 줄 게 없어요. 이곳 태백산 기운이나 받아가세요. 물가에 가면 옷이 젖듯이 이런 곳에 있으면 저절로 기운이 붙지요." - 148쪽 이 밖에도 책 속에는 태백산 도솔암, 계룡산 고왕암, 조계산 천자암, 지리산 구층암과 상선암, 두륜산 관음암 등의 암자가 등장한다. 암자를 찾아가는 그의 발걸음은 전남 장성 백암산 자락에 있는 청류암과 운문암에서 끝난다. 이 두 암자는 공교롭게도 지난 7월에 다녀와 내가 '마음속 묵은 때를 몽땅 흘러보내고 싶지만'(청류암)이란 제목과 '사립문은 있건만 밀쳐 여는 사람 아무도 없구나'(운문암)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썼던 곳이기도 하다. 가기 전에 이 책을 읽고 두 암자에 대한 사전 지식을 좀 갖고 갔더라면 좀 더 윤기 있고 멋있는 기사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인다.
내가 암자를 즐겨 찾는 이유 자의식이 강한 사람들은 자신이 무척 잘난 줄 알고 우쭐거리며 세상을 살아간다. 그들은 하심(下心)이 무엇인가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독서와 여행은 내 자의식을 옅게 하는 두 개의 축이다. 독서를 통해선 세상에 나보다 잘난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고 뉘우치게 되고, 여행을 통해선 세상이 얼마나 넓으며 나란 존재는 얼마나 하찮은가를 깨닫곤 한다. 절은 무생물이지만 그곳에 기거하는 스님들이 있으므로 해서 살아있는 유기체이다. 이름있고 큰 절은 자의식이 강하다. 찾아가는 사람을 본체만체 홀대한다. 그러나 작은 암자에겐 우쭐거리는 자의식이 없다. 오는 나그네를 귀찮다 생각지 않고 오히려 반길 줄 안다. 내가 암자를 즐겨 찾는 이유는 그런 것이다.
한편 암자 기행 전문인 작가는 자신이 암자를 즐겨 찾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암자는 산짐승들의 발길이 잦은 대신에 사람의 발길이 뜸한 곳이다. 그만큼 우리 시대의 마지막 남은 청정공간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암자에서 잘 때는 꿈 없이 깊은 잠을 잔다. 밤에 꿈을 꾼다는 것은 욕심과 집착의 미망에 허둥댄다는 것이 아닐까. 다행히 암자에서는 저잣거리의 헛된 꿈들이 잠시 접히는지 꿈을 꾸지 않고 달콤한 잠에 빠지는 것이다. 그런 사연 때문일까 암자에서 하룻밤을 자고 나면 단전에 힘이 솟고 머릿속이 옹달샘처럼 맑아지곤 한다. - 6쪽과 7쪽에서
나 역시 작가의 말대로 암자가 "우리 시대의 마지막 남은 청정공간"이라는데 절대 공감한다. 나 역시 그 때문에 암자를 즐겨 찾는 것이다. 거기에 자의식이 없는 사람이 대하기 편하듯 거들먹거리지 않고 나그네를 대하는 것이 암자가 지닌 미덕이다. 그가 쓴 암자 이야기는 내가 가지지 못한 점을 두루 지녔다. 우선 그는 나처럼 도착하자마자 돌아올 걱정은 하지 않는 듯하다. 하룻밤 묵으면서 느낀 절집의 분위기나 아침 풍경, 스님과 얽힌 이야기 등을 담담하게 서술한다. 고리타분한 문화재 이야기 따위는 거의 비치질 않는다. 그래서 그의 글은 음식 맛으로 치면 아주 담백한 맛이다.
책 <암자에는 물 흐르고 꽃이 피네>는 삶에 지친 우리에게 한 모금의 생수를 제공하고 있다. 아주 영혼이 목마른 가을날에 읽으면서 삐쩍 가문 영혼을 촉촉이 적시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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