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앞에 자리잡은 파란색 천막은 고려대학교의 일상적 풍경이 된지 오래다. 정확히 말해 534일째다. 학생들이 고연전을 보러 잠실로 몰려간 10월 5일 오후에도 천막은 여전히 본관 앞을 지키고 있었다.
10월 4일, 출교조치를 받은 7명의 학생들이 학교를 상대로 낸 출교처분무효확인소송에서 서울중앙지법은 고려대 출교징계를 무효판결했다.
이들은 2006년 4월 19일 고려대 병설 보건전문대생의 총학생회 투표권과 수업권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며 본관을 점거하는 도중 교수를 감금했다는 이유로 학교로부터 출교조치를 받았다. 5일 오후 5시 30분경 출교학생 중 한 명인 사범대 지리교육과 02학번 주병준(23)씨를 만났다.
- 서울중앙지법의 고려대 출교징계 무효판결을 받은 소감이 어떤지. "너무너무 기쁘죠. 오늘(5일) 연고전에서도 어제의 판결순간이 계속 생각났거든요. 의외의 판결이었어요. 패소할지도 모른다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사법기관이 약자의 편을 들어 준적이 많지 않잖아요. 정몽구·김승연 회장 사건 보면서 마음이 착잡하고, 질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판결문을 읽으면서 재판관이 질것처럼 말하다 마지막에 원고승소라 했을 때 왈칵 눈물이 쏟아졌어요. 지윤이도 울고, 방청하는 분들도 울고…."
- 승소할거라 예상하지 못했다는 말인지."반반이었어요. 사실은 증인 심문 때까지만 해도 이길 것 같았는데 판결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생각했어요. 사법부가 쉽게 손을 들어주겠나 싶었죠. 판결이 한번 연기됐었잖아요. 마음을 비우자고 생각했어요. 판결 자체에 희비교차하지 말자고 생각했었죠. 이긴 판결을 받았다고 학교로 돌아가는 건 아니잖아요. 아직까지 싸움은 끝나지 않은 거니까."
"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원고 승소'에 눈물이"- 재판부는 피해자로 여겨지는 학생처장이 징계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사실과 학생들에게 충분한 해명 기회가 부여되지 않았던 절차적 문제, 교육기관으로서의 학교의 역할을 들어 출교징계 무효판결을 했는데 이런 재판부의 판결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판결자체도 그렇고, 법원에서의 공방과정을 통해 많은 부분 진실이 밝혀졌다 생각해요. 학교 내에서 대화를 통해 이루어졌다면 훨씬 더 좋았겠지만 허심탄회한 대화자리가 없었잖아요. 사실 허심탄회하지 않은 대화자리도 없었죠. 하하. 법원에서의 공방을 통해서라도 징계절차나 누적징계의 문제 등 일정 부분 진실이 밝혀진 것이 반갑죠. 학교 측이 이건희 명예철학박사 학위수여 반대 기록 등을 법정 참고자료에 제시했어요. 학교 측은 4월 5일 사건만 고려했다고 하지만 저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옛날부터 말썽이었다는거죠.
아쉬운 부분은 감금 사실은 인정했다는 거예요. 형법상 감금은 맞지만 이상신 교수님이나 박노자 교수님 그리고 많은 시민사회진영에서 말했던 것처럼 그날 사건을 어떻게 감금으로 볼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저희에게 씌워졌던 욕설·폭력·주도면밀한 감금 계획 등과 같은 오명들이 완벽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저희 입장이 전달된 것 같아요. 특히 교육기관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크게 와닿았어요. 학교는 입맛에 맞지 않는 학생을 잘라내려 했던 거잖아요."
- 학교 측이 항소할 것 같나."4일 판결 받고, 5시에 집회를 했는데 그 시간에 처장단들의 긴급회의가 열렸대요. YTN 과 SBS 보도에 따르면 다음주 수요일 항소 방침이 나오나 내부적으로는 이미 항소를 결정했다 하더라고요. 예측은 했으나 안타깝지요. 항소를하면 학교가 '우린 교육기관이 아니오' 이렇게 얘기하는거잖아요.
학교가 항소한다면 학생들 반감만 부채질하는 거예요. 학교가 마지막 체면이라도 지키려면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작년 7월 저희가 대화하자고 무릎 꿇고 부탁하는데 물리력 사용하면서 대화는 무슨 대화냐 법정 가서 얘기하라 했었어요. 그러면 이제 법대로 해야죠. 전 기획예산 처장님 박기갑 교수님이 법대로 하자 했으니 이제 법대로 하시면 되는데…, 또 법대로 항소를 하신다면 당황스럽죠."
- 항소한다면 어떻게 대응할건가."사실 달라지는 게 없어요. 계속 싸워야죠. 사실 천막 강제철거 소송에서 패소했을 때도 그런 입장이었어요. 어차피 출교 해결되면 자연스럽게 천막문제는 해결되니까요. 사실 천막을 누구보다 치우고 싶었던 것은 우리지요. 집도 있고, 집에 따뜻한 밥도 있고, 겨울도 오고, 졸업사진 찍는 학생들한테 미안하기도 했지만 학교가 계속 그렇게 나온다면 저희는 천막 농성 할 수밖에 없잖아요.
학생들 목소리를 더욱더 크게 만드는 게 필요한 것 같아요. 법정에서도 계속 싸우고, 학교로 돌아갈 때까지 학내 학외 목소리를 크게 만들어 싸울 거예요. 지금이 그럴 수 있는 상황이라 생각해요."
"534일의 천막농성... 집에서 잠든 건 딱 한번"
- 534일의 천막농성기간 동안 힘들었던 점이 있다면."집에는 한달에 한 번 정도 갔던 거 같아요. 집에서 자본 것은 농성 이후 딱 한번이었어요. 요즘에는 부모님이 많이 편찮으셔서 부모님께 죄송스러워요.
천막은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춥고, 참 '자연친화적'이에요. 여름에는 양초가 녹을 정도로 더워요. 체감온도가 40℃ 정도로 찜질방 수준이에요. 여름에는 다들 나와 있어요. 비 오면 물도 새고 그러니까.
겨울은 말도 못하죠. 추운 겨울날 유인물 글을 쓰고 있었는데 전기장판을 안고 있어 배는 따뜻한데 등은 정말 춥더라고요. 손이 너무 시려워 반 페이지 쓰다 전기장판 밑에 손 집어넣는 걸 반복한적도 있어요. 또 눈이 오면 천막 무너질까봐 밤중에 자다가 한 시간마다 나와 눈을 치웠어요. 그러면 다음날 녹초가 되는 거죠. 그런 것이 제일 힘들었죠."
- 오랜 천막생활로 건강이 악화되지는 않았는지."저는 올해 4월 갑작스럽게 허리디스크가 파열돼 3일 동안 입원하고, 재활치료 받고, 아직까지 재활운동을 하고 있어요. 저는 원래 진짜 건강한데…, 되게 건강했거든요. 집회도 잘 뛰어다니고 했는데 갑자기 디스크가 파열되더라고요.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건강이 악화됐어요. 길바닥에서 530일 넘게 잤는데 당연히 그렇지 않겠나요. 감기도 잘 걸리고…."
- 부모님이 걱정이 많으실 것 같은데."부모님께서 어제 판결 소식을 듣고 가장 기뻐하셨던 거 같아요. 집에 한달에 한 번 정도 가면 계속 뭐 먹고 싶냐고 이것저것 다 해주시려고 하죠. 저는 집밥이면 다 좋은데…. 부모님이 걱정이 많으시죠. 특히 부모님이 편찮으시면 제일 많이 죄송해요. 잘해드리고 싶은데 학교로 돌아가는 거야말로 진짜로 잘해드리는 거라 생각하고 있어요. 다른 친구들이야 제 나이면 졸업반이거나 직장 다니는데 아직 그러지 못하고 있으니 죄송하죠."
"강의실 문열 때까지 조금만 더 관심을"- 학교 측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어제 시민사회진영에서도 많이 얘기했듯이 진정한 진리를 외치는 고려대라면 원판결에 승복하고, 교육기관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생각해요. 학생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박탈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해요. 책을 훔치는 도둑은 도둑이 아니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학생들은 교육의 기회를 누려야 하고, 그 기회는 박탈되어서는 안 되는 건데 이런 상황에서 항소까지 하는 것은 학교 망신이라 생각해요.
이미 수많은 언론에서 지탄을 받았고, 학생들도 이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길 바라지 대법원까지 가자고 누가 그러겠나요? 경영대 등록금 두 배 인상 계획을 세우지 않나 이건희에게 철학박사를 주지 않나…. 학교가 상식적이었던 때가 별로 없는 것 같지만 이번에는 좀 상식적인 모습을 보였으면 좋겠어요."
-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어제 판결을 받으면서 주마등처럼 스쳐간다는 느낌을 알았어요. 도와주신 많은 분들과 그동안 겪었던 일들이 생각났어요. 일주일 만에 탄원서 1000명은 상상하지도 못했어요. 모금해주신 분들도 있고, 물질적이지는 않아도 격려의 문자도 많이 보내주셨고요. 어제만 해도 문자 40개를 받았어요. 강의실 문이 저 멀리서 보이는 것 같아요.
그런데 아직 강의실 문을 열진 못했지요. 학생들이 문 열 때까지 조금만 더 많이 관심을 가져주시고 계속 지지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한번 너무너무 고맙다는 말씀을 가장 드리고 싶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