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남북공동선언에 대해 한국 여론은 대체로 ‘환영’조다. 이번 남북공동선언이 6.15 선언 이상의 성과를 내지 못할 것이고 오직 정권 재창출을 위한 이벤트일 뿐이라는 관측이 많았지만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명한 공동선언문은 상당히 진전된 내용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감탄사를 자아낼 정도로 구체적이기까지 하다. 계속 자충수 두는 한나라당 예상대로 한나라당은 환영이라는 말을 아꼈다. 강재섭 대표는 “북핵 폐기와 분단고통 해소, 군사적 신뢰구축 등 핵심적인 사항은 선언적인 수준에 그쳤다”며 유감을 표했다. 이명박 후보는 “두 정상의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노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핵폐기 문제와 이산가족문제, 국군포로문제, 납북자 문제가 본격적으로 다뤄지지 않은 것은 매우 아쉽다”고 했다. 강재섭 대표, 이명박 후보가 공히 불만을 표한 것이 북핵 문제인데 이에 대해서는 노무현 대통령이 정상회담 국민보고에서 불평한 것으로 충분히 답이 된다. 북핵 문제 해결의 과제가 6자회담에서 이미 구체적으로 성과를 낳고 있는 만큼, 남북정상회담에서 또 논의하라고 하는 것은 “타작마당이 이미 벌어지는데 자꾸 따로 또 벌이라”는 트집 잡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국민들이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분단고통 해소, 혹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산가족과 국군포로, 납북자 문제에 있어서도 성과가 없었다고 말하기 힘들다. 양국 정상은 선언문에서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말 대신 ‘흩어진 가족과 친척들의 상봉’이라고 썼다.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흩어진 가족과 친척들’이라는 말에는 국군포로, 납북자가 모두 포함될 수 있다. 물론 ‘흩어진 가족과 친척들의 상봉’에 해당하는 범위가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았지만 현재의 남북관계에서는 용어의 변화가 상당한 진전을 의미한다. 남북한 간의 군사적 신뢰구축의 문제에 있어 이번 정상회담 공동선언문에서 언급된 군사적 긴장완화, 전쟁 반대, 불가침의무는 92년 남북기본합의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해서도 선언적 수준을 넘어서는 성과가 있었다. 서해 NLL을 공동어로수역으로 지정하고 이 수역을 평화수역으로 만들기 위한 군사회담을 11월 중에 평양에서 개최하기로 한 것은 아주 구체적인 군사적 신뢰구축의 약속이라 할 만 하다. 공동선언문과 관련한 한나라당 발언 중 가장 걸작은 안상수 원내대표 입에서 나왔다. 안상수 원내대표는 10.4 남북정상회담에서 참여정부의 서해평화벨트 구상이 구체적으로 관철된 것을 언급하면서 “이런 식으로 결국 우리의 서해 국방한계선이자 해상영토라고 볼 수 있는 NLL을 포기하는 것이 아닌가. 이는 헌법의 영토조항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헌법사항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처럼 트집잡기용으로 돌출된 발언은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라는 헌법 제3조를 근거로 북한을 영토국가로 인정하지 않던 한나라당의 기존 입장을 스스로 번복하는 통 큰 전향적 발언이었다. 가장 큰 성과는 종전선언 추진 합의 한나라당이 어떻게 트집을 잡든 한반도 경제에서 가장 큰 이익이 ‘평화’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따라서 이번 6자회담에서 한반도에서의 항구적인 평화체제 구축이 명시되고,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만나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로 한 것이 가장 돋보이는 성과다. 종전선언과 항구적인 평화체제 구축의 약속이 공문구에 그치지 않고 조만간에 로드맵으로 구체화된다면 종전선언의 의미는 53년 체제의 종식이라는 상징적인 수준을 넘어설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집권 중반에 한국의 동북아 균형자로서의 역할에 대한 의지를 밝힌 바 있다. 정치군사적 균형자를 꿈꾼 것이라면 타당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겠지만 평화적 균형자로서의 역할을 꿈꾼 것이라면 가능하다. 평화적 균형자로서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느냐의 문제는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의 과정을 어떻게 밟는가에 따라서 가능할 수 있다. 현재 동북아 안보환경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한반도 두 국가 간의 냉전이 아니라 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 간의 군비 확장 대결이다. 핵이 없는 상태에서 북한의 재래식 무기는 이 살벌한 군비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수준이다.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으로 동북아에 예컨대 ‘통일한국’이라는 거대 군사 대국이 등장하는 것이라면 노무현 대통령이 꿈꿨던 동북아 균형자로서의 한반도 국가는 요원해질 것이다. 군비 경쟁이 치열한 상태에서 균형자로서의 역할은 오직 핵을 많이 보유한 국가의 역할일 뿐이라는 것은 미국이 오랫동안 증명해 온 바가 아닌가. 군비경쟁이 치열해지면 동북아도 언제든지 화약고로 둔갑할 수 있다. 동북아는 이미 화약고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일부 등장했다. 이런 동북아 정세에 대한 고려 없이 한반도 평화체제를 수립하는 것도 실은 불가능한 일이다. 한반도 평화체제가 군축을 동반하는 형태로 수립된다면 한국의 동북아 균형자로서의 역할을 기대해볼 수 있다. 한국이 북한을 파트너로 한반도의 비핵화와 군축을 약속하고, 평화협정의 다른 당사국들과 주변국들에게 한반도 평화체제 보장과 더불어 평화협정 조건부 군축을 요구할 수 있다. 평화를 도모할 때 한반도는 동북아 균형자가 될 수 있다. 2% 부족함이 있다
10.4 남북정상회담은 한반도 경제에서 가장 큰 이익인 ‘평화’를 손에 쥐기 위한 서곡이었다. 이 서곡이 6자회담이라는 웅장한 변주곡과 함께 시작됐기에 감동이 더 크다. 남북 당사자의 대화에서 평화협정이 이렇게까지 구체적으로 언급된 것이 처음인 만큼, 일단 첫 술은 잘 떴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남북정상회담 공동선언문은 실질적인 종전협정과 한반도-동북아 평화체제를 달성하기까지 우리가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될 험난함을 예고하기도 했다. 한국사회당과 사회비판아카데미가 남북정상회담 공동선언문 발표 5시간 후 개최한 ‘한반도 평화체제와 경제번영을 위한 포럼 2회-한반도 평화경제 수립과 동아시아 다자간 안보협력’에서는 ‘10.4 공동선언 이후’가 화두였다. 포럼 여는 말에서 금민 한국사회당 대통령 후보는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과 관련한 로드맵에 있어서는 국가 대 국가 패러다임이 필요하다”고 했다. 공동선언문에서 ‘정상회담 정례화’가 ‘정상들이 수시로 만나’로 소극적으로 표현된 것이 북한이 국가 대 국가 관계를 불편해해서라는 청와대의 브리핑을 염두에 둔 발언이다. 금민 후보는 “통일을 경험한 다른 나라에서 시도된 적 없는 정부 대 정부 패러다임 보다는 국가 대 국가 패러다임이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해 더 안정적”이라며 “국가 대 국가 패러다임을 통할 때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체제 항구화 과정을 거칠 수 있다”고 했다. 국가 대 국가 패러다임이냐 아니냐의 문제는 남북 관계에서도 첨예한 문제이고, 한국 내 정치세력간의 관계에서도 첨예한 문제다. 이는 남한과 북한이 서로를 진지한 평화협정 대화 파트너로 인식하느냐의 문제이고, 한반도에서 평화보다는 냉전적 사고에 젖어있는 53년 체제 유지 세력의 수명과도 관련된 문제다. 이 지난한 논쟁을 왜 지금까지 끌어와야 하나 싶다. 10월 5일, 안상수 원내대표가 한국의 영토를 재해석하기 전까지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 전체를 대한민국의 영토라고 하는 것이 한나라당의 공식 해석이었지만, 국가 대 국가의 관계는 이미 지난 91년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으로 수립된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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