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이 바둑판에 있는 임의의 점 위에 흑·백 바둑돌을 교대로 놓으면서 집을 많이 차지하는 승부놀이인 바둑. 현재 국내 바둑 인구는 어림잡아 1000만 명이라고 한다. 국민 다섯 명 가운데 한 명은 바둑을 둔다는 이야기다.
이런 독자층이라면 바둑만화를 그리면 꽤 팔린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국내 바둑만화 가운데 그런 만화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오히려 바둑 만화하면 일본 만화 <고스트 바둑왕>이 더 유명한데, 그건 국내 작품은 바둑을 알아야 볼 수 있는 거라서 그렇다.
전문만화일수록 독자에게 친절해야 한다. 허영만 화백 <식객>은 그런 면에서 참 좋은 본보기다. 음식 만화답게 음식에 대한 유래는 물론 음식을 제대로 먹는 방법, 음식을 만드는 방법까지 그려서 나타냈다. 이런 친절한 만화가 많이 나와야 독자들이 만화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고스트 바둑왕>(원제 ‘히카루의 바둑’)은 글을 쓴 유미 훗타가 일본기원 프로 5단인 우메자와 유카리 감수를 받아 완성도를 높였는데, 유미 홋타 자신도 아마 3단 실력이다. 이 작품으로 일본엔 바둑 열풍이 불었다. 2001년 아사히신문이 주최하는 소년소녀 명인 바둑대회에 2300명이었던 어린이 참가자가 2003년에 6500명으로 늘었고, 프로기전 활성화로 2001년까지 8년 연속 적자이던 일본기원은 2002년에는 4000만 엔(원화 3억 2천만 원) 흑자를 기록했다고 한다.
국내에서도 이 만화 때문에 바둑에 관심이 생겼거나 배우게 됐다는 사람들도 많았다. 한창 이 작품이 만들어지고 있을 때 원작자인 유미 홋타가 한국에 찾아와 한국 바둑을 자세히 보고 갔고 그것은 한국 바둑선수를 그릴 때 쓰였다.
그림을 그린 다케시 오바타는 그동안 <바람의 검심>을 그린 노부히로 와츠키 스승으로만 알려졌는데 이 작품으로 제자에 뒤지지 않는 유명세를 탔다. 그 뒤 <데스 노트>라는 작품으로 연타석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일본은 이처럼 만화로 바둑 바람을 불게 했는데, 그럼 바둑 실력이 세계 제일이라는 우리나라는 어떨까. 물론 <고스트 바둑왕>처럼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바둑 만화가 있다. 전문만화라서 그런지 바둑 만화를 그리거나 글을 쓴 작가들은 하나같이 바둑 실력이 상당하다.
‘발바리’ 하면 떠오르는 작가 강철수 화백은 꽤 오래 앞서 그렸던 <바둑스토리>와 그 후속편이지만 전혀 새로운 이야기인 <신(新) 바둑스토리>를 그렸다. 바둑 실력은 아마 5단으로 웬만한 프로기사 저리 가랄 정도다. 월간 <바둑생활>에 <상수는 몰라>라는 바둑만화를 연재하기도 했던 시사만화가 윤필씨는 아마 3단 실력을 자랑한다.
허영만 화백 작품 <살라망드르>는 프로에 입단하기 위한 노력, 바둑에 대한 열정이 잘 나타나있다. 글은 쓴 김세영씨 역시 바둑 실력이 뛰어나다.
한 스포츠신문에 연재되고 있는 임희재 그림에 바둑 아마 6단 실력을 가진 이면이 글을 쓴 <꾼>은 바둑계 실존인물이 만화에 직접 나오는데 바로 ‘반상의 승부사’ 이창호다. 세계대회 23연승을 가지고 있는 한국 바둑실력은 세계 제일이다. 이 기록을 내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이창호 9단은 중국과 일본이 가장 두려워하는 바둑기사이기도 하다.
한 포털에 연재되고 있는 <바둑삼국지>는 실화를 소재로 한 팩션이다 보니 조훈현, 서봉수와 같은 쟁쟁한 한국바둑 실력자들이 나온다. <불친절한 헤교씨>를 그렸던 박기홍, 김선희 부부 작품으로 전작도 그렇지만 이번에도 흑백출판만화 형태를 고집하고 있다. 원작은 조훈현 조카이자 바둑전문 소설가인 김종서씨로 아마 5단 실력이다. <꾼>에 이창호, <바둑 삼국지>는 조훈현. 스승과 제자가 이번엔 만화로 겨루는 형국이다.
강철수 화백은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우리나라 만화 환경은 콘크리트 위에다 흙을 살짝 뿌려놓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러나 어쩌랴, 그 콘크리트에서도 싹을 틔우길 바라며 열심히 그리는 만화가들이 있는 한 최소한 희망은 잃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