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박사들의 예상은 정확했다. 올해 노벨평화상 후보로 거론된 181명 가운데 스칸디나비아 반도 도박업체인 '베트세이프'가 가장 유력한 후보로 찍은 앨 고어가 결국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낙착됐다.
언론은 '환경을 선택한 노벨평화상'이라는 제목으로 지구온난화 문제를 부각시킨 '그린맨' 앨 고어와 유엔 정부간기후변화위원회(IPCC)의 수상 소식을 전하면서, 환경 문제가 이제는 세계 평화와도 관련이 있다는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환경 전도사로 활약해온 앨 고어가 영광스러운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된 것은 어쨌거나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미국의 환경 인식과 실천이 어느 정도인가를 현장에서 체험하고 있는 기자로서는 그에게 먼저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킬리만자로, 몬타나주 빙하국립공원, 히말라야 등의 만년설이 녹아내리는 지구온난화의 큰 재앙을 걱정하는 당신, 먼저 미국 국민들의 환경 의식부터 고양시키고 온난화를 진지하게 고민해 보시지요."
미국, 여름엔 춥고 겨울엔 덥고
지난 여름, 우리나라 고등학생이 쓴 '우리 학교 너무 더워요'라는 글을 인터넷에서 읽으면서 기자는 씁쓸했다. 왜냐하면 이 곳 미국은 한여름에도 아주 서늘하기 때문이었다.
바깥에선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지만 실내로만 들어가면 시원하다. 아니 시원하다 못해 추울 지경이다.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관공서·은행·대학 강의실·도서관도 춥다. 에어컨이 늘 빵빵하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안 나오는 긴 여름방학에도 교실의 에어컨은 여전히 강력하다.
물론 이런 실내온도에 이골이 난 미국 사람들은 짧은 민소매 옷을 입고도 잘 견딘다. 하지만 한여름에 두툼한 옷을 입고 있는 미국인들도 있는 걸 보면 분명 에너지 관리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
겨울은 또 어떤가. 여름과는 정반대다. 그러니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다고 해서 한국에서처럼 두꺼운 스웨터나 털옷만 입고 갔다가는 땀에 절어오기 십상이다. 왜냐하면 히터가 초강력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에 가는 아이들은 속에 얇은 티셔츠나 반소매 셔츠를 입고 가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기자는 버지니아주 해리슨버그 고등학교 시설관리 책임자인 섭코 교감선생님(Mr. Supko)을 만나 에너지관리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았다.
- 우리 아이들이 이 학교에 다니고 있는데요. 바깥날이 더울 때에도 교실은 늘 춥다고 옷을 가지고 다닙니다. 우리 아이들뿐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춥다고 한다는데요. 지나친 에너지 낭비 아닌가요? 겨울에는 또 덥다고 하고요. 에너지 절약을 위해서는 바깥과의 기온차를 고려해서 적정한 온도를 유지해야 하는 게 아닌가요?
"우리 학교는 컴퓨터로 실내 온도를 정해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깥 날씨를 고려해서 특별히 온도를 조절하고 있지는 않아요. 학교에선 중앙 냉난방시스템이 가동되고 있어 교실에서는 개별적으로 온도를 조절하지 않습니다. 대신 각 교실에 있는 온도조절기로 약간의 온도 조절은 가능합니다. (기자 : 딸아이 말로는 온도조절기 곁에는 아예 접근을 금지하고 있다고 하니 이 말은 틀린 것 같다.) 에너지 관리에 대해선 아직도 시행착오를 많이 겪고 있습니다."
빨랫줄 없는 미국... 공짜 햇볕 놔두고 왜 건조기 쓰나에너지 낭비 사례는 이밖에도 많다. 기자가 살고 있는 곳은 단지가 제법 큰 타운하우스다. 그런데 지난 8월부터 옆집이 계속 비어 있었다. 그 집 앞에는 '세놓음(For Rent)'이라는 입간판이 오랫동안 세워져 있었는데 에어컨 실외기가 24시간 동안 가동되고 있었다. 실내등도 켜져 있었고.
집을 내놓은 쪽에서는 손님이 쾌적하게 집을 둘러보게 하려고 에어컨을 틀어놓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정해진 시간에만 집을 공개하는 오픈하우스 제도가 있기 때문에 사실 조금만 신경을 쓴다면 얼마든지 전력 낭비를 줄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아, 저렇게 낭비되는 아까운 에너지가 지구 온난화를 부채질하고 있구나.'
미국도 사람 사는 곳이련만 이 곳에서는 밖에 내다건 빨래를 찾아보기 힘들다. 아예 빨랫줄이란 게 거의 없다. 어쩌다 눈에 띄는 빨래가 있긴 하지만 그것은 대개 이민자로 보이는 사람의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 사람들은 어떻게 빨래를 말리나. 건조기를 사용하여 인위적으로 말린다.
미국에서는 아주 오래된 집이 아니라면 대개 붙박이 가구와 가전제품(냉장고·오븐·전자레인지·식기세척 건조기·세탁기·빨래건조기)이 갖춰져 있다. 우리 집도 마찬가지인데 나는 빨래건조기는 잘 사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기도 아끼고 빨래도 자연광에 말리고 싶어서이다.
그래서 어느 날, 눈에 잘 안 띄는 뒷마당 처마 밑과 창고 기둥을 연결하여 빨랫줄을 매달고 빨래를 널었다. 그런데 아는 한국인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빨래를 밖에 내걸으면 이웃에서 뭐라고 그래요. 미관상 보기 흉하다고. 아마 집값 떨어진다고 걱정할 걸요."
결국 밖에 내다 걸었던 빨래를 다시 안으로 들여와야 했다.
직접 설거지하기가 환경실천? 한국인은 다 하는데
그런데 최근에는 이곳 미국에서도 빨랫줄을 부활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지난 10월 5일자 <데일리뉴스 레코드(DNR)> 신문은 빨랫줄을 사용하고 있는 린치버그 대학의 에코하우스(Eco-House) 프로그램을 소개했다. 에코하우스 프로그램은 이 대학 학생 여섯 명이 캠퍼스 안에 있는 에코하우스에 살면서 에너지 사용을 자제하고 지구를 보존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는 프로그램이다.
이들의 실천 사항은 다음과 같다. ▲안 쓰는 전기 플러그 빼 두기 ▲재활용 실천하기 ▲빨래는 건조기 대신 빨랫줄에 널어서 말리기 ▲식기 세척 건조기 대신 직접 설거지를 하고 그릇은 해가 드는 창 쪽에서 말리기.
한국 사람이라면 대부분 실천하고 있는 사소한 일이다. 그런데 이런 것이 아주 특별한 환경 실천인 것처럼 취급되고 신문에까지 보도되는 상황이 미국인의 환경 의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 좀 실망스러웠다.
앨 고어가 노벨평화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전 세계의 고민거리인 지구온난화 문제를 공론화하고 환경에 대한 각성을 촉구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지구온난화는 화석연료 과다 사용으로 이산화탄소·프레온·메탄 등의 온실가스가 배출돼 생기는 문제다.
그런데 온실가스를 직접적으로 줄이려는 적극적인 노력 외에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뭐가 있을까. 지구온난화 방지를 위해 노력하는 'help-stop-global-warming.com' 사이트에서는 지구온난화를 막을 수 있는 위대한 첫 걸음은 바로 재활용과 쓰레기를 줄이는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그렇다면 미국인들은 생활 속에서 이를 얼마나 잘 실천하고 있을까.
저 아까운 쓰레기들... 분리수거 좀 잘 하시지
기자가 사는 동네 타운하우스 단지에는 남색으로 된 큰 쓰레기통이 곳곳에 놓여 있다. 쓰레기를 버리러 갈 때면 나는 이따금 안을 들여다보는데 볼 때마다 한숨이 나온다. 왜냐하면 재활용이 가능한 플라스틱류, 콜라와 맥주 등의 캔류, 주스와 와인 등의 병류와 신문, 잡지 등이 마구 섞인 채 버려져 있기 때문이다.
특히 종이류의 자원 낭비는 대단히 심각한 상황이다. 종이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신문의 경우를 예로 들면 미국 일간지는 우리나라 일간지보다 지면도 많고 광고 전단지도 아주 많다. 또한 TV 프로그램이나 지역 소식, 연예계 소식 등의 다양한 정보가 별도의 책자를 통해 배달된다.
그런데 이렇게 신문과 함께 배달되는 종이류의 양이 토요일이면 엄청 많다. 주말을 앞두고 광고 전단지가 쏟아지기 때문이다. 그 양이 얼마나 대단하냐 하면, 전단지를 한 장씩 펼쳐놓으면 넓은 거실을 다 덮고도 남을 정도다. 이렇게 많은 양의 종이류가 각 가정으로 배달되고 있는데 대부분 분리 수거되지 않은 채 그냥 쓰레기 함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너무나 흔하다.
물론 이곳에서도 재활용을 위한 분리수거가 시행되고 있긴 하다. 시청에 전화하면 재활용 녹색 바구니를 받을 수 있고 거기에 플라스틱류·캔류·병류 등을 담을 수 있다. 종이류는 끈으로 묶어놔야 가져간다. (그러니 일부러 끈을 사야 하는 수고를 해야 하는데 이것이 귀찮아 그냥 버리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분리한 재활용 쓰레기는 월요일 아침에 재활용트럭이 와서 수거해 간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녹색바구니를 활용하고 있을까. 기자가 관찰한 바로는 우리 단지 내에서 녹색바구니를 내놓는 가정은 거의 손에 꼽을 정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편하게 보통 쓰레기와 함께 버리고 있다.
"공짜 비닐봉지 남으면 태워버려요, 나쁘지 않아요"미국의 대표적인 할인매장인 월마트. 카운터에 도착한 소비자의 카트 안 물건이 바코드 스캐너를 거친 뒤 속속 비닐봉지 안으로 들어간다. 계산원(캐시어)은 비슷한 종류끼리 분류하여 봉지 안에 넣지만, 이마저 신경을 써야 하는 일이기에 대충 새 비닐봉지를 열어 물건을 집어넣는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공짜 비닐봉지를 마구 쓸 수 있는 이곳에서는 카트 안에 있는 모든 물건들이 각각 비닐봉지에 담겨 카트에 실린다. 월마트에서 쇼핑을 마치고 나오는 두 사람을 만나 가져간 비닐봉지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물어보았다.
"쓰레기를 담아서 버려요. 그래도 여전히 비닐봉지가 많이 남죠."
"남는 비닐봉지는 태워버려요. 나쁘다고요? 그렇게 나쁘지 않아요."
소비의 천국이라는 미국에는 월마트 외에도 수많은 할인매장과 쇼핑몰이 있는데 여기에서 나오는 엄청난 양의 비닐봉지와 패스트푸드점에서 쏟아져 나오는 일회용품 쓰레기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교육 현장인 학교 식당에서도 일회용품은 지나칠 정도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해리슨버그 고등학교 점심시간, 다양한 음식을 파는 이곳 카페테리어에는 학생들이 자신의 구미에 맞는 메뉴를 찾아 길게 줄을 서 있다.
이들이 먹는 음식은 피자·서브 샌드위치·샐러드·그릴 음식 등인데 모든 음식은 일회용 식판에 담겨 나온다. 스푼·포크·나이프 등도 모두 일회용 플라스틱 제품이다. 학교 급식이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다섯 번 이루어지고 아침밥도 사 먹을 수 있는 카페테리어인 점을 감안한다면 이 학교 1300여 명의 학생들이 하루에 소비하는 일회용품의 양은 엄청나다.
"반환경" 질타 들은 '그린맨' 앨 고어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친환경주의자라는 앨 고어. 그는 지난 2월, 언론으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았다. 밖에 나가서는 환경을 떠벌리고 다니는 고어가 정작 자신의 집에서는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하는 반환경주의적인 행동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AP통신>에 따르면 테네시에 있는 화장실 여덟 개, 방 스무 개짜리 앨 고어의 맨션은 1년 전기료가 2700만원이나 되었다. 이는 미국의 일반 가정 전기 사용량(1만5600㎾h)의 무려 12배(19만1000㎾h)에 가까운 양이라고 한다.
환경 문제에 대한 미국 지도층의 관심은 어느 정도일까. 얼마나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대처하고 있을까.
지난달 21일부터 23일까지 <AP통신>과 여론조사기관인 입소스(Ipsos)가 벌인 전화 여론 조사 결과에서는 응답자(1001명)의 20%만이 부시 대통령의 환경문제 대응방안을 지지했다고 한다. 또한 미국 기업과 의회의 환경문제 대응 방안에는 각각 22%, 16%만이 지지했다.
이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미국인들은 그들의 지도층이 좀 더 적극적으로 환경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여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세계 최강 미국? 환경도 1등으로 신경 써 봐세계 인구의 5%를 차지하는 미국, 전 세계 자원의 25%를 소비하고 있는 미국, 지구 온난화의 주범인 온실가스의 25%를 배출하고 있는 미국(2002년에 발간된 존 더 그라프 외 2인 공저, <어플루엔자(Affluenza)> 인용). 교토의정서를 탈퇴한 무책임한 미국이 과연 미국인들의 이런 지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응할 것인지 두고 볼 일이다.
여론조사 결과와 관련하여 <AP통신>은 제리 메니스(34․미주리주)의 근거 있는 두려움을 소개하고 있다.
"나는 왜 사람들이 지금처럼 지구를 파괴하도록 그냥 내버려두는지 이해할 수 없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정말 겁난다."
인구 3억명이 넘는 초강대국 미국이 재활용과 일회용품 사용 억제, 온실가스 배출을 억제하려는 노력을 조금만 해도 지구 온난화는 분명 더뎌질 것이다.