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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남겨지는 관광지보다 가슴으로 기억되는 여행지로서 그랜드 캐니언은 영원히 회자될 것이다. 데저트 뷰(desert view)에서 바라본 그랜드 캐니언 일출 광경. 경이롭기 그지없다.
 사진으로 남겨지는 관광지보다 가슴으로 기억되는 여행지로서 그랜드 캐니언은 영원히 회자될 것이다. 데저트 뷰(desert view)에서 바라본 그랜드 캐니언 일출 광경. 경이롭기 그지없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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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건너 수화기를 타고 들려오는 소리에 심상찮은 분위기가 감지되었습니다. 마음이 다급해진 난 인터넷 창을 열고 채팅으로 친구에게 확인을 요하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리곤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른 채 오래도록 얕고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어야 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대."

내가 가장 아끼는 교회 동생의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뜻밖의 비보였습니다. 그것도 이미 2주 전 일이라 모든 상황이 종료된 상태로.

그 소리를 듣자마자 하얀 백지 위에 원서로 된 공학수학 한 문제가 덩그러이 놓여진 듯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심장을 바느질 하듯 너무나 마음이 괴로워 눈을 질끈 감아버렸습니다.

정말 아끼던 동생이었으니까요. 누구보다 잘 되기를 바라던 녀석이었습니다. 수더분하고 배려가 넘치며 늘 웃는 인상이 좋아 언제든지 부담없이 불러내 식사하며 이런저런 인생을 나눌 수 있는 그런 동생이었습니다. 더욱이 오래도록 한 공동체 안에서 교제해 온 기쁨이 컸기에 내 마음의 상처도 그만큼 깊었습니다.

해줄 수 있는 것은 부조금 뿐... 난 참 나쁜 사람

그러고 보니 난 참 나쁜 녀석입니다. 동시에 아주 이기적이기도 합니다. 항상 기쁜 일에는 누구보다 민첩한 반응을 보이면서 좋지 않은 소식은 뒤늦게서야 알만큼 사랑하는 사람들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내 모습이 비열하고 정말 싫었습니다.

자전거 세계일주를 하면서도 집에다 일주일에 안부전화 한 통이면 그게 내 임무의 다라고 생각했던 내 천박한 이기주의가 얼마나 낯뜨거운 몰인격체인지 보여주는 것 같아 스스로를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매번 '내 주위를 한 번 더 돌아보자, 내 이웃을 사랑하자'는 마음 속 외침은 그러나 자기관리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녀석에겐 물먹은 이불처럼 버거운 몽상일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녀석의 소식에 얼마 간 정신을 못 차리다 친한 친구에게 급히 쪽지를 보냈습니다. 아무래도 내 선에서 해야할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녀석에게 친구 편으로 부조금을 보낼 참이었거든요. 사실 해줄 수 있는 거라곤 그것 뿐입니다. 녀석이 임용고시를 준비하던 처지라 무엇보다 공부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을까 전전긍긍 염려가 되었습니다.

친구 결혼식 때 내는 축의금,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내는 조의금 등 모든 부조금에 어머니께서 조언하셔서 정해놓은 가이드라인 10만원. 그러나 이번만큼은 달랐습니다. 돈으로는 따질 수 없는 녀석에 대한 나의 신뢰가 특별한 케이스였습니다. 친구에게 부탁 쪽지를 보낸 후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50만원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나자 조금이나마 그간 챙겨주지 못한 미안한 마음이 누그러지는 것 같았습니다. 아주 조금….

그 정도 액수라면 한 달 여행경비를 산정해 볼 때 결코 적지 않은 금액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너무 평안해져 왔습니다. 괜히 친한 사이에 부담 줄까봐 녀석에게 전화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분명 녀석은 자기 일보다 나를 더 걱정해줄 것이 뻔했기 때문이죠. 대신 주변을 통해 위로의 말을 전해 달라고 부탁 했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지금껏 내가 받은 사랑을 누군가에게 전할 수 있다는 게 그저 감사할 뿐이더라고요.

85마일을 28마일로 오해... 고난의 그랜드 캐니언 가는 길

9월 8일. 그랜드 캐니언 가는 길. 64번 도로.
 9월 8일. 그랜드 캐니언 가는 길. 64번 도로.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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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캐니언에 올라가다가 잠시 쉬다. 유일한 그늘이 만들어진 곳.
 그랜드 캐니언에 올라가다가 잠시 쉬다. 유일한 그늘이 만들어진 곳.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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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바호 원주민들이 도로 한 쪽에서 수공예품을 팔고 있다. 비자카드로 결제가 가능하다는게 흥미롭다.
 나바호 원주민들이 도로 한 쪽에서 수공예품을 팔고 있다. 비자카드로 결제가 가능하다는게 흥미롭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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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그랜드 캐니언 입구구나.'

전날 인구 200명도 채 되어 보이지 않는 그레이 마운틴(Gray mountain)의 인디언 교회에서 잠을 잔 뒤 9월 8일, 64번 국도를 타고 서쪽으로 해서 그랜드 캐니언 사우스림(south rim) 방향으로 들어갔습니다. 보통 미국 여행하면 떠오르는 나이아가라·옐로스톤·요세미티와 함께 4대 자연 관광지로 꼽히는 그랜드 캐니언. 그 장엄한 협곡을 보겠다고 지금 낑낑대며 자전거를 밀고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28마일(45㎞)이라. 생각보다 규모가 크질 않네. 하루 동안 다 둘러보겠군.'

그랜드 캐니언 사우스 림을 한 바퀴 둘러보고 빠져나오는 길은 생각보다 길지 않았습니다. 자전거로 보통 하루에 가는 거리가 100㎞임을 감안하면 넉넉잡아도 오후 늦게까지는 여유 있게 돌아볼 수 있을 것 같았지요. 자신만만 휘파람을 불어가며 점점 더 깊숙이 그랜드 캐니언의 체취를 만끽하고 있었습니다.

'사막이라더니 참으로 쉬운 일이로세.'

아무리 멋진 자연경관이라지만 사막이라고 했기에 속도가 공간을 상쇄시킬 만큼 급히 주행하려던 것을 생각보다 짧은 거리로 인해 느긋한 여유모드로 바꿉니다. 더욱이 계속되는 오르막이었기에 속도를 낼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하루 종일 자전거를 밀고 올라가 오후쯤 겨우 28마일 거리를 다 갔는데도 여전히 전혀 그랜드 캐니언의 모습이 보일 낌새가 없는 겁니다. 서서히 지쳐갈 무렵 갑자기 차 한 대가 내 옆에 멈춰 섰습니다.

"와우, 자전거 여행 중이네! 무슨 일이에요?"
"네, 그랜드 캐니언 가는 길인데 아직도 안 보여서요. 하하, 지금쯤이면 도착해서 여유롭게 일몰을 감상할 때인데."
"그랜드 캐니언요? 앞으로 40~50㎞는 더 가야할 텐데요?"
"네? 40~50㎞라니요? 28마일에 다 구경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뭔가 착각을 하셨나 보군요. 꽤나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아……."

미간을 찌푸린 채 깊은 한숨이 나올 때 그는 격려하며 말을 맺었습니다.

"아마 자전거로는 밤늦게서야 숙소에 당도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차로도 30분 정도 걸리니."

운전자의 대답에 오늘 한 번도 펴보지 않았던 지도를 꺼내 들었습니다. 그랬더니 맙소사! 어젯밤 28마일로 생각했던 거리가 실은 85마일로 적혀 있던 것입니다. 이크, 이런 바보! 그걸 거꾸로 읽다니. 완전 좌절모드입니다. 도대체 얼마를 더 가야하는지.

오르막 길을 차로 30분이면 자전거로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 시간이 걸립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어쨌든 이건 명백한 내 실수니까요. 다리에 힘이 쫙 빠져 얼마 못 가고 아예 나 몰라라 도로에 철썩 주저앉아 물을 마십니다. 28마일은 따로 비상식량을 준비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무난한 거리라 생각한 게 화근이 돼 음식도 바닥이 났습니다.

잘못된 정보 고쳐주러 되돌아온 자동차, 큰 배려에 감동

차를 세워 식수와 음식을 제공해 준 Dave부부. 그랜드 캐니언에서 미국인은 물론 영국인, 독일인, 일본인, 인도인, 폴란드인, 그리고 한 명의 한국인 등을 만날 수 있었다.
 차를 세워 식수와 음식을 제공해 준 Dave부부. 그랜드 캐니언에서 미국인은 물론 영국인, 독일인, 일본인, 인도인, 폴란드인, 그리고 한 명의 한국인 등을 만날 수 있었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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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또 한 대의 차가 속도를 줄이고 내 옆에 멈춰 섰습니다. 그리고서는 내 얘기를 듣고 무려 30분 간이나 대화를 나누면서 물과 식량 등을 공급해 주었습니다. 자발적인 접근이 이렇게 마음을 훈훈하게 만듭니다.

어차피 그랜드 캐니언 내에서는 공식 지정된 곳이 아닌 이상 야영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어떡하든 숙소를 찾아내야만 했습니다.

다시 힘겹게 자전거를 밀고 올라가고 있는데 해가 질 무렵 다시 처음 만났던 운전자가 다시 뒤돌아 오는 걸 발견했습니다.

저 운전자가 왜 다시 왔는지 궁금해 하고 있을 때 그가 말합니다. 두 번째 만남이어서 그런지 서로 간단한 통성명도 포함해서요.

그는 독일에서 온 울프(Ulf)라는 친구로 휴가를 이용해 관광 중이었습니다.

"이봐, 친구! 아까 내가 차로 30분 정도 가면 숙소가 나올 거라 했잖아요. "
"그런데요?"
"사실은 내가 잘못 가르쳐준 것 같아요. 앞으로 5마일(8㎞) 정도만 가면 데저트 뷰(Desert view)가 나오거든요. 거기에 캠핑 장소가 있으니 그리로 가면 될 것 같아요."
"그래요? 근데 설마 이거 하나 달랑 알려주려고 다시 온 거에요?"
"차도 아니고 자전거 타고 가면서 이런 곳에서 정보가 잘못되면 큰 일이잖아요. 가다 보니 내가 잘못 가르쳐 줬더라고. 괜히 나 때문에 고생하는 거 아닌가 해서. 그리고 이거 받아요. 그랜드 캐년 관광지도인데 요긴하게 쓸 테니. 난 어차피 구경 다 마쳤으니까 당신에게 필요할 것 같아요. 조금만 더 가면 되니. 힘내요!"

울프는 한 시간 전에 나에게 잘못된 정보를 가르쳐 주고 난 뒤 다시 내게로 와 올바른 정보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런 경우는 굉장히 드문 일입니다. 무엇인가를 주는 것은 쉬울 수 있어도 잘못된 것을 고치기 위해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그의 마인드. 어쩌면 지극히 작은 것 하나인데 배려하는 태도에 감동이 됩니다. 그냥 지나쳐도 됐었을 텐데….

그의 말 한마디에 다시 힘을 얻습니다. 으쌰으쌰! 해가 완전히 넘어갈 때를 기점으로 드디어 그랜드 캐니언 입구에 도착을 했습니다. 아, 이 물밀 듯 들어가는 환희의 기쁨. 행운이었는지 입장료를 받는 매표소도 이미 문을 닫은 상황입니다. 지금까지 고생한 것 다 잊어버리고 다시 생기를 찾은 나는 만면에 웃음이 가득한 채로 여기저기 RV(Recreation Vehicle)가 판을 친 캠핑장에 유일한 자전거족으로 들어섰습니다.

자동차 여행 중인 칼(Karl)과 샤를린(Charlene). 저녁식사에 초대해 주었다.
 자동차 여행 중인 칼(Karl)과 샤를린(Charlene). 저녁식사에 초대해 주었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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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 냄새 죽이는군요? 안녕하세요."

마침 텐트를 치려고 들어간 땅에 은퇴한 노부부가 여행 중이었습니다. 낯선 청년이 자전거를 밀고 자신들 옆에 숙소를 마련하려고 하자 호기심을 보였습니다. 그 때를 눈치채고 먼저 인사를 건넨 것입니다.

"안녕, 젊은이. 배고파 보이는데 저녁은 했수? 어떻게 샌드위치 하나 드실라우?"

마침 저녁식사를 준비하던 인상 좋아보이는 칼(Karl)과 상냥한 노부인인 샤를린(Charlene)이 웃으며 식사 제의를 해 왔습니다. 거절은 상대방의 마음에 생채기를 남길 수도 있기 때문에 아주 쾌활하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테이블에 합류했습니다.

"저기 저는 맛은 괜찮구요. 그냥 양만 듬뿍 많았으면 좋겠군요."
"오, 그래? 그것 참 반가운 소리군."

칼은 요리하는 부인을 살짝 훔쳐보고 유쾌한 농담을 합니다. 노부인의 정성스런 터치가 더욱 기품있는 맛을 만들어내는 치킨 샌드위치와 얼음물의 맥주캔들 속에서 찾아낸 짜릿한 콜라의 환상적인 조합. 이것이 진정 신선놀음일세! 눈을 감고 맛본 저녁과 눈을 떠 바라본 그들 때문에 하루 동안 쌓인 체증이 확 풀리는 것만 같습니다.

"칼? 내일 그랜드 캐니언 일출 보려고 하는데 새벽에 깨워줄 수 있어요?"
"그래? 몇 시 쯤?"
"음, 한 5시 반 쯤요. 혹시 제가 일어나지 않거든 텐트에다 찬물을 확 끼얹어도 돼요."
"그것 참 훌륭한 방법인데? 걱정 마. 최선을 다하겠어."

켜켜이 쌓인 인생의 지혜만큼이나 칼의 농담은 관록 있어 보입니다.

배터리 충전하러 갔다가 횡재하다

그랜드 캐니언까지 묵묵히 잘 따라와 준 애마 로페카(Ropeca).
 그랜드 캐니언까지 묵묵히 잘 따라와 준 애마 로페카(Ropeca).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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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막을 지나오면서 오래도록 전기를 쓰지 못했기에 내일 그랜드 캐니언을 다녀온 족적을 남기려면 카메라 배터리를 충전해야 했습니다. 식사 후 텐트를 치고 난 뒤 여러 캠핑카를 전전하다 드디어 가장 화려한 캠핑카에서 카메라 배터리 충전 허락을 받았습니다.

"근데 샤워 필요하지 않아요?"

한 눈에 나의 필요를 알아챈 남자는 샤워를 권유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 밤에는 샤워를 하지 못한 터라 찝찝했는데 잘 되었다 싶어 흔쾌히 제안에 응했습니다.

"갈렙이라고 합니다. 한국에서 왔고요."
"스튜어트(stuart)에요."

전기 엔지니어인 그는 영국에서 살고 있으며 회사에서 한 달짜리 휴가를 받아 부인과 함께 플로리다 마이애미부터 캠핑카 여행 중이었습니다. 그의 배려로 배터리를 충전하는 동안 온수에 샤워를 하고 나오니 몸도 마음도 시원해졌습니다.

"이제 좀 시원한가요? 배고프죠? 티본 스테이크 좀 구울테니 조금만 기다려요. 근데 배고픈 거 맞죠? 어때요?"

아까 샌드위치로 저녁을 때우긴 했지만 점심을 비스켓 하나로 설렁설렁 넘어가서인지 어딘지 모르게 허전한 구석이 있었습니다. 한국적 정서에 기대어 괜찮다고 말해볼까하다 텐트 안에서 주린 배를 진정시키며 애써 오지도 않는 잠을 청하고자 후회할 걸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듭니다.

"히히, 웰던으로 해 주세요."

여행을 하면서 한국적 마인드로는 서양인들과 온전한 이해가 소통되기 힘들다는 걸 느끼고 있었기에 가장 솔직한 것이 가장 최선이란 생각으로 언행이 바꾸어지고 있었습니다. 뭐랄까, 감정을 절제하고 겸손을 보이기보다는 감정이 자연스레 흘러들어가게 하는 상황에서 적극적인 교류를 그들이 더 편안해 한다는 사실을 알아갔던 것이죠.

"이건 그냥 소고기가 아니라 인디언들이 직접 기른 소고기이기 때문에 아주 맛있는 거거든요. 기대하세요."

부인을 대신해 직접 고기를 굽는 스튜어트에게서 누군가에게 정성이 가득 담긴 맛있는 식사를 제공하는 행복한 요리사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부인은 그런 스튜어트를 두고 자상한 남편이라며 애정어린 눈길을 보냅니다.

에피타이저로 샐러드를 먹고, 또 맛있는 스테이크를 먹고 난 후 디저트로는 과일과 아이스크림까지 완벽한 손님 대접 코스요리를 진행시킨 그들의 노고에 마음껏 박수를 보냅니다. 단지 사진기 배터리 충전시키러 와서 너무 융숭한 대접을 받아 그저 감개무량할 따름입니다.

스튜어트가 직접 요리해 준 T본 스테이크.
 스튜어트가 직접 요리해 준 T본 스테이크.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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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자전거 세계일주를 하는 거죠?"

식사 후 각자의 기호에 따라 커피와 콜라를 앞에 두고 서로의 나라에 대한 그리고 서로의 삶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한국 학교 학비가 비싸다는 소리는 영국의 사립학교 등록금 얘기에 불평은커녕 도리어 그들을 위로해 줘야 했지요. 영국의 중산층임에도 불구하고 대학생인 딸의 등록금이 만만찮게 다가오는지 누구보다 그런 부분에 대해 아쉬워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한국과 영국의 정서적 유대감을 이어주는 거의 유일한 매개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박지성 얘기로 포문을 열고 나서는 이야기 분야가 어줍잖은 영어 실력에도 여행·가정·사회·교육·정치 등으로 넘나들었습니다.

"그런데 갈렙은 왜 자전거 세계일주를 하는 거죠? 특별한 목적이 있나요?"

커피향을 음미하던 부인이 잔을 내려놓고 물어옵니다. 그리고 나는 마시던 콜라캔을 내려놓고서는 대답합니다.

"뭐 따로 국제적인 이슈가 될 만한 거창한 메시지는 없고요. 하지만 도전을 주고 싶었어요. 물질적인 세계관에 갇혀 눈에 보이지 않는 소중한 가치를 바라보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특별히 청년들에게 가슴에 남겨질 수 있는 무언가에 대해 나누고 싶었거든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인 사랑과 꿈, 그리고 감추어져 있는 보석같은 여러 이야기들…. 아마 이 여행을 통해 그러한 것들을 얻을 수 있을꺼란 기대를 했던 겁니다."

"그렇군요. 그 마인드가 참 좋은데요? 그리고 앞서 말한 건 영국도 마찬가지에요. 요즘 영국인들의 최대 관심은 바로 돈이죠. 난 도심에서 떨어진 시골에서 중산층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재산이나 지위, 그리고 심지어는 사는 지역에 따라 보이지 않는 차별이 만연한 게 영국이에요. 런던에서 화려한 옷차림으로 고급 레스토랑 등을 전전하면 사람들로부터 대우받고 인정받지만 그렇지 않고 소탈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좀 무시되는 경향이 있죠."

"맞아요. 한국도 크게 다르진 않죠. 자신의 능력에 비해 씀씀이가 너무 큰 경우가 많아요. 개개인의 취미라면 비판할 의도는 없지만 스타벅스 커피의 경우 내겐 너무 부담되는 기호식품이거든요."
"스타벅스 커피요? 와우! 그거 결코 싸지가 않죠. 나도 부담스러워 그냥 집에서 타 먹잖아요. 하하."
"푸하하. 참 스튜어트, 그런데 부인은 어떻게?"
"오, 이 사람은 스코틀랜드 출신이에요. 난 잉글랜드. 지역 사이는 앙숙이긴 하지만 사랑하기에 우리에겐 아무런 문제가 되진 않죠. 그렇지 자기? 대학에서 만났거든요. 우린 둘 다 영문과 출신이에요."
"그래요? 전 국문과인데. 과가 같네요?"
"와, 그렇군요. 하하."
"가만 있자,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와 코난 도일. 그리고 또 누가 있더라?"
"오스카 와일드·버지니아 울프·조지 오웰…. 뭐 찰스 디킨스 등도 유명하죠."

역시 영문과 출신답게 쑥쑥 작가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얘기를 나누는 내내 두 사람의 여유로운 표정은 너무 행복해 보입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는 두 시간 동안 계속되었고 충전이 끝난 밤 10시 쯤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오늘 너무 즐거웠어요. 그리고 당신의 호의에 너무 감사드려요. 덕분에 개운하니 텐트에서 잠을 청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뱃속이 빵빵해서 잠도 잘 올 것 같고요."
"별 말씀을. 오히려 우리가 당신을 만나 더 기뻤어요. 그리고 잘 먹어줘서 고맙고요."

마지막 인사를 나누기 위해 반갑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의 손과 나의 손이 친밀감 있게 공중에서 몇 번 흔들어지고 난 뒤 지금까지 행했던 악수와는 다른 느낌이 전해졌습니다. 손에 걸리는 게 있어 펴보니 세상에! 100달러짜리 지폐가 그것도 5장이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까?

"뭐예요, 스튜어트? 나 괜찮아요. 경비 충분히 있어요."

"아, 갈렙, 오해하지 말아요. 그냥 이 여행이 무사했으면 하고 그리고 소망하는 것에 대해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어서 그러는 거에요. 그러니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아까 아내랑 상의해서 준 거니 유용하게 잘 쓰도록 해요. 건투와 축복을 빌께요."

아, 세상에 이런 경우가 어디 있답니까? 카메라 배터리만 충전시켜주어도 감사할 판에 샤워에 식사 대접까지 모자라 경비 후원까지. 몇 초간 예상치 못한 당황스런 상황에 맞닥뜨려 말을 잇지 못하다가 너무 고맙기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다시 내밀었습니다.

"스튜어트, 정말, 너무, 진짜 고마워요. 하지만 마음만 받을게요. 여행자가 여행자를 돕는 법이 어디 있답니까? 당신도 캠핑카 빌리고 여기저기 돌아다닐려면 꽤 많은 비용이 소요될 텐데. 아까도 말했지만 난 그래도 젊고 또 경비 생각 별로 안 하고 다니니 걱정 마세요. 이해하죠?"
"갈렙, 우린 여행할 때 말이죠, 경비에 구속받지 않아요. 사치하는 건 아니지만 예산 없이 즐기는 게 우리의 꿈이었거든요. 그리고 회사에서도 충분한 보너스를 받았으니 염려하지 말아요. 그건 우리들의 호의에요. 오늘 당신을 만나서 너무 반가워서 그러는 거니깐 거절은 마세요."

스튜어트는 부드러운 말투 속에 되돌려 받을 의사가 없음을 피력하며 분명한 선을 그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30초 정도 말을 꺼내지 못하고 멍하니 달러 지폐만 만지작거립니다. 그 때 부인이 넌지시 속삭입니다.

"아까 미국 자전거 여행 중에 많은 천사들을 만났다고 했죠? 그냥 우리도 그 중에 한 천사라고 생각해주면 되요. 그리고 우린 여행 막바지이지만 갈렙은 이제 거의 시작이잖아요? 부담스러워 말고 주머니에 넣어요. 그래야 우리도 마음이 편해지니까. 네?"

가슴 따뜻한 감동의 이야기 주인공 스튜어트(stuart) 부부. 그들과의 대화 중에 난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있었고, 그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조용히 보여주고 있었다.
 가슴 따뜻한 감동의 이야기 주인공 스튜어트(stuart) 부부. 그들과의 대화 중에 난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있었고, 그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조용히 보여주고 있었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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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들이 후원해 준 500달러를 들고 인사를 한 후 어둠 속의 나무 사이를 헤쳐 텐트로 돌아왔습니다. 들어와서 누우니 도무지 어떻게 해야할 지 그저 가슴만 먹먹해져 왔습니다.

이리저리 뒤척이며 생각해보니 난 그들에게 두 시간동안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목청 높여 말하고 있었고, 그들은 나에게 같은 시간동안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조용히 보여주고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또 대인배 앞에서 다듬어지지 않은 미숙한 젊은 혈기를 내보이며 부끄러운 치부를 드러내지 않았는지….

'촐싹대왕 문종성 이놈아.'

무척 피로했음에도 잠이 오질 않습니다. 아니 잠을 이룰 수조차 없을 만큼 이 감동의 감정이 온 몸에 단단히 휘감겨 빠져나가질 못합니다. 별안간 사흘 전의 일이 떠올랐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그 녀석을 조금이나마 돕고자 했던 일. 어떻게 우연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짜 맞추어져 있는 듯한 액수로 벌어진 믿을 수 없는 사건. 왜 이런 일이….

오래도록 뜬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다가 결국 사랑은 소통임을 알았습니다. 행복이 내 안에만 머물러 있는 건 기쁨이 될 수 있지만 누군가와 나누지 않으면 결코 사랑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스튜어트로 인해 나와 내 후배, 그리고 스튜어트 모두가 서로 다른 상황 속에서도 가슴 따뜻한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믿을 만 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만이 세상은 숨겨둔 보석 같은 선물을 주는 것 같습니다. 이런 게 바로 여행을 통해 얻어지는 가슴 벅찬 사랑의 현현 아닐까요?

'고마워요 당신의 사랑, 그리고 당신으로 인해 또 한 컷을 장식하게 된 아름다운 추억. 스튜어트! 지금 내 모습은 부족하더라도 언젠가는 꼭 누군가에게 그 사랑 다시 전해주기를 부끄럽지 않게 약속하겠습니다. 영국 가면 또 봐요.'

장엄한 광경의 그랜드 캐니언.
 장엄한 광경의 그랜드 캐니언.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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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로움의 극치 그랜드 캐니언.
 경이로움의 극치 그랜드 캐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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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격에 빠져 뒤척이는 고요한 시간. 1시, 2시, 3시. 하염없이 시계바늘만 쳐다봅니다. 아무래도 뜻밖의 선물로 인해 오늘 밤 잠자기는 틀린 것 같습니다. 틀린… 것… 같습니다.  설핏 잠이 들었는데 칼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이봐, 갈렙! 일어나라구! 난 약속은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사람이야. 벌써 6시가 다 되어간다네. 갈렙, 일어난거야? 난 몰라. 아이스박스 물이 아직도 차가운 줄 알아두게!"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뉴스파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는 http://www.vision-trip.net 입니다.



태그:#세계일주, #세계여행, #문종성, #자전거여행, #미국횡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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