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총선을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영국을 바꿀 비전이 있고, 이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것이다."
영국이 전당대회로 촉발된 조기 총리 선거 논란으로 시끄럽다. 고든 브라운 총리는 더 이상 논란이 확산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2009년까지는 총리선거가 없을 것"이라며 진화에 나섰다. 하지만, 이같은 브라운 총리의 선언은 오히려 "자신감이 없다", "결단력이 없다", "약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는 등의 강한 역풍을 받고 있다. 큰 정치적 '위기'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영국의 가을은 정치의 계절 영국의 가을은 '정치의 계절'이라고 할 만하다. 영국의 정치를 이끄는 주요 정당들의 전당대회가 매년 가을에 열린다. 이 전당대회는 각종 정치 의제가 분출, 불꽃 튀기는 정치 논란으로 번지곤 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지난 9월 23일부터 27일까지 자유민주당을 시작으로 집권당인 노동당의 전당대회가 23일부터 27일까지 본머스에서 개최됐다. 마지막으로 노동당을 추격하는 보수당의 전당대회가 지난 30일부터 이달 3일까지 열렸다.
전당대회를 통해서 각 정당들은 나아가야 할 정책을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인다. 한 해 동안의 각 정당의 방향과 미래 계획을 짜는 셈이다. 하지만 골치 아프게 심각한 토론만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영국 사람들답게 편을 나눠서 축구경기도 하고, 저녁에는 술도 마시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전당대회의 백미는 역시 당수의 연설이다. 당수가 등장하는 순간, 수많은 플래시가 일제히 터지고, 당원들은 일순간 환호한다.
당원들은 당수의 연설을 통해 자기 당의 1년간의 주요 정책 방향과 골자 등을 듣고, 승리를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한다. 이번 전당대회도 예년과 마찬가지로 언론의 집중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영국 국민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국민들은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당의 정책 등을 듣고, 지지를 할 것인지 여부를 다시 점검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지지율도 전당대회에 따라 크게 영향을 받곤 한다.
안정적 이미지 보여준 노동당 전당대회... 입 굳게 다문 브라운 총리 한국에서 대통령 선거로 시끄럽듯이 영국에서도 이번 전당대회의 가장 큰 쟁점은 '조기 총리선거' 여부에 있었다. 과연, 고든 브라운 총리가 조기 총선을 실시할 것인지에 언론과 국민의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고든 브라운 총리는 이번 노동당 전당대회에서 국민들에게 주택을 공급하고, 의료와 교육 문제 등에 있어서 진전을 이루겠다고 다짐했다. 특히, 외교 문제는 유엔과 세계은행 등 국제기구의 역할을 바꿔서 세계의 환경문제 등에도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영국 언론들은 정책보다는 과연 그가 총선을 실시할 것인지에 대해 전당대회 내내 신경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브라운 총리는 끝내 조기 총선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언론들은 노동당 전당대회 직후, 국민들의 정당 지지도를 조사했다. 주간 <옵져버>는 지난 달 29일 노동당 41%, 보수당 34%, 자유민주당 16%로 그 이전보다 노동당의 지지율이 높아졌다고 보도했다.
특히, 응답자의 60%는 "브라운 총리가 캐머런 당수(13%)에 비해서 더욱 더 위기관리 능력이 있다"고 답했다. 이같은 브라운의 인기상승에는 그가 연설을 통해서 '영국'이라는 발언을 80번이나 하는 등 총리로서 전체 국민을 아우르는 안정감을 보여줬고, 총리 취임 이후에 구제역 파동, 홍수 등 각종 위기를 비교적 잘 처리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이에 따라, 노동당 내부에서는 "이번 기회에서 아예 조기에 총선을 해서 야당의 총선 요구를 근본적으로 불식시키자"는 의견이 비등해졌다.
"당장 총선하자! 자신있다!"... 박빙승부 만든 보수당 전당대회 이 같은 나쁜 여론조사 결과는 보수당에게 전당대회를 열기도 전에 '찬물'을 끼얹는 격이 되었다. 그러나, 캐머런 당수는 나쁜 여론에도 불구하고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대본이 없이 간단한 메모만 준비한 캐머런 당수는 자신의 정책들을 조목조목 설명하면서, 브라운 총리가 선거를 피하지 말고 "국민들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조기 총선을 강력히 요구했다.
"10년간의 깨진 약속에 대해 국민이 심판할 수 있도록 해라. 누가 정말 우리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 노력할 수 있는 지 국민들이 결정할 수 있도록 해라. 누가 이 나라에 필요한 변화를 이끌 수 있는지 국민들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해라!"
청중들은 일제히 일어섰고 아낌없이 박수 갈채를 보냈다. 캐머런 당수는 여기에 멈추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갔다. "총리 선거를 하자. 우리는 싸울 것이다. 영국은 승리할 것이다."
젊은 캐머런 당수의 패기 넘치는 연설이 영국 국민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의 전당대회 마지막 날 연설은 영국 언론을 통해서 전달됐고, 그의 젊은 열정과 패기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전당대회 효과로 보수당의 지지율은 단숨에 올라갔다. 일간 <데일리 텔레그라프>와 방송 <채널4>가 공동 실시한 지난 4일의 여론조사에서 노동당 40%, 보수당 36%, 자유민주당 13%로 그 격차가 좁아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갈수록 보수당의 지지도는 높아지고 있다. 6일 가디언이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노동당과 보수당의 지지율은 38%로 동률로 나타났다. 불과 일주일 만에 7%에 달하던 지지율 격차가 좁혀진 것.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캐머런의 지지율을 폭등했고, 선데이 타임즈는 7일 보수당(41%)이 오히려 노동당(38%)을 3% 앞섰다고 보도했다.
영국 언론들은 캐머런 당수의 열정적인 연설 외에도 이번 전당대회를 통해서 발표된 각종 세금 감면 정책의 효과에 힘은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보수당은 상속세를 내는 기준인 30만 파운드를 100만 파운드로 상향 조정, 소수 백만장자들만 상속세를 내겠다고 공약하는 등 대규모 감세 정책을 발표했다.
이 정책으로 인해 900만 명의 가족들이 혜택을 볼 것이라고 보수당은 홍보해 왔다.
급한 불 끄기 나선 브라운 총리... 강하게 반발하는 야당일간 <타임즈> 등 보수언론은 캐머런의 지지상승에 힘입어 노골적으로 브라운 총리를 압박하고 있다. 타임즈는 '진흙 같은 구덩이를 피하라, 고든. 용감해져라. 어서 해라(Avoid the slurry pit, Gordon. Be brave. Do it)'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당장 오는 11월에 선거를 실시할 것을 촉구했다.
브라운 총리 입장에서는 최근의 조기 총선 논란이 내심 못 마땅할 것이다. 토니 블레어 전 총리의 그늘에 가려져 10년간을 기다렸다가 어렵사리 총리가 되었는데, 불과 취임 약 100일만에 총선 요구를 강하게 받고 있으니 말이다.
그는 총선 요구가 계속 확산되자,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브라운 총리는 방송 <BBC>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우리 국민들과 나라에 커다란 변화를 이끌고 이를 보여줄 것"이며 "이후에 선거의 기회를 갖고자 한다"고 강조했다. 오는 2009년까지 총선은 없을 것으로 언론은 분석하고 있다.
캐머런 보수당 당수는 즉각 브라운 총리를 강하게 비난하고 나섰다. "총리는 매우 약하고 결단력이 없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는 선거를 질질 끌려고만 해왔고, 이제는 아주 굴욕적으로 꽁무니를 빼고 있다"고 말했다.
자유민주당 당수인 맨지즈 캠벨도 "브라운 총리가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노동당의 이익만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일간 <가디언>은 브라운 총리가 "첫번째로 정치적인 위기(crisis)를 맞이하고 있다"며 노동당 내부의 동요와 야당 등의 강한 반발을 안정시켜야만 하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취임 100일만에 강한 비난과 공세에 부딪힌 고든 브라운 총리. 10년을 기다리면 준비한 그가 얼마나 이 위기를 잘 헤쳐 나갈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