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추위에 떨어야 했던 짐바브웨의 밤7월 말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추운 겨울인데 이불이 없으니 잠을 잘 수가 없다. 이불 대신 양말과 바지, 점퍼까지 입은 상태로 침대에 쪼그리고 누워 잠자리에 들었다. 추위를 견디는 데는 몸을 움츠려 자는 새우잠이 최고다. 그러나 한 시간도 채 안되어 잠에서 깼다. 새우잠도 아프리카의 추위를 이길 수는 없다.
몇 번을 뒤척이다 결국 배낭속의 티셔츠와 다른 바지 한 벌, 수건, 속옷 등을 모두 꺼내 이불대용으로 다리부터 배까지 덮었다. 머리가 차가우니 잠이 오지 않아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역시 작은 옷가지들이 이불을 대신 할 수는 없다. 밤새 거의 한숨도 자지 못하고 뜬 눈으로 새벽을 맞이해야 했다. 아마, 배가 고파서 더욱 추위를 느꼈는지도 모른다.
전기도 밤늦게 들어와서는 새벽이면 다시 나갔다. 아무 쓸모없는 잠자는 시간에만 들어오는 전기이다. 아프리카에서 얼어 죽는 경우가 있다고 하는데 실감이 났다. 내가 전날 하라레에서 마스빙고로 오는 버스 안에서 산 <더 헤럴드(The Herald)>라는 영자 신문의 날씨 란에 그레이트짐바브웨가 있는 마스빙고 지역의 기온은 '최저 8℃~최고 29℃'로 되어 있었다.
신문 8면 아래에 있는 날씨 란에는 '동부와 북동부지역에 일부 구름이 끼고 나머지 전 지역은 쾌청한 날씨가 예상된다'며 '아침에는 매우 춥고 낮에는 온화할 것'이라는 기상예보를 싣고 있었다.
나무 숲 안에 있는 숙소여서 그런지 더욱 춥게 느껴졌다. 초겨울날씨답게 싸늘했다. 추위에 떠는 사람에게 아침 해만큼 기다려지는 것은 없다. 새벽 6시 해가 뜨기 바쁘게 일어나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아직도 캠핑장 주변은 어둠이 가시지 않았으나 주위를 산책하니 몸에서 땀이 나면서 추위가 가셨다.
그레이트짐바브웨 유적지에서 따온 나라 이름 짐바브웨오전 9시 그레이트짐바브웨 유적지 답사에 나섰다. 공원입장료는 미국 돈 15달러였다. 매표소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박물관을 먼저 찾았다. 박물관에서 그레이트짐바브웨 유적지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박물관 입구 의자에 앉아 있는 여직원이 “전기가 나가 입장이 안 된다”며 손을 젓는다. “먼저 유적지를 둘러본 뒤 오는 게 좋겠다”고 덧붙였다.
박물관 입구에서 바라보니 오른쪽에 돌로 쌓은 커다란 성벽과 중간의 계곡, 왼쪽의 언덕 위에 지은 성벽, 그리고 그 사이 계곡에 있는 크고 작은 돌로 된 유적지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내가 찾아온 그레이트짐바브웨 유적지이다. 짐바브웨(Zimbabwe)는 쇼나족의 말로 ‘돌(Bwe)로 지은 집(Zimba)’이라는 뜻. 그레이트짐바브웨(Great Zimbabwe)는 커다란 석조 유적지라는 의미이다. 나라 이름인 짐바브웨에도 바로 이 그레이트짐바브웨 유적지에서 따온 것이다.
짐바브웨는 나라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돌의 나라이다. 그레이트짐바브웨 유적지 뿐 아니라 치렘바 밸런싱 록, 짐바브웨 상징 새인 돌로 된 석상인 ‘짐바브웨 버드’, 최근 세계적 인기를 끌고 있는 쇼나 조각이 모두 돌 예술품이다. 그레이트짐바브웨 유적지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의 산들도 모두 돌산으로 이뤄져 있다. 그레이트짐바브웨 유적지가 모두 돌로 지어진 이유를 짐작케 한다.
그레이트짐바브웨는 크게 3개 유적지로 나눠져 있었다. 원뿔 모양의 탑을 중심으로 돌로 된 벽으로 둘러쳐진 타원형의 종교의식이 진행되던 신전과, 중간에 있는 작은 돌 벽과 사람이 살던 거주 터인 계곡 유적, 언덕 위에 큰 돌 바위로 이뤄진 요새화된 궁전이자 종교적 장소였던 ‘아크로폴리스’ 유적지 등이다.
문화재 인종차별의 상징, 그레이트짐바브웨 유적지박물관에서 오른쪽에 있는 신전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세모꼴의 건물에 있는 안내문에는 그레이트짐바브웨의 아픈 역사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레이트짐바브웨 유적지도 단지 아프리카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유럽 백인에 의해 부정당한 역사가 기록되어 있었다. 아프리카가 서구제국주의에 의해 약탈당할 때 아프리카 사람 뿐 아니라 아프리카 유적지도 차별당하는 이른바 ‘문화재 인종차별’의 아픔을 그레이트짐바브웨는 간직하고 있었다.
영국이 식민지배하던 로디지아 시절 백인들은 그레이트짐바브웨가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갖고 있던 고대 그리스의 솔로몬 왕과 예멘의 시바의 여왕의 왕국이나 고대 지중해의 페니키아인들이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나무와 흙을 주로 사용하던 아프리카에서 돌만을 사용하고, 자연지형을 이용해 쌓은 아크로폴리스 유적지 등 뛰어난 건축물을 아프리카인들이 건설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백인의 유적이라고 우긴 영국의 이런 태도는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에서 비롯된 것일 뿐 아니라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찾기 위한 정치적 목적이 짙게 깔려 있었다. 짐바브웨는 예전부터 식민지였기 때문에 영국의 식민통치는 역사적 정당성을 갖고 있다는 논리이다.
일제가 4세기 후반에 한반도 남부지역인 임나에 일본부라는 기관을 두어 백제와 신라, 가야를 식민지로 삼아 지배 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왜곡해 조선에 대한 식민지배의 역사적 정당성을 찾은 것이나, 중국이 고구려에 대해 동북공정, 티베트에 대해 서남공정, 신장위구르에 대해 서북공정, 내몽골에 대해 북방공정을 통해 이들 모든 지역의 옛 국가는 독립된 나라가 아니라 중국의 지방정권에 불과했다는 역사왜곡 작업도 마찬가지다.
주변 국가에 대한 침략에 앞서 역사 왜곡을 통해 식민지배의 역사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떠난 제국주의자들의 상투적 수법이다. 제국주의자들은 소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역사 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신화나 전설까지도 빼앗거나 조작하고 왜곡했다. 호주의 원주민 지도자인 갈라르우이 유누핀구(Galarwuy Yunupingu)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땅이 내 땅인 이유는 내가 이 땅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기 때문이다.”옛날에 땅의 주인이 누구였느냐는 현재의 소유권 분쟁에서 중요한 역사적 근거가 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말이다. 그레이트짐바브웨 유적지는 이미 16세기 아프리카 동남부 모잠비크 해안에 진출했던 포르투갈인들에 의해 유럽에 알려지게 되었다. 포르투갈 역사가인 바루스(Joāo de Barros)는 1552년 그레이트짐바브웨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엄청난 크기의 돌덩이들로 만들어졌으며, 사이사이에 모르타르를 바른 흔적도 전혀 없는 정사각형의 요새가 있다. 이 건물은 언덕들로 둘러싸여 있는데, 언덕 위 모르타르 없이 돌로만 만든 또 다른 건축물 들 중에는 높이가 20m이상 되는 망루도 있다고 한다.'놀랄 만치 정확한 설명이다. 포르투갈인들은 당시 직접 그레이트짐바브웨 유적지를 본 것은 아니고, 짐바브웨를 비롯한 아프리카 내륙 깊숙이 무역을 하던 스와힐리 이슬람 상인들로부터 듣은 얘기이다.
아프리카에 솔로몬의 황금공장이 있다고 믿은 유럽인들유럽인들이 19세기 중반 그레이트짐바브웨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구약성경 때문이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황금이 넘치는 나라인 오빌이 바로 그레이트짐바브웨라고 믿었다. 구약성경의 ‘열왕기’ 9장 26절에는 솔로몬 왕에게 금을 바치던 장소에 대해 “아라비아 남부에 있는 오빌(Ophir)”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유럽인들은 오빌을 아프리카 동부의 짐바브웨로 받아들였다.
유럽인들이 이렇게 믿게 된 배경에는 스와힐리 이슬람상인들이 그레이트짐바브웨에 대해 예루살렘으로 가져갈 황금을 제련하던 솔로몬 시대의 공장이라거나 시바 여왕이 만든 황금 공장이라는 전설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솔로몬 왕과 시바의 여왕에 대한 이야기는 구약성경 뿐 아니라 이슬람 경전인 코란에도 중요한 대목으로 나온다. ‘이슬람판 이야기’에는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 왕을 만난 뒤 태양신을 버리고 이슬람교의 유일신인 알라를 믿게 되었다는 내용으로 나온다. 이러다보니 이슬람상인들도 신비로운 건축물에 대해서는 솔로몬 왕과 시바의 여왕의 전설에 연관 지어 생각했던 것.
1871년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그레이트짐바브웨를 발견한 독일 지질학자 칼 마우흐 역시 솔로몬의 보물이 있는 전설의 황금나라 오빌을 찾았다고 주장했다. 이런 소문을 들은 제국주의자 세실 로즈가 가만있을 리 없었다. 그레이트짐바브웨를 찾은 세실 로즈는 다음과 같이 영국 본국에 보고했다.
“지금 우리들은 오빌의 나라에서 고대의 보물창고를 처음으로 열려고 한다. 머지않아 솔로몬 왕의 욕조라든가 궁전의 기둥을 장식했던 오빌의 황금을 찾아내 빅토리아 여왕의 초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이종호의 <세계를 뒤흔든 발굴>(인물과사상사))오랜 세월이 흘러 그레이트짐바브웨는 고고학자들과 방사성탄소 연대측정법에 의해 현재 짐바브웨의 다수 부족인 쇼나족이 지난 11~15세기에 만들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사하라사막 이남의 아프리카 최대 석조 유적지로 역사바로세우기가 이뤄진 셈이다. 짐바브웨의 슬픈 역사만큼이나 그레이트짐바브웨도 인종차별의 수난을 겪어야 했다.
짐바브웨인의 숨결이 느껴지는 돌 유적유적 발굴과정과 역사 왜곡의 안내문을 읽으니 그레이트짐바브웨 유적지에 대한 짐바브웨 국민들의 애착을 이해하게 된다. 짐바브웨 국민들에게 그레이트짐바브웨 유적지는 단순한 석조 문화재가 아니라 차별과 식민지배를 거쳐 독립과 자부심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억압받은 아프리카인의 역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짐바브웨라는 나라 이름을 아예 그레이트짐바브웨라는 유적지 이름을 그대로 딴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레이트짐바브웨는 이제는 나라 이름으로, 지폐의 얼굴로, 그레이트짐바브웨에서 발견된 짐바브웨 상징 새인 ‘짐바브웨 버드’ 돌상은 국기와 국가 문장, 지폐와 동전에 자랑스럽게 등장하고 있다.
그레이트짐바브웨 유적지에 얽힌 아프리카의 역사를 알게 되면 무너져 버린 유적지 주변의 돌 하나에도 아프리카인의 숨결이 숨 쉬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안내문 바로 옆에 있는 신전으로 향했다. 종교의식이 행해진 신전 바깥을 둘러싸고 있는 돌로 된 높은 성벽이 웅장함을 보여준다. 높이가 11m나 되고 두께가 5m에 이르는 돌 벽이다. 전체 돌 벽의 둘레는 255m나 되고 지름은 100m나 된다. 놀라운 것은 이 높은 돌 벽이 모르타르 등 어떠한 고착제 없이 돌만으로 쌓아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신전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케냐의 <아웃오브아프리카> 박물관에서 보았던 마치 선인장이 촛대처럼 여러 줄기로 자란 것 같은 유포르비아 칸델라브라(또는 유포르비아 잉겐스. Euphorbia Ingens)와 하나의 줄기가 나무 같이 높게 자라 알로에 꽃을 피운 알로에 루페스트리스(Aloe Rupestris)가 여기 저기 자라고 있다. 유포르비아 칸델라브라는 마치 성당의 파이프오르간이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듯 서 있고, 알로에 루페스트리스는 병을 닦는 솔같이 생겼다고 하여 병솔 알로에라고도 한다.
고착제 없이 90만개의 돌을 쌓아 만든 신전의 성벽신전의 돌 벽 안으로 들어가자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개코 원숭이들이다. 10여 마리의 원숭이들이 무너진 옛 신전 터에서 뛰어놀다 여행객의 인기척에 놀라 재빨리 돌 벽 위로 올라간다. 북동쪽 출입구를 통해 신전 안으로 들어가면 왼쪽 벽을 따라 안쪽에 이중으로 커다란 돌 벽이 세워져 있다. 바깥 돌 벽과 성안의 돌 벽 사이를 걸어가니 벽과 벽 사이의 그늘에 시원한 느낌을 받는다. 길이가 70m나 되는 이중 돌 벽으로 이루어진 통로를 지나면 바로 원뿔형의 높은 탑이 나온다.
원뿔형의 높은 탑은 역시 돌로 쌓았는데 높이가 10m나 된다. 우리의 경주 첨성대와 비슷한 모양이다. 출입구나 올라가는 계단, 창문 등이 하나도 없는 것으로 보아 감시용 탑이 아니라 종교적 상징인 신전이다. 신전 자체가 커다란 남근의 상징으로 부족장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고고학자들은 보고 있다.
신전 안은 원뿔형 탑 뿐 아니라 여기저기 돌로 쌓은 작은 건물들이 허물어진 채 시간의 흐름을 보여준다. 작은 원두막 같은 나무로 된 건물이 있는데, 바로 짐바브웨 상징 새인 ‘짐바브웨 버드’ 석상이 발견된 곳이다. 하나의 돌에 새겨진 1.2m 크기의 ‘짐바브웨 버드(짐바브웨 새)’는 맨 위에 독수리가 새겨져 있고, 아래에는 악어가 독수리쪽으로 올라가는 모양이 새겨진 돌상이다.
독수리와 악어는 산 사람과 죽은 자, 또는 하늘과 땅 사이의 메신저(전달자)로 활동했던 선조 통치자들을 상징한다는 것. 학자들은 새들은 신들과 직접 소통하는 수단으로 자연을 숭배하는 토템신앙이 반영된 것으로 본다.
신전을 나온 나는 계곡의 유적으로 내려가기 전에 돌 벽의 바깥을 따라 한 바퀴 돌았다. 화강암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접착제 없이 차곡차곡 쌓아올린 아프리카인들의 기술과 땀이 성벽에 짙게 배어 있었다. 신전의 벽에 사용된 돌이 무려 90만개 이상이라고 하니 얼마나 많은 이름 없는 석공과 백성들의 정성이 담겨 있는가.
아프리카와 동아시아의 교류를 보여주는 계곡의 유적지신전의 돌 벽을 돈 뒤 북동쪽 입구의 아래로 내려갔다. 계곡의 유적이라는 곳이다. 신전과 아크로폴리스 사이의 골짜기에 있는 계곡 유적에는 작은 돌로 담처럼 벽을 쌓거나 사람들이 살던 주거지가 있었다. 계곡의 서쪽 성채에는 옛날 주거지의 모형을 만들어 놓았다. 나무기둥과 갈대로 지붕을 이은 짐바브웨 전통가옥인 다가(Daga) 오두막을 복원한 것이다. 오두막에 있는 안내문에는 이곳에서 중국의 명나라 때 도자기가 발견되었다는 사실 등이 있었다.
그레이트짐바브웨 유적지에서는 중국의 도자기 뿐 아니라 인도의 천(면)과 인도네시아의 염주, 페르시아의 항아리 등이 출토되었다. 이미 14세기에서 15세기 무렵에 아프리카 동해안의 항구도시인 모잠비크의 소팔라를 통해 스와힐리라 불리는 아랍상인과 활발한 교역을 벌였음을 보여준다.
계곡의 유적지는 누런 갈대들이 양탄자처럼 깔려 있었다. 배낭을 메고 걷는데도 갈대의 부드러운 촉감이 발에 느껴져 몸은 한결 가벼웠다. 바위에 앉아 쉬기도 하고, 갈대를 밟으며 산책을 하듯 골짜기 유적을 둘러보는 재미가 있었다. 계곡 유적을 둘러본 뒤 나는 다시 박물관으로 갔다.
박물관은 내가 가려는 마지막 유적인 아크로폴리스 가는 길목에 있기도 하다. 박물관에는 아직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문을 닫고 있었다. 전기가 없어 박물관이 문을 열지 못할 정도로 짐바브웨에서는 전력난이 심각했다. 박물관 여직원은 “미안하다”고 여러 번 이야기한다.
두 번이나 찾아온 외국 배낭여행객이 발길을 돌려야 하는 것이 안쓰러운 것이다. 박물관에 보관된 짐바브웨 상징 새 돌상이나 중국의 도자기, 페르시아 항아리 등 이곳에서 출토된 각종 유물들을 직접 보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박물관 앞에는 돌 벽에 철제 판으로 된 팻말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의 경찰서가 1891년 그레이트짐바브웨의 유적과 유물을 보호하기 위해 이곳에 세워졌다. 그 뒤 1910년 폐쇄되었다”라는 설명문과 함께. 박물관은 바로 세실 로즈의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의 경찰서가 세워졌던 자리에 들어선 것이라는 설명이다.
박물관에서 언덕 위의 아크로폴리스 유적으로 가기 위해 내려오는 길에는 커다란 선인장과 유포르비아가 가로수처럼 그늘을 드리우고 있어 눈길을 끌었다. 솜 같은 털이 솜사탕처럼 나뭇가지에 달려 있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도 처음 보는 것이어서 신기하다.
자연지형을 이용해 만든 아프리카 아크로폴리스마지막으로 가는 유적은 언덕 위에 세워진 ‘아크로폴리스’이다. 그리스 도시국가의 중심지에 있는 언덕 위의 도시라는 뜻의 아크로폴리스에서 따온 이름이다. 짐바브웨에서는 작은 언덕을 코피(Kopje)라고 부른다.
높이 120m의 화강암 위에 세워져 있다 보니 오르는 것이 만만치 않다. 지금은 여행객을 위해 왼쪽으로 평탄한 길을 따라 올라 가도록 새로운 길을 만들어 놓았으나, 나는 경사가 급한 옛날 길을 따라 올라갔다. 좁고 급경사의 돌계단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야 한다.
옛날 길은 경사가 급할 뿐 아니라 길도 좁아 위에서 사람이 내려오면 옆으로 피해 있어야 하는 등 역시 힘이 들었다. 아침도 먹지 못하고 배낭까지 메니 다리가 휘청 거린다. 정상에 거의 다다랐을 때 미리 구경을 마친 짐바브웨 초등학생 30여명이 인솔 교사와 함께 밑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다 내려올 때까지 바위 옆으로 피해 있었다.
인솔교사와 학생들이 나에게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건넨다. 짐바브웨 사람들은 특히 예의가 바르고 친절하다. 30분 정도 올라가니 커다란 바위를 이용해 만든 요새 같은 건축물이 나타났다. 바위를 따라 돌로 벽을 쌓아 요새처럼 만들었고, 자연석으로 테라스를 만들어 언덕 아래 저 멀리까지 볼 수 있게 했다.
에티오피아 하라르의 랭보 박물관 3층의 실내 옥상 베란다가 나무를 이용해 전망대를 만드는 인도인의 건축술을 상징한다면, 평평한 암석을 이용해 전망대 겸 휴식 공간역할을 하는 테라스를 만든 짐바브웨인의 자연지형을 활용한 건축술에 놀라게 된다. 인도인의 건축술이 가공적이고 섬세하다면, 아프리카인의 건축술은 자연적이고 투박하다.
아크로폴리스의 큰 바위 틈 사이는 배낭을 메고 간신히 빠져나가야 하는 미로 같은 곳도 있다. 종교의식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둥근 작은 돌탑도 있다. 아크로폴리스는 바로 왕이 살던 궁전이면서 종교의식이 진행된 곳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쇼나족의 전통에 따르면 지배자의 위상은 지리적 높이에 따라 구분된다. 왕은 가장 높은 언덕의 아크로폴리스에 살았고, 언덕 아래쪽의 비탈면에는 귀족들이 살았고, 계곡에는 일반 주민들이 살았다.
아크로폴리스는 쇼나족의 자연숭배와도 관련이 있다. 쇼나족은 전통적으로 신성한 언덕과 동굴을 숭배하는 데, 아크로폴리스 역시 주변에서 가장 잘 보이는 언덕에 위치한데다 바위 틈사이의 어두운 미로는 마치 동굴과 같다. 자연환경 속에 영혼이 거주한다는 아프리카인들의 믿음이 자연숭배로 이어진다.
그레이트짐바브웨에서 그려보는 아프리카 대제국아크로폴리스에서 바라보면 사방팔방으로 넓은 들판이 탁 트여 있다. 무티리콰 호수도 산 넘어 있고, 모잠비크 소팔라 항구도 가까우니 왕국의 자리로서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넓은 초원의 사방에서 시원한 바람이 언덕을 따라 올라와서 여행객의 땀을 식혀준다. 쇼나족 왕이 식사를 한 뒤 바람을 쐬기 위해 앉았을 화강암 테라스에 나도 덥석 주저앉았다. 나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배낭도 옆으로 벗어 던진 채. 20여 분간의 오랜만에 만끽하는 휴식이다.
한때 이곳 그레이트짐바브웨는 2만 명의 주민들이 살았던 아프리카 중심 도시였다. 쇼나 왕국은 전성기 때인 13~15세기에 동부 짐바브웨 뿐 아니라 보츠와나, 모잠비크, 남아공 일부지역까지 다스렸던 거대한 제국이었다. 쇼나 왕국이 외세의 침입과 식량난에 쫓겨 다른 곳으로 이주하지 않고 석조 건축물을 발달시키면서 이곳에 정착했다면 아프리카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인류의 발상지인 아프리카가 정작 인류의 발전에서 뒤처지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끊임없는 유목생활과 문자가 없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농업을 통한 정착생활과 도시의 형성, 문자의 발견과 과학기술 발전의 길을 걸어왔다. 쇼나 왕국이 그레이트짐바브에 정착해 영구적인 도시를 만들었다면 아프리카 대제국을 건설했을 지도 모른다.
몽골의 칭기즈칸이 13세기 초 아시아와 유럽에 걸친 몽골제국을 건설할 당시 아프리카에서는 쇼나족이 이곳 그레이트짐바브웨를 중심으로 아프리카 제국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쇼나족의 아프리카 대제국이 만들어졌다면 19세기 서구제국주의자들의 침략 앞에 아프리카는 그렇게 쉽게 무릎을 꿇지는 않았을 것이다. 잠베지강과 림포포강 사이를 호령하는 그레이트짐바브웨 대제국의 웅장함이 눈에 선하다. 언덕 위에 세워진 아프리카 아크로폴리스에서 드넓은 들판을 내려다보면서 그려보는 ‘아프리카 대제국’의 모습이다.
나는 물길 통로(Watergate Path)를 통해 아크로폴리스를 내려왔다. 물길은 약간 험한데, 아래쪽에 작은 저수지들이 있는데 물이 말라 텅 비어 있었다. 옛날에 이곳에 있던 물을 언덕 위의 아크로폴리스로 끌어올려 사용했다.
현지 초등학생과 중고등학생들이 단체로 아크로폴리스 유적지로 올라가고 있었다. 매표소 입구 주차장에는 학생들을 싣고 온 대형버스 4대가 있다. 짐바브웨로서는 가장 자랑스러운 유적지이자 학생들의 단골 견학 장소이다.
그레이트짐바브웨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꽃들유적지는 반나절 정도 구경하기 좋은 곳이다. 짐바브웨의 역사 뿐 아니라 개코 원숭이 떼, 도마뱀, 선인장과 유포르비아 칸델라브라, 알로에 루페스트리스와 일반적으로 ‘짐바브웨 알로에’로 알려진 알로에 엑셀사(Aloe Excelsa) 등의 꽃, 하얀 꽃을 피우고 있는 야생 배나무인 돔베야 로툰디폴리아(Dombeya rotundifolia) 등도 볼 수 있다.
그레이트짐바브웨 유적지를 뒤로 하고 걸어 나오자 전날 보았던 멋있는 그레이트짐바브웨 호텔이 보였다. 별이 3개 붙어 있는 고급호텔이다. 전통가옥 형식으로 지은 호텔로 고풍스럽고 우아하게 잘 꾸며져 있다. 풀장과 테니스장도 갖춰져 있다. 배낭여행객은 감히 엄두도 못내는 숙소이다.
테니스장 옆에 빨간 감이 주렁주렁 열린 듯 한 나무가 있다. 자세히 보니 열매가 아니라 빨간 꽃이 마치 열매처럼 달려 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조화 같이 아름다운 꽃이다. 마침 호텔 직원이 지나가 꽃 이름을 묻자 “모른다”며 다른 직원을 데려온다.
“저 빨간 꽃나무가 뭐냐.”
“무티티라고 한다. 짐바브웨에 많은 나무다.”‘무티티(Mutiti)’. 현지어로는 무티티이지만 일반적으로는 산호나무(Coral Tree)로 알려진 꽃이다. 산호나무는 정말 나무 잎에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는 느낌이 드는 정열적인 꽃나무이다. 내가 아프리카 여행 중 본 가장 아름다운 꽃 중의 하나이다.
산호나무 옆에는 파란 오렌지 같은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스트리크노스 스피노사(Strychnos Spinosa) 나무도 있다. 카피르 오렌지(Kaffir Orange) 또는 푸른 원숭이 오렌지 나무라고 부르는데, 열매가 익으면 노랗게 물들고 개코 원숭이들이 좋아한다. 호텔 직원은 이 나무는 현지어로 "무탐바(Mutamba)"라고 부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