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일일이 눈을 맞추며 이름으로 출석을 부르고 난 뒤에 출석부를 덮고 막 수업을 시작하려는데 한 아이가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은 왜 매일 출석을 부르세요?” “그럼 수업시간에 출석을 불러야지 안 불러?” “그냥 안 온 애들만 물어보시면 되잖아요.” “응, 선생님 머리가 안 좋아서 너희들 이름을 외우려고. 덕분에 이름 다 외웠잖아.”
“이름 다 외우셨으면 이제 출석 안 부르셔도 되잖아요?” “머리가 안 좋아서 이름 안 부르면 또 잊어버릴 거야.” “이름을 꼭 외우셔야 해요?” “이름을 모르면 너라고 불러야 하잖아. 너라고 하는 것이 좋아? 이름으로 불러주는 것이 좋아?” “이름으로 불러주는 것이 좋지요.”
“그리고 이름을 모르면 야, 너 왜 떠들어! 이렇게 말해야 하잖아. 근데 이름을 알고 있으면 민주야, 수업 좀 하게 좀 잔잔해질 수 없니? 이렇게 부드럽게 말할 수 있잖아.” “아…! 근데 선생님은 수업시간마다 출석 부르는 것이 귀찮지 않으세요?” “전혀. 너희들과 눈도 맞추고 좋은데 뭘. 그리고 선생님이 본래 성실한 사람이 못 되서 뭘 하나 끝까지 해본 것이 별로 없어. 그래서 너희들 이름 부르며 눈 맞추는 거라도 끝까지 해보려고.” “선생님, 성실하시잖아요.” “글쎄. 지금은 옛날보다 조금 성실해졌나?” “옛날엔 불성실하셨어요?” “응. 그래서 가끔은 과거로 돌아가서 다시 삶을 시작하고 싶을 때도 있어. 불가능한 일이지만…. 근데 내가 돌아가고 싶은 과거가 언제인지 알아?” “언젠데요?” “고등학교 1학년.” “그럼 저희들 하고 같은 학년이 되겠네요?” “그렇지. 선생님은 고등학교 1학년으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한 꿈이지만 너희들은 지금 고등학교 1학년이야.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그래서 너희들이 얼마나 부러운지 몰라. 자, 수업 시작하자.”
가을이라서 그런지 요즘 몇몇 아이들 눈빛이 조금씩 영글어 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제법 긴 호흡으로 대화가 오고가기도 한다. 삶의 어떤 과정에서 뒤틀어졌을까, 싶을 만큼 행동거지가 거칠거나 생각이 없어 보이는 아이들고 교사의 기대를 늘 저버리지만은 않는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아이를 칭찬해주고, 천하를 얻은 듯 그 아이로 인해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아이는 조금씩이나마 변화를 보여준다. 아이들과 대화를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며칠 전에도 나는 두 아이와 대화를 했다. 그 중 한 아이는 수업시간에 같은 분단에 속한 급우들에게 수업을 하지 말고 엎드려 자라고 말하여 수업 중이던 여교사를 화나게 했고, 다른 한 아이는 수업시간에 너무 떠든다고 나무라자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그러면 학교를 그만 두면 될 게 아니냐고 되레 소리를 질러댔다. 급기야는 학생부장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와 사태를 수습해야할 정도가 되었다. 내가 두 아이의 담임이 된지 불과 이틀 만에 터진 일이었다. 원래는 부담임이었는데 담임선생님이 지병으로 병원에 장기간 입원하시는 바람에 대신 담임 업무를 맡은 것이었다. 먼저, 급우들에게 엎드려 자라고 말한 상구(가명)에게 자신을 해명할 기회를 주었다. 그 아이는 전날에도 다른 여교사와의 문제로 나에게 지도를 받았고, 그때도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말을 하여 한순간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진실을 받아들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제가 잘못했어요. 그런데 그게…. 지난번에도 L선생님한데 수업시간에 떠든다고 혼난 적이 있었어요. 그때 L선생님이 그렇게 떠들려면 차라리 엎드려 자라고 했어요. 그래서 애들에게 그렇게 말한 거예요. 떠들려면 엎드려 자라고요. 죄송해요.” 그의 말이 진실이라면 녀석은 급우들을 선동하여 후배 여교사에게 반항하거나 수업을 훼방할 뜻은 없었다는 말이 된다. 오히려 아이들이 떠드는 것 때문에 힘들어하시는 선생님을 도와줄 한 가지 방법으로 급우들에게 그렇게 말을 했을 수도 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엉뚱한 발상이긴 하지만. 나는 녀석의 말을 믿기로 했다. 믿고 싶어서가 아니라 최근 녀석에게 믿음이 가는 구석이 생긴 까닭이었다. “난 네 말을 믿는다. 요즘 네가 수업시간에도 많이 차분해지고 선생님과의 약속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면 믿음이 간다. 하지만 지금 네가 한 말을 다른 선생님들께 말씀드리면 절대 믿지 않으실 거야. 그것은 선생님들의 잘못이 아니야. 다른 선생님들은 널 잘 모르시니까 객관적인 정황만 보고 판단하시는 것은 당연한 거야. 네 말이 진실이라면 그것을 증명해보여야 하는 책임도 너에게 있어. 앞으로 L선생님께 잘해 드려. 그것만이 너의 진실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야.” 다른 한 아이는 그날 어떤 개인적인 일로 기분이 나빠 있어서 L선생님에게 말을 함부로 했다고 잘못을 시인했다. 하지만 나의 추궁에 잘못을 인정했을 뿐, 그 잘못을 다시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준 것은 아니었다. 자기가 한 일을 아직도 잘 모른다고나 할까? 나는 형수(가명)를 자리에서 일어나게 한 뒤에 전체 학생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며칠 전에 형수는 담임선생님이 큰 수술을 받고 회복중이시니까 며칠만이라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학교생활을 잘하자고 철썩 같이 약속을 해놓고 약속한 다음날 피시방에서 있다가 3교시에야 학교에 왔어요. 그날 선생님은 형수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다시 한 번 말로 타이르고 약속을 받았어요. 그 후로 나흘 동안 형수는 약속을 잘 지키고 있어요. 선생님이 매를 대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약속을 지킨 것은 형수에게 인격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나는 형수를 믿어요. 그런 믿음이 있기 때문에 L선생님과 학생부장 선생님께 말씀드려서 내가 지도를 해보겠다고 한 거예요.”
그날 나는 형수가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주었다. 가해자로서 피해자의 고통과 아픔에 무지했다는 것. 자기 기분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남을 조금도 배려하지 않았다는 것. 모르고 한 일이라도 그것은 씻을 수 없는 죄가 될 수 있다는 것. 하물며 알고 저지르는 행위는 더욱 큰 죄가 된다는 것. 다행히도 형수는 내 말을 알아듣는 듯했다. 그날 두 아이는 L선생님께 진심으로 사과를 드렸고, L선생님도 두 아이의 사과를 흔쾌히 받아들이셨다. 아이들이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는 것 같다는 말도 해주었다. 아이들은 정말 잘못을 뉘우친 것일까? 그렇게 쉽게 뉘우칠 수 있는 아이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한 것일까? 혹시 그들이 쉽게 뉘우친 것은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기 전에 그들을 믿어주고 먼저 그들을 칭찬했기 때문이 아닐까? 칭찬은 사랑에서 나온다. 사랑하면 교육이 쉬워진다. 그날 퇴근 무렵, 상구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왔다. ‘선생님, 저 상구입니다. 저희들 때문에 힘드실 텐데 어제랑 오늘 일은 죄송합니다.’
(너희들 때문에 하나도 힘들지 않다. 오히려 보람을 느낀다. 사랑한다.)
‘예, 선생님^^ 좋은 모습 보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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