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인천시는, 중ㆍ동구 둘레를 놓고 '도심정화사업'을 벌여 골목집과 재래시장을 몰아내고, 동구 배다리 둘레는 '너비 50미터짜리 산업도로'를 골목집 한복판에 놓으려는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대단한 이름이나 많은 돈벌이나 큰 힘 하나 없이 조용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동네가 이곳 인천 중ㆍ동구입니다. 경제개발과 경제성장하고는 조금도 안 어울릴 수 있겠지만, 온삶을 바쳐 땀흘려 일하고 조그마한 몸뚱아리 드러누울 작은 집 한 칸이나 방 한 칸 마련하여 살아가는 사람들한테도 '내 집에서, 내 땅에서, 조용하면서도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다가 숨을 거두어 흙으로 돌아갈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라님 정책을 한 번도 거스르지 않고 허리 구부정할 때까지 살아온 사람들 숨결을 사랑합니다. - 배다리 골목길 이야기를 띄우면서.
'슈퍼'라는 두 글자를 벽에 붙여놓지 않았다면, 이곳이 가게인지 아닌지 모르고 지나치기 좋습니다. 이 조그마한 가게에 들러 과자부스러기나 막걸리 한 병 사 가는 사람이 있다면, 이 동네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올 4월에 인천으로 돌아와 배다리에 살림집과 도서관을 마련한 다음, 처음으로 알아본 가게가 이곳, '할아버지 가게' 또는 '할머니 가게'였습니다. 가게를 할아버지가 지키고 있으면 '할아버지 가게'라 하고, 가게를 할머니가 지키고 있으면 '할머니 가게'라고 말합니다. 두 어르신께서는 번갈아 가며 자리를 지킵니다. 가게 옆으로 난 얕은 언덕길을 넘으면 창영초등학교가 있고, 그 옆으로는 영화정보고등학교(옛이름 영화여상)가 있습니다. 이곳 학교 아이들은 공부를 마치면 절반쯤은 이 구멍가게 앞으로 지나갑니다. 아이들은 가게 앞을 그냥 지나쳐 갑니다.
생각해 보면, 저도 이 구멍가게를 단골로 드나들 일이 아니었다면 그냥 지나쳤겠지요. 골목길 사진만 찍었다 해도 그냥 지나쳤을 테고요. 저 또한 이 동네 배다리에 뿌리를 내리고 지내기 때문에 문을 스르륵 열고 들어가, "안녕하셔요!" 하고 인사를 하고 몇 가지 물건을 장만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10월 8일, 저녁나절에 텔레비전으로 역사연속극을 보던 할아버지가 "자네, 꽃 사진 찍지 않을 텐가?" 하면서, "우리 집 옥상에 꽃이 예쁘게 잘 피었는데, 한 장 찍지?" 하고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우리가 물건을 다 고른 뒤, "자, 가 보자고" 하면서 가게문을 잠그시더니, 가게 뒤쪽으로 이끌고 가십니다. 위쪽을 보라고 해서 올려다보니, 어두운 가운데에도 무언가 흰꽃이 높이 뻗어난 모습이 보입니다.
할아버지는, "꽃 예쁘지? 다른 집에는 저 꽃이 없어. 우리 집에만 있어" 하면서 웃습니다. "그러네요. 저도 이 동네 두루 다녀 보았지만 저런 꽃은 처음 보았어요." "어때? 사진 찍을 만하겠어?" "그럼요. 오늘은 어두워서 못 찍고 내일 아침이나 낮에 다시 올게요." "아침에는 내가 없을지 몰라. 내가 없으면 할머니한테 말하고 올라가서 찍어."
이튿날 아침, 일산 나들이를 하기로 하고 길을 나섭니다. 길을 나서며 우체국에 들러 편지 한 통 띄우고 구멍가게로 찾아갑니다. 마침 할아버지가 계십니다. "어, 왔어? 자, 이쪽으로 와" 하면서 가게 안쪽 문을 엽니다. 안쪽 문으로 들어가니 쌀을 나르는 튼튼한 짐자전거가 서 있습니다. 짐자전거 앞으로 조그마한 쇠계단이 붙어 있고, 쇠계단을 타고 올라 유리창문 하나를 열고 옥상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한 계단 한 계단 밟으면서 옥상으로 올라갑니다. 할아버지는 앞쪽에 있는 꽃그릇 하나를 가리키고, 길쭉하게 줄기가 뻗고 흰꽃이 조롱조롱 달린 꽃을 보라고 합니다. 이야, 가까이에서 보니 더 함초롬하네요. 구름이 우중충하고 날이 뒤숭숭하지만, 빛깔사진으로 몇 장 담습니다. 그러나 썩 빛느낌이 좋아 보이지 않아 흑백사진으로도 두어 장 찍습니다. 오늘 날씨로는 흑백사진이 낫겠군요.
흰꽃 사진을 다 찍은 뒤 옥상을 휘 둘러봅니다. 꽃그릇이 참 많습니다. 길가에서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꽃그릇입니다. 앞으로는 '너비 50미터짜리 산업도로'를 낸다며 깊게 파놓은 붉은 땅이 보입니다. 오른쪽으로도 그 산업도로 갈퀴 자국이 보입니다. 옥상 안쪽으로 들어가니, 이곳에도 가지런히 놓은 온갖 꽃그릇이 있고, 옥상 끄트머리에는 한 줄로 밭둑을 길게 마련하고 나무를 심어 놓으셨네요. 여러 가지 열매나무와 꽃나무가 자랍니다. 석류나무도 있습니다. 통통하게 알이 여문 석류를 살며시 만져 봅니다.
이 온갖 푸성귀와 들꽃과 나무를 가꾸느라 참 바쁘시겠군요. 당신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고단한 일이 아니라 즐거운 돌봄으로 느끼실까요. 가만히 들여다보고 살펴보고 바라보는 동안, 두 분 땀방울과 손길이 얼마나 짙게 묻어나 있는가 살갗으로 느껴집니다.
"뭘 그렇게 많이 찍어?" 하면서 할아버지가 옥상으로 올라옵니다. 할아버지는 흰꽃 사진 하나면 되는데 다른 꽃이며 푸성귀는 왜 찍느냐고 한 마디 하십니다. 하지만 저는 흰꽃은 흰꽃대로 좋고 푸성귀는 푸성귀대로 좋으며 석류는 석류대로 들꽃은 들꽃대로 좋은걸요. 빨랫줄은 빨랫줄대로 좋고 빨래집게는 빨래집게대로 좋습니다.
가게 앞모습을 사진으로 담으려고 할 때, 할아버지는 "가게 앞은 찍지 마" 하고 손사래를 칩니다. 할아버지가 손수 가꾼 흰꽃처럼, 가게 구석구석 깨끔하도록 건사한 이 모습이 있는 그대로 좋은데. 어쩌면 할아버지와 할머니 두 분이 꾸려 나가는 이 구멍가게는, 온갖 들꽃과 열매나무와 푸성귀 때문이 아니라 두 분 땀방울 때문에 애틋하거나 살갑게 느껴지는지 몰라요.
가게 안쪽이며 옥상이며 가게 앞길이나 둘레며 자그마한 종이조각이나 비닐봉지나 담배꽁초 하나 없습니다. 이 모두 구멍가게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쓸고 닦고 치우고 해서일 테지만, 구멍가게 할아버지와 할머니뿐 아니라, 앞집 아저씨도, 옆집 아주머니도 함께 쓸고 닦고 치우기 때문이겠지요.
문득,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이곳에서 당신들 가게를 얼마나 오랫동안 꾸려 왔는지 궁금해집니다. 구멍가게를 하기 앞서는 무슨 일을 하셨는지 궁금해집니다. 구멍가게 옆으로는 쌀집이 붙어 있는데, 예전에는 쌀집을 하셨을까요. 가게 안쪽에 있는 그 짐자전거로 쌀을 실어 나르면서 땀을 흘리셨을까요.
다음에 또 들르기로 하고 가게 문을 나섭니다. 다음해와 다다음해에도 흰꽃 구경을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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