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우금치 고개를 향해 치달아 올라가는 동학 농민군은 없었다. 해가 질 무렵, 겹겹이 쌓인 동학 농민군들의 시체 사이를 관군과 일본군이 긴 대검을 끼운 총을 들고 일렬로 늘어서 지나가기 시작했다. 시체를 발로 차고 다니는 관군과 일본군들 사이로 겨우 숨이 붙어 꿈틀거리는 동학 농민군이 있으면 그 목줄기로 대검이 사정없이 꽂혀 버렸다. “악!” 이따금씩 울려 퍼지는 비명소리에 김학령은 눈을 번쩍 떴다. 그는 자신의 목숨이 아직 붙어있는 것에 대해 신기해하면서도 가끔 울려 퍼지는 비명소리의 이유를 몰라 마음이 불안했다. 김학령은 목을 아주 조금씩 돌려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던 곳을 바라보고는 절망했다. 관군과 일본군의 행렬은 이미 가까이 와 있었다. 김학령은 눈을 질끈 감고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라도 들릴까 불안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제발 이대로 지나갔으면!’ 저벅저벅 울리는 군화소리에 맞춰 김학령의 숨은 가빠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거친 숨소리와 함께 군화발 하나가 엎어진 김학령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김학령은 움찔거리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다리는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 거친 숨소리가 떠날 줄을 모르자 김학령은 마침내 모든 것이 끝났음을 직감했다. 김학령은 차라리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의 얼굴이나 한번 보자는 심정으로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김학령의 눈앞에는 총에 끼운 대검을 겨누고 김학령을 노려보는 낯모르는 병사가 서 있었다. 김학령과 그 병사의 눈이 마주치자 병사는 눈을 부릅뜨며 서서히 대검을 치켜 올렸다. ‘고통 없이 보내다오.’ 김학령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마지막 순간을 기다렸다.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군화발 소리가 김학령의 귓전을 스치고 지나갔다. ‘왜?’ 병사는 대검을 김학령에게 찌르지 않고 옆에 죽어 있는 늙은 농민의 시체를 향해 내어찌른 후 지나쳐 버렸다. 사람의 눈을 마주보며 죽이기가 차마 어려웠던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김학령은 한동안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밤하늘을 보며 누워있었다. 오줌을 지린 탓에 바지속이 축축했지만 김학령은 그런 거야 아무래도 좋았다. ‘난 살았어.’ 김학령은 그 이름모를 병사를 생각하며 살려줘서 고맙다고 끊임없이 되뇌었다. 해가 진 후 한참 후에야 김학령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조심스럽게 움직였다가 마침내 조심스럽게 일어섰다. 죽음, 죽음, 죽음. 사방은 온통 죽음이 감싸고 있었다. 김학령은 괴괴해진 주변을 돌아보며 돌 하나를 주워 움켜쥐었다. 행여 사람시체를 노린 들짐승이라도 몰려온다면 김학령은 그 놈에게라도 화풀이를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난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김학령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다가오는 위험을 얘기해 주지도 못했고 내가 그 위험에서 빠져 나가지도 못했어.” 김학령의 낮은 말소리는 밤공기를 타고 멀리까지 전해졌다. 그 순간 시체더미 사이에서 누군가가 불쑥 일어났다. “으악!” 너무나 놀란 김학령은 펄쩍 일어서려 했지만 총상을 입은 다리로 인해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잠시 정정이 흐른 후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 살아 있소?” 김학령은 그 말에 놀란 가슴이 약간 진정되며 왠지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아무렴 살아 있으니 이러는 것이지.’ 상대방은 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조심스레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김학령은 그것이 무기임은 짐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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